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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69화 (269/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69화

엘리자베스는 착잡한 얼굴로 케빈을 보았다.

“그럼 하얀 털을 가진 괴물을 봤다는 건…… 역시 몰록이었구나? 그 신사를 그렇게 피떡으로 만든 것도 몰록의 짓이야?”

케빈은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닦달했다.

“누가 한 짓이야?”

“…….그 신사가 케이를 찌른 것 같았어요. 케이가 완전히 돌아버렸더라구요. 케이의 눈이…….”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을 들으며 그 신사 놈을 피떡으로 만든 것이 케이라는 것을 알았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이를 악물었다.

“왜, 왜, 네가 그랬다고 했어?”

“몰라요. 그냥 다급해서 그렇게 말했어요. 그 신사 놈이 케이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 같았고 케이는 사라졌잖아요. 얼마나 수상해요. 신사 놈을 죽도록 패버리고 갑자기 사라져버린 남자라니! 나라면 몰라도 케이라면 분명 그 여자를 죽이려고 한 죄를 뒤집어쓸 거라고 생각했어요.”

엘리자베스는 퍼뜩 신사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여자를 떠올리며 다급하게 물었다.

“그럼 그 하녀는? 그 하녀는 증언을 안 했대? 분명 자신을 죽이려고 한 자가 너나 케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거 아니야!”

엘리자베스가 윽박지르자 케빈은 겁먹은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았다. 케빈은 눈꼬리가 축 쳐진 채 대답했다.

“그 하녀는 어둠 속에서 갑자기 공격을 당하는 바람에 얼굴을 제대로 못 봤다고 해요. 다만 학술원 내부 사람인 것 같다…… 그렇게 말하는 바람에…….”

“그 바람에 네가 다 뒤집어쓰게 됐다?”

“엘리즈…….”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불안한 눈을 바라보다 케빈의 손을 잡았다. 케빈의 손은 차가웠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불안감에 자신에게도 전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말했다.

“……괜찮아. 걱정할 것 없어. 국왕 폐하께서 지시해서 그 남자의 집을 뒤질 거고, 그 남자 집에서 뭔가가 발견될 거야.”

케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국왕 폐하께서요?”

“그래.”

케빈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제 이마를 짚었다. 케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젠장……. 진짜 내가 잘한 짓인가 엄청 고민했다구요. 케이는 없고, 삼촌도 사라지고, 어디에 물어볼 데는 없는데 보비들은 계속 나를 범인으로 몰고 가고!”

케빈의 목소리가 잘게 떨려왔다. 케빈의 목소리에는 케빈이 그간 느꼈을 불안감, 공포, 두려움이 잔뜩 묻어나왔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손을 꽉 쥐고 말했다.

“그런데 케빈, 케이의 눈이 어쨌다는 거야?”

케빈이 고개를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떨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보았다. 케빈은 당시 상황을 생각하는 듯 엘리자베스의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으면서도 생각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붉었어요. 몰록의 눈처럼요. 그리고 평소보다 움직임이 빠르고……. 그리고 그 쇠 집게요. 보비들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지만 사실 그 집게 케이가 던진 거예요. 가로등에 그대로 박혀 있더라구요.”

가로등에 집게가 박혀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정상적으로 증가하는 체력과 근력, 그리고 기민해지는 감각—

붉은 눈, 하얀 털—

그 모든 것이 케이가 몰록에 더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굳이 몰록의 뒤를 쫓아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첫째, 몰록을 불러오는 것은 몰록의 피다.

케이가 엘우드 밀과 함께 몰록을 추격하면 몰록의 행방을 알기 어려울 때 케이의 피를 이용해 몰록을 불러오기가 용이했다.

둘째, 몰록과 맞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몰록뿐이다.

엘리자베스는 의회 청사 첨탑 위에서 케빈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날렸던 제 모습을 떠올렸다. 흐릿한 기억이지만 분명 엘리자베스의 힘과 공격력은 완벽한 몰록에게 뒤지지 않았다.

케이는 두 가지의 계산을 가지고 남부로 갔을 것이다.

몰록을 쫓기 위해 사라진 케이에 대한 생각으로 얼굴이 어두워졌을 때였다. 엘리자베스의 손 아래에 있던 케빈의 손이 거꾸로 엘리자베스의 손을 덮어주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보았다. 케빈은 어색하게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너무 걱정하지 마요.”

“지금 네가 나한테 할 말이야?”

“……그런가……?”

“헛소리 말고 너나 빨리 나올 생각해.”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케빈은 그 말에 머쓱하게 제 손을 내렸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보며 피식 웃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빈은 엘리자베스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어디로 갈 거예요?”

어디로 가냐고? 엘리자베스는 뒤로 돌아 다시 케빈을 보았다. 케빈은 엘리자베스가 걱정되는 얼굴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엘리자베스는 당장이라도 마차를 몰아 엘린크 성의 북쪽으로 가고 싶었다. 빅오크 포레스트를 다 뒤져서 케이 하커를 찾아내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이 미친 짓은 전부 그만두고 둘이서 함께 멜니아로 가자고, 네 약속대로 우린 왕 대신 대통령이 있는 그 땅에서 산책도 하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때로는 비가 와도 우산 없이 걸을 수도 있지 않겠냐고, 그렇게 케이를 독촉하고 싶었다.

이 땅에 프란시스도, 케빈도, 엘우드 밀도, 몰록도 전부 두고 케이와 엘리자베스만 쏙 탈출해서 나올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엘리자베스는 무엇이든 할 생각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만 생각하고, 케이는 엘리자베스만 생각하는 것. 그렇게 두 사람만 이기적으로 이 망해가는 세계를 떠나는 것.

그걸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타락해도 좋지 않은가.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왜냐하면 네가 날 맘에 들어 했으면 좋겠어서 하는 모든 일들이 나를 하루하루 더 나아지게 만드니까. 나를 좋게 변화시키니까.

너 때문에 내 세상은 매일매일 더 나아져.]

케이가 달달 외우고 다닌다는 제 편지가 갑자기 머릿속을 스쳤다. 20살의 엘리자베스가 썼던 인생 최초의 밀서 말이다.

쉐필드에서 늘 평화롭고 지루한 지평선에 둘러싸인 채 갇혀 있는 듯 살다가 리오든에 처음 왔던 그때,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까내리는 사교계의 방식이 편리하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저 사람은 백작가의 영애이니 나보다 지위가 낮고 저 사람은 후작 부인이므로 나보다 지위가 높지만 감히 공작가 영애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2년간의 사교계 생활에 물들어 귀족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그러나 공장에서, 때로는 파티에서, 또 때로는 길거리에서 케이와 마주칠 때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밑바닥을 들키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케이의 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고, 딱딱하게 예의를 갖춰 인사를 나누고 나면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했던 나쁜 짓이 떠올랐다. 뒤에서 다른 영애의 드레스를 험담했던 일, 속으로 다른 사람의 계급을 판단하고 그걸 이용해 자신에게 편리하게 모임을 주도하려고 했던 일, 짜증나는 일이 있으면 길거리의 노동자들에게서 냄새가 난다며 불평을 했던 일—

너와 마주치면 거울처럼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이 비쳐 보였다.

좀처럼 눈 한 번 마주쳐주는 일이 없는 네가 어쩌다가 길거리에서, 공장에서, 파티에서 나에게 눈길을 한 번 줬는데 그때 내 모습이 그런 모습이면 어떡하지.

나는 언제나 그런 생각에 빠져 있었어. 너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생각.

쉐필드에서는 농노들이 나를 돌보고 부모님이 나를 자신들의 틀에 맞춰 깎아내려고 하고 가정교사가 나를 훈육해주었는데, 리오든에서는…… 리오든에서는 내가 나를 돌보기 시작했어. 다른 누구도 아닌, 너 때문에.

내가 나를 돌봐서, 내 눈에도 아름다워지면, 그렇게 내 모습을 만들면 너도 나를 사랑하게 될 줄 알고, 나도 너를 가질 수 있게 될 줄 알고.

그런데 그거 알고 있어?

길바닥에서 자고 있는 아저씨한테 페니를 건네거나 부랑자들이 말을 걸어도 친절하게 대답하는 것, 그건 전부 네 모습이었어.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가 어쩌다가 공장에서 케이와 마주치면 케이는 이빨이 빠진 더러운 냄새가 나는 노동자에게도 친절하게 웃어주고 있었다. 엘리자베스에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다정한 얼굴로 그 사람을 들여다봐주고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또, 길거리에서 마주쳤던 어느 날엔 거리에서 자는 노숙자를 깨워 페니를 쥐여 주면서 ‘이봐, 빵이라도 먹고 자. 이 동전으로 술을 처먹으면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라며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래. 내가 너를 보고 있을 때 너는 언제나 그런 모습이었다. 천하다며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는 사람에게 눈을 돌려 다정한 미소를 지어주고 숨길 수 없는 선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걸어주는 모습.

나한테는 언제나 건방진 모습만 보여주면서.

나쁜 자식.

개 같은 자식.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침을 뱉어주고 싶었다.

아니, 케이도 엘리자베스를 한 번이라도 봐줬으면 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만날 때마다 그런 것처럼, 케이도 길을 걷다 엘리자베스와 마주치면 눈으로 좇기만 하다 갈 길을 잃어버렸으면 했다.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발견했을 때, 엘리자베스 역시 거리에서 잠든 아저씨를 깨워 페니를 내밀거나 노동자에게 친절하게 웃어주고 있었으면 했다.

너도…… 너도 나를 보았을 때, 내게서 거울처럼 네 모습을 발견했으면 했다. 네 가장 선한 모습을 내게서 찾았으면 했다.

그래서 그 모습이 너무 달콤하고 사랑스러워서 결국엔 자꾸만 나를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어져서…… 나를 사랑하게 되었으면 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때의 그 마음을 떠올리며 이제는 타락한 두 사람을 겹쳐보았다.

내 눈에서 네 가장 선한 모습을 비춰 보았으면 했던 내가 내 가장 악한 모습을 너의 얼굴에서 보게 되었을 때, 나는 견딜 수 있을까?

우리가 모두를 외면하고 비겁한 모습으로 떠나게 될 때, 네가 나를 안고 입을 맞추고 내 벌거벗은 몸을 내려다볼 때, 그래서 너의 갈색 눈동자가 나의 눈동자 위를 스쳐갈 때—

네가 혹시나 나에게서 네 가장 악한 모습을 보고 있을까 봐 문득문득 두려워지겠지.

내가 너에게 네 바닥을 보여주는 사람이라서, 그래서 나를 보고 싶지 않아지고 나와 눈을 마주치는 게 두려워져서 종래에는 나를 미워하게 될까 봐.

나는 두려워지겠지.

우리의 사랑이 거기까지 갈까 봐.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왕립병원으로 가야 해. 엘린크에서 나흘 뒤면 전투가 벌어져.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못하면 케빈…… 레본에는 미래가 없어.”

케빈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엘리즈……. 정말 케이를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 거예요? 괜찮겠어요? 혹시라도……. 혹시라도 케이가 몰록과 싸우다가…….”

케빈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엘리자베스의 가슴 속에서도 어둠이 빛을 뒤덮었다. 엘리자베스는 제 눈앞에서 몰록에게 죽임을 당하는 몰록의 모습을 떠올렸다. 황소 같은 거구에 짓눌려 가죽이 찢겨나가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몰록 말이다.

아니, 몰록이 아니라…….

케이.

케이 하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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