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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70화 (270/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70화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케이가 죽는다고 생각하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하지만—

“넌 지금 이 곳에서 나오는 것만 생각해, 케빈 퍼킨. 이 멍청아!”

엘리자베스는 책상을 쾅 내려쳤다.

그렇다고 케빈을 두고 갈 순 없었다. 케빈이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빼고 구시렁거렸다.

“왜 소리는 질러요?!”

“뭘 잘했다고 말대꾸야! 네가 혹시라도 이 일로 감옥에 가게 된다면 나는 물론이고 케이 하커도 널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노려보았다. 케빈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케이 때문에 여기에 있는 거거든요?”

“케이가 그러라고 했어?”

엘리자베스가 눈을 부릅뜨자 케빈이 움찔했다.

케이가 케빈에게 그러라고 했을 리가 없다. 케이는 분명 케빈에게 현장에서 도망가든지 관련이 없다고 발뺌하라고 했을 것이다. 케빈이 멋대로 저지른 일이 분명했다.

역시나 케빈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저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케빈이 입을 삐죽 내밀고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말을 안 들었으니…… 혼이 나야지, 멍청아. 꼭 나올 거야. 아무런 걱정도 할 것 없어. 그 신사 놈의 자식은 반드시 체포될 거니까.”

“늘 생각한 건데요…….”

“응?”

“은근히 욕 잘 하는 거 알아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에 얼굴이 빨개져서는 소리쳤다.

“알아!”

* * *

엘리자베스가 궁의 정원을 가로지르자 보비들이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경사 하나가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정문은 막혀 있을 텐데요?”

엘리자베스가 경사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저도 알아요.”

“그런데 왜……. 궁 안을 막 돌아다니시는 건 곤란합니다, 아가씨.”

“곤란하다뇨? 전 엄연히 다니엘 경의 허가를 받고 들어왔으니 잠시 정원을 거니는 정도론 문제가 되지 않는 걸로 아는데요?”

엘리자베스가 순진한 척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사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경사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지금 아가씨는 그냥 정원을 거니시는 게 아니라 명백히 정문 쪽으로 향해 가고 있지 않습니까?”

경사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재빨리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가 정문 앞에 다다랐다. 엘리자베스는 정문 밖에 어른거리는 군인 두 명의 그림자와 한 부랑자 같은 형체를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가 다가가자 군인 두 명이 돌아보더니 얼른 경례를 해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그 경례를 따라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군인 하나가 물었다.

“여긴 어쩐 일…….”

군인의 목소리를 듣고 웅크리고 있던 한 여자가 일어났다. 엘리자베스는 그 여자의 초췌한 얼굴을 보았다.

그때, 행렬에서 보았던 깡마른 여자.

이 여자가 바로 에밀리다.

에밀리 역시 엘리자베스를 알아본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에밀리는 다급하게 철창을 붙잡았다.

“당신, 엘리자베스 클레몬트죠?”

에밀리의 말에 뒤에 있던 경사가 협박조로 말했다.

“이봐. 공녀님이시다, 경칭을 똑바로 사용해.”

엘리자베스는 경사를 노려보며 말했다.

“제가 본 이들 중에는 경찰들만큼 저한테 경칭을 사용할 줄 모르는 인간들은 없었어요, 경사. 가만히 있어요.”

경사는 엘리자베스가 쏘아붙이자 헛기침을 했다. 엘리자베스는 에밀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네, 맞아요. 엘리자베스 클레몬트예요. 여기서 지금 시위를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에밀리는 잔뜩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어깨와 목이 많이 경직된 듯 말을 할 때마다 어깨를 움찔거렸다.

“맞아요. 평민 하녀들이 매일 같이 죽어나가고 있어요. 지금 컬로든에서는 저런 보비들이 자꾸만 사건을 축소시키려는 것 같은데 바실리 스트리트, 레트니 애비뉴에서 벌어진 사건만 있는 게 아니에요. 제가 알기로는 세 건이 더 있어요.”

엘리자베스는 에밀리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사는 에밀리의 말에 들고 있던 총검을 만지작거리면서 엘리자베스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저 여자는 미친 여자입니다, 아가씨. 저 얘기를 계속 듣고 계시다간 쓸데없이 홀려버린다니까요?”

엘리자베스는 경찰들이 이런 말을 좋아할 리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사건의 실마리가 될 것이 있다면 엘리자베스는 반드시 알아야 했다. 엘리자베스는 경찰과 군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정문을 열어주세요.”

엘리자베스의 요구에 군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이 시간에 궁 정문을 여는 것은 불가합니다.”

군인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입술을 물었다.

그러곤 에밀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군요. 잠시 남자 분들은 저쪽으로 가서 뒤로 돌고 서 계세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군인이 얼굴을 찡그렸다. 경사는 격하게 반발했다.

“뭡니까? 왜요?”

“왜냐뇨. 지금 에밀리에게는 심각한…….”

엘리자베스는 군인과 경찰들이 절대 모를 법한 의학적인 용어를 사용하되 부인과 질환처럼 보여서 네 사람이 그녀와 엘리자베스 곁에서 꺼질 수 있게 만들 언어를 골랐다.

“생리적 문제가 있어서……. 그녀의 내밀한 곳을 진찰하여……. 심폐기능을 조절하고…….”

엘리자베스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가자 군인과 경찰들은 점점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곤란한 시선을 교환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계속해서 어려운 말을 늘어놓자 군인 중 하나가 얼른 그녀의 말을 끊었다.

“얼마 동안이면 됩니까?”

“이봐!”

경사가 반발했다. 하지만 군인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경사는 끙 소리를 내며 뒤로 돌았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까딱하면 대답했다.

“신사시로군요. 역시 레이디가 곤란할 때는 도움을 주셔야죠. 10분이면 됩니다.”

군인은 엘리자베스가 대답하기가 무섭게 보비들과 제 동료 군인에게 손짓했다. 그들은 터덜터덜 정문의 저 편으로 걸어갔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이 뒤를 도는 것까지 뚫어지게 확인했으므로 군인과 보비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등을 보였다.

에밀리는 그것을 확인하고는 놀란 얼굴로 말했다.

“제가 어디가 아파 보이나요?”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다만 차가운 곳에서 너무 있어서 몸이 긴장되어 보여요. 그럴 때 자칫하면 근육에 마비증상까지 올 수 있으니 이런 걸 덮는 게 좋겠어요.”

엘리자베스는 제 목소리가 군인과 보비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임을 알고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 품 안에서 조사실에서 슬쩍 해온 담요를 내밀었다. 에밀리는 그걸 보더니 살짝 웃었다.

“당신은 거짓말쟁이로군요. 공녀님인데, 거짓말쟁이예요.”

엘리자베스는 에밀리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정겹다고 느꼈다. 당연했다. 에밀리는 남부 사투리를 쓰고 있었고 노동자들의 언어를 쓰고 있었다. 에밀리는 공장에서 오랫동안 일한 여성 노동자였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거짓말쟁이지만 당신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거길 바라요. 평민 하녀의 죽음이 셋이 더 있다구요?”

에밀리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올라도 애비뉴에서 두 건, 래비틀 스트리트에서 한 건이 있었어요. 둘 다 평민 하녀였고 실종된 상태예요. 그런데 이 세 건 모두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갈 때 벌어진 실종이었고 바실리와 레트니에서 있었던 살인사건과 날짜가 가까워요. 그러니 분명 같은 놈이거나 아니면 조직적인 범행이라고 봐야죠. 이걸 봐요. 이건 제가 그 래비틀 스트리트에서 일하던 하녀의 고용주인 후작 부부의 아들의 방에서 훔쳐온 건데, 여기 보면 이렇게 쓰여 있잖아요. 더러운 피를 정화하라. 줄여서 P.D.B. 이게 이 사람들 약자예요. 이걸 조사해야 한다구요.”

엘리자베스는 에밀리가 내미는 책을 받아들었다. 그 책은 표지와 내지의 접착제를 뜯어낸 채였는데 그 공간에 갈색 액체로 P.D.B.라고 쓰여져 있었다. 갈색 액체의 정체는 무엇일까……?

에밀리의 말을 듣고 나니 MLK가 떠올랐다.

더러운 피를 정화하라.

열등한 켈크족의 피를 가진 자들을 수정하라.

엘리자베스에게는 그 둘이 똑같은 말로 여겨졌다.

엘리자베스는 그 책을 얼른 품 안에 집어넣었다. 에밀리가 다급하게 군인과 보비들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놈들……. 패거리가 얼마나 되는지는 몰라도 이런 식으로 책에 표식을 남겨서 서로 주고받는 거 같아요. 책 안에 지령 같은 게 써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그때 군인 하나가 고개를 돌렸다. 엘리자베스는 얼른 에밀리를 철창 너머에서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에밀리의 치마 안으로 손을 넣었다. 에밀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쳤다.

“이게 뭐 하는!”

“가만 있어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엘리자베스가 에밀리의 다리를 주물럭거리는 걸 본 군인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에밀리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욕을 지껄였다.

“깜짝 놀랐다구요.”

“미안해요. 어쨌든 이건 내가 반드시 윗선에 알리도록 할 거예요. 도움이 크게 될 것 같군요, 에밀리. 고마워요.”

엘리자베스는 이것을 다니엘에게 가져다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싱긋 웃었다. 그러자 에밀리는 고개를 저었다.

엘리자베스는 신문에서 보았던 에밀리와 지금 이 곳에서 본 에밀리가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신문에서 본 에밀리는 전투적인 여성일 것만 같았다. 오물을 투척하기도 하고 여자들을 이끌며 행진하기도 하는 장수 같은 사람 말이다. 하지만 추운 곳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남부 말씨를 쓰는 이 아가씨는……. 끽해봐야 스무 살로 보이는 주근깨투성이의 시골 소녀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팔처럼 가느다란 다리를 놓았다. 그러자 에밀리는 더러운 스타킹으로 감싸진 제 다리를 얼른 치마 아래로 숨겼다.

엘리자베스는 더더욱 조지가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절대로 레트니가 돌아오게 두어서는 안 되었다.

엘리자베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에밀리가 빨개진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제 몸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요?”

“그 셔츠……. 바지…….”

엘리자베스는 제 차림을 바라보다가 에밀리를 보았다. 에밀리는 어린 소녀처럼 발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 어린 여자를 신문에서는 얼마나 전사처럼 보이게 찍어놓았던가.

“여자도 그런 걸 입을 수 있군요. 우리도 작업복으로 바지를 입고 싶었는데 공장장이 절대 허락하지 않았어요. 뒤에서 보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가 없을 거라나.”

엘리자베스는 에밀리의 말에 무슨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여자 노동자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공녀였고, 이 궁 안, 정문으로 가로막힌 컬로든의 화려한 정원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귀족이며, 혜택 받은 여자였다. 반면 에밀리는 여자였고 노동자였다. 그녀는 이 정원 안으로 한 발자국도 들여놓을 수 없었고 거리에서 부랑자처럼 잠을 잤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몰록의 힘을 가지고 있었을 때라면 이 철창을 당장 손으로 부숴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 경사가 소리쳤다.

“이제 다 됐겠죠?”

엘리자베스가 경사 쪽을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가 에밀리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이제 그만 집으로 가봐요.”

“어차피 난 집이 없어요, 엘리자베스. 아니, 공녀님. 제 부모님은 제가 들어오면 당장 죽여버리겠다고 했고 진짜로 한 번은 죽일 뻔해서 다시는 안 들어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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