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68화
엘리자베스가 병원 바깥으로 뛰어 내려갔을 때는 이미 조명탄의 불빛이 사라지고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정문에서 엘리자베스를 기다리고 있는 토비에게 뛰어가며 소리쳤다.
“토비! 너 방금 빛이 튀어 오른 곳의 위치를 알고 있니?”
엘리자베스의 말에 토비가 마부석에서 넋을 빼고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방금 그 번개, 아가씨도 보셨어요?”
“그거 번개가 아니야! 거기가 어디야?”
“번개가…… 아니라고요……?”
토비는 중얼거리다가 엘리자베스가 벌컥 성을 내자 얼른 대답했다.
“저긴 리오든에서 엘린크성으로 가는 길에 있는 숲이에요! 빅오크 포레스트라고 성주님의 사냥터가 있는 걸로 유명해요!”
토비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지금 엘우드 밀은 전선으로 가고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설마…… 몰록을 쫓아서?
그 말은 달리 하면 몰록도 전선으로 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마차에 오르며 토비에게 말했다.
“당장 학술원으로 가자. 당장!”
엘리자베스가 소리치자 토비가 허겁지겁 마부석에서 내려 말고삐를 확인했다.
엘리자베스가 다급하게 토비를 재촉하고 있을 때였다. 엘리자베스의 뒤를 따라 내려 온 브레드가 다급하게 정문 문을 열고 엘리자베스에게 소리쳤다.
“선생님! 엘 선생님!”
“왜요!”
엘리자베스가 얼굴을 찌푸리며 벌컥 화를 내자 브레드는 겁먹은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게……. 탄저균 말이에요……. 그거 내일 아침에 닭들에게 주입하러 오시나요?”
브레드는 꾸물거리며 땅을 발로 찼다. 하지만 내일 아침에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브레드 선생. 그거 닭에게 주사해줄 수 있겠어요?”
“네? 제가요?”
“그래요. 부탁 좀 해요.”
브레드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뻐끔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가 싱긋 웃었다. 브레드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엘리자베스는 얼른 마차 문을 닫고 토비를 재촉했다.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혼자 남은 브레드가 중얼거렸다.
“그거…… 생각보다 좀 오래 살균해서…… 문제가…… 있다는 얘기를…… 하려고…….”
브레드는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뒤로 돌았다. 거기엔 간호사 선생 하나가 서 있었다. 간호사가 브레드에게 물었다.
“무슨 얘기 하셨어요? 또 엘 선생님께 혼나셨어요?”
간호사의 말에 브레드가 벌컥 소리를 질렀다.
“그럴 리가! 이번엔 엘 선생님이 나한테 중요한 임무를 맡기셨다구! 실험 보조야!”
브레드는 씩씩거리며 문으로 들어갔다. 간호사가 키득거렸다.
* * *
엘리자베스가 학술원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인데도 학술원 앞에 수많은 보비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학술원의 하녀 한 명이 보비들에게 둘러싸여 벌벌 떨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평소 기숙사를 청소해주던 그 하녀를 잘 알고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그녀에게 인사하려고 다가가자 하녀는 얼른 엘리자베스를 가리키며 보비들에게 말했다.
“저 여자가 케빈 퍼킨 씨하고 친한 여자예요!”
보비들은 그 말에 엘리자베스를 돌아보곤 엘리자베스가 누군지 알아본 뒤 한숨을 내쉬었다.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은 덤이었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이시군요.”
보비들은 엘리자베스에게 모자를 벗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눈에 띄게 친절해진 보비들의 행태를 보며 다니엘 빌리스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리라 여겼다. 그것이 퍽 달갑지는 않아서 엘리자베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여긴 왜……. 그리고 케빈은 왜요?”
“케빈 씨를 잘 아십니까?”
“네.”
“케빈 퍼킨 씨가 평소에 귀족에 대한 반감을 가진 편이었던가요?”
“네?”
엘리자베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귀족에 대한 반감이라고? 그러자 보비가 헛기침을 한 뒤에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제가 지금 이 피해자분의 친구에게 듣기로는 케빈 퍼킨 씨가 평민으로 학술원 내부에서 특히 차별을 많이 당하는 편이었다던데요?”
엘리자베스는 보비의 말에 하녀를 내려다보았다. 하녀는 엘리자베스가 바라보자 고개를 슬쩍 돌렸다.
케빈이 평민이라 특별히 차별을 많이 당했던가? 그냥 평민 학생들은 전부 차별을 많이 당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취지로 답을 하곤 답답해서 보비를 다그쳤다.
“대체 왜 그러시는데요!”
“지금 학술원에 다니던 한 귀족 남성과 학술원에서 일하던 평민 하녀 하나가 린치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혼자 멀쩡하게 남아 있던 케빈 퍼킨 씨가 하녀를 구하려다 남성을 쇠 집게로 가격했다고 하더군요. 막상 남성은 갈비뼈가 부러지고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면서 흰 털이 난 괴물을 보았다는 헛소리를 하는데 말이에요……. 그건 분명히 악의를 가진 공격이 아닐 수 없…….”
“자, 잠깐만요.”
엘리자베스가 다급하게 보비의 말을 막았다.
“방금 흰 털이 난 괴물이라고 했어요?”
보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지금…… 케빈은 어디에 있어요?”
엘리자베스가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하녀가 대신 대답했다.
“어디에 있긴요! 당연히 궁에 새로 생긴 임시 경찰청에 입건되어 들어갔죠! 그 인간이 사실 하녀를 찌르고 남자도 죽이려고 했는지 어떻게 알아요? 그 남자는 완전히 돌아버린 모양이던데!”
엘리자베스는 하녀를 노려보았다.
“그 말대로라면 케빈이 찌른 건지 아닌지 그건 어떻게 알아요? 케빈은 차별 받는 학생이 아니라, 학술원에서 제일 똑똑하고 현명한 학생이었어요!”
엘리자베스는 제 윽박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 별꼴이라며 중얼거리는 하녀에게서 고개를 돌려 보비들을 보았다. 보비들을 이 자리에서 설득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었다. 엘리자베스가 그들에게 말했다.
“다니엘 빌리스. 그 사람을 만나야겠어요. 제 이름을 말하면 바로 들여보내줄 거예요. 궁으로 가죠.”
엘리자베스의 말에 보비들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곤란한 시선을 교환하더니 곧 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가 엘리자베스에게 뭔가 말하려고 달싹거렸다. 엘리자베스가 얼른 그를 노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다니엘 빌리스 경이 저에게 붙은 건방진 경사 하나를 날려버렸다는 소식은 들었겠죠? 경거망동하지 않길 바라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남자는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 * *
엘리자베스가 궁에 도착했을 때는 이제 막 잠에서 깬 게 분명한 다니엘 빌리스가 불쾌한 얼굴을 하고 엘리자베스를 데리러 나왔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보자 억지로 얼굴을 펴서 밝게 인사하며 말했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그렇게 서 있으니 요새 매일 같이 컬로든 궁 앞에서 하녀들의 죽음을 규탄하는 에밀리인 줄 알고 제 심장이 떨어질 뻔했습니다.”
엘리자베스가 제가 들어온 뒷문이 아닌 정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에밀리요? 에밀리가 요새 정문에 서 있나요?”
“네. 밤낮을 가리지 않고요. 정문에서 잠을 잔다는 소식도 들려오더군요. 혹시라도 참변을 당하면 큰일이라 매일 군인 둘이 그 앞을 지키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이 어두운 거리에서 잠을 자기까지 한다는 에밀리가 걱정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컬로든 궁의 정원을 일별했다. 하지만 곧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은 케빈 퍼킨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 살인사건 말이에요. 범인으로 추정되는 자가 잡힌 건 알고 계신가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다니엘은 별궁 앞에 서 있는 보비들을 힐끔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침실에서 내려오면서 짧게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학술원 평민 학생이라죠?”
엘리자베스는 보비들을 노려보았다.
귀족 남성을 체포하기는 아무래도 껄끄러우니 어떻게든 케빈 퍼킨으로 범인을 몰고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다니엘에게 말했다.
“아뇨, 학술원 귀족 남성이에요. 보비들이 말한 평민은 그저 하녀를 구하려다가 힘 조절을 잘못 한 거구요.”
“힘 조절을 잘못 했다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외상이던데요?”
다니엘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보비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보비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물러갔다. 엘리자베스는 둘만 남은 별궁 회랑에서 다니엘에게 말했다.
“평민 하녀들을 죽인 건 귀족 남성이에요. 이미 신문에서도, 대중들도,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신문과 대중의 말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자베스 양. 안 그래도 요새 신문에서 연일 탄저병에 대해 떠들어대는 덕에 저희가 머리가 아주 아픕니다. 그런데다 오늘은…….”
다니엘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한 병사가 죽었다지요?”
다니엘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움이 들어 있었다. 그 날카로움은 엘리자베스의 심장을 할퀴고 지나갔다. 엘리자베스는 조엘의 눈동자를 보며 느꼈던 공허함에 가슴이 다시 아파왔다. 엘리자베스는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그건…… 그건 어쩔 수 없었어요. 너무 늦게 증상을 알았고 그래서 약을 늦게 썼고…….”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한 사람의 죽음에 이런 변명을 붙이고 있는 스스로가 너무 싫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생각하기로 했다.
“귀족 남성의 집을 한 번 수색해보세요. 만약 그자가 그전 살인사건 역시 벌인 자라면 집에서 흉기가 나올 수도 있고…….”
“귀족의 집을 맘대로 털 수는 없습니다, 엘리자베스 양.”
다니엘은 엘리자베스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절망스러운 기분으로 다니엘을 보았다. 다니엘은 엘리자베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피곤한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국왕 폐하의 지시가 없는 한은 말입니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다니엘은 엘리자베스의 표정 변화를 보며 피식 웃었다.
“왜 웃으세요?”
“아뇨. 아닙니다. 엘리자베스 양은 정말 거짓말은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저기요…….”
“……어쨌든. 이 일은 국왕 폐하께 말씀드려보겠습니다. 다만, 귀족의 집에서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으면 케빈 씨의 신변 처리를 도와드릴 방법은 없겠군요. 엘리자베스 양.”
엘리자베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다니엘이 다정하게 엘리자베스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대신.”
“……?”
“반드시 탄저병을 막을 방법을 생각해내세요. 이제 전투가 며칠 후로 다가왔습니다. 나흘 후면 서부 항구로 연합군이 들어옵니다. 국왕 폐하의 호의에 반드시 응답하시라는 겁니다, 엘리자베스 양.”
다니엘은 다정한 듯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이를 테면 거래 같은 것이었다. 엘리자베스의 부탁을 다니엘이 들어주는 대신에 엘리자베스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거래.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다니엘에게 한 가지를 더 부탁했다.
“케빈을 만나게 해주세요.”
* * *
엘리자베스는 조사실에 잡혀 있는 케빈을 바로 만날 수 있었다. 케빈은 엘리자베스를 보자마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케이가 몰록을 쫓아갔어요, 엘리즈. 엘 선생님을 쫓아서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에 아까 왕립병원에서 보았던 조명탄을 떠올렸다. 그 조명탄의 위치는 정말로 몰록의 위치였던 것이다.
그 몰록을 엘우드 밀뿐만 아니라 케이 역시 쫓고 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