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67화
그건 케이가 박람회에서 보았던 열기구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케이가 눈을 번뜩이는 순간, 엘우드 밀이 코웃음을 쳤다.
“전쟁이 뭔지……. 넌 전혀 몰라. 세계를 뒤덮는 전쟁이라는 게, 어떤 건지 말이야. 국가와 국가가 서로 대립하면서, 지도자들은 그걸 이용해서 국민들을 통제하려고 들고……. 국민들 사이에서는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불신이 팽배하게 되는 거. 넌 그런 걸 몰라.”
엘우드 밀은 계속해서 케이가 아무것도 모른다며 몰아붙였지만 케이의 눈앞에는 계속해서 이오페아 전역을 물들이는 전쟁에 대한 환상이 어른거렸다.
초고도로 발달한 기계 문명과 사람들의 추악한 욕망, 두 가지가 만나서 이 세상을 어떤 지옥에 빠뜨리는지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그 지옥 속에서 케이가 떠올린 것은 단 한 사람이었다.
엘리자베스.
케이는 그녀의 세상이 진짜로 지옥이 되는 것을 막아야만 했다.
엘우드 밀이 말했다.
“……치료제는…… 이 나라의 문명으로는 절대로 만들 수 없어. 하지만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때였다. 뒤에서 기척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쓰러져 있던 젊은 귀족이 달아나고 있었다. 케이가 그를 뒤쫓으려 하자 엘우드 밀이 외쳤다.
“케이 하커!”
하지만 케이가 젊은 귀족을 덮치는 것이 더 빨랐다.
케이가 젊은 귀족의 어깨를 쥐는 순간 젊은 귀족이 케이의 손을 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던지 케이의 손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케이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저 귀족의 이가 손등 살을 파고들어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상대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다만 다시 한번 몰아치는 파도 같은 피 냄새에 숨을 참아야 했다.
헛구역질이 다시 몰려오려고 했다. 뒤에서 엘우드 밀이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케이는 귀족을 들어올렸다. 케이의 한 손에 귀족이 너덜거리는 천처럼 들어 올려졌다. 케이가 그 자식을 던지려는 순간 엘우드 밀이 중얼거렸다.
“……몰록…….”
케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인줄 알고.
그러나 곧 엘우드 밀이 바라보고 있는 쪽이 다른 곳임을 알았다. 엘우드 밀이 응시하는 방향의 어둠 속에는 붉은 눈 두 개가 지붕 위에서 번쩍거리고 있었다. 엘우드 밀이 총을 겨눴다.
“케이 하커. 그 자식을 잡아!”
엘우드 밀이 소리쳤을 때였다. 몰록의 목소리가 케이의 귓가에 쟁쟁거렸다.
‘달콤한…… 냄새…….’
몰록이 말하는 달콤한 냄새가 무엇인지 케이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피 냄새였다. 몰록은 어둠 속에서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널 먹고 싶지만, 그 대신에 저걸 가져가마. 그 남자를 나에게 줘. 그럼 너는 살려주지.’
케이는 그 말을 들으며 제 손에 잡혀 있는 귀족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약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분노를 푸는, 인간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괴물. 살 가치가 없는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살덩이. 엘리자베스의 세상을 경멸과 혐오, 분열과 붕괴로 물들인…….
쓰레기.
케이는 그것을 당장이라도 몰록에게 던져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탕!
그때 엘우드 밀의 총성이 허공을 울렸다. 케이는 정신을 차리고 몰록을 보았다. 하지만 몰록은 옆 지붕으로 옮겨갔을 뿐 완전히 달아나지는 않았다. 케이는 여전히 팔을 뜯기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그 남자를 놓지 않고 질질 끌며 가로등 근처로 걸어갔다.
눈은 몰록을 주시했다. 그는 붉은 눈동자의 몰록이 이쪽으로 내려오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엘우드 밀의 총 때문이었다. 몰록은 엘우드 밀이 슬레이트를 총으로 쏠 때마다 자리를 옮겨대며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다. 집채만 한 짐승이 내는 소리를 들으며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형……. 형, 나야. 형, 나라고……. 너무 배가 고파서…… 고파서 그래…….’
디트리히 폰은 진정으로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케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몰록을 노려보았다. 그때 몰록이 도약을 준비하는 자세를 취했다. 케이는 몰록이 바라보는 쪽을 보았다. 케이가 엘우드 밀에게 소리쳤다.
“엘 선생! 뒤를 봐! 여자! 여자를 봐!”
케이가 소리치자 엘우드 밀이 고개를 돌렸다. 몰록이 지붕 위에서 몸을 던졌다. 엘우드 밀이 욕지거리를 뱉으며 몰록을 다시 쏘았다. 빗나갔다.
하지만 몰록은 이제 길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케이는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다가 하얀 털의 황소 같은 몰록을 보고 기절하는 것을 느꼈다. 엘우드 밀은 탄환을 집어넣는 것을 포기하고 여자에게로 우선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몰록은 두 번째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몰록이 뛰어올랐다.
탕!
그 순간, 총성이 또다시 울렸다.
탕!
두 번이었다. 케이는 두 곳에서 들린 총성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나는 옆문으로 튀어나온 케빈이 쏜 총알이었다.
케빈은 벌벌 떨며 자신에게 총을 맞아 낑낑거리며 가로등 뒤로 숨는 몰록을 노려보고 있었다.
“젠장할! 둘이 지금 뭐하는 거예요! 미쳤어요?”
“야, 너 왜 이렇게 늦게 나와!”
엘우드 밀은 케빈의 등 뒤에서 탄환을 얼른 장전했다.
“지금 학술원에 사람도 없는데 나도 무기는 준비를 하고 나와야 될 거 아니에요! 밖에서 총소리를 듣자마자 튀어나온 거예요! 이 미친 인간들아!”
케빈이 소리치며 다시 한 번 총을 쐈다. 그러자 몰록이 지붕 위로 기어서 올라갔다. 케빈은 몰록을 계속해서 쐈다. 그러나 한 발도 제대로 맞지 않았다.
“놓치면 안 돼!”
엘우드 밀은 소리치다가 재장전을 마치고 얼른 몰록을 따라 뒷골목으로 뛰기 시작했다. 케이는 이를 악물었다.
“안 돼!”
케이가 외쳤지만 엘우드 밀은 이미 뒷골목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케이는 케빈에게 말했다.
“넌 이 귀족 놈을 붙잡아. 저 여자를 저렇게 만든 장본인이야.”
“뭐라구요? 그럼 이놈이 그 살인마란 말이에요?”
“그건 몰라. 어쨌든 지금…….”
케이는 학술원 밖 거리 저편에서 말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사람의 속닥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아까 들린 두 개의 총성.
그 중 하나는 분명 보비의 것이다.
지금 리오든에 떨어진 계엄령상 이 거리에도 분명히 보비가 서 있었어야 했었다. 하지만 보비가 교대하는 시간이었을 것이고 이놈은 그 시간을 노려 학술원의 평민 하녀를 노린 것이다.
케이는 케빈이 들고 있는 총을 빼앗아 들었다.
“이건 내가 갖고 간다. 네가 이런 걸 들고 있다가 보비한테 들키면 큰일이야. 보비 놈들이 누가 이 새끼를 피떡으로 만들었냐고 하거든 모른다고 해. 그냥 너는 여자 비명소리를 듣고 구해주러 왔는데 이렇게 됐다고. 알았냐?”
케빈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케이의 팔을 잡았다.
“어딜 가려고요. 미쳤어요, 둘 다? 지금 몰록을 쫓겠다는 거예요?”
“그럼 어떡해. 엘리자베스가 이 리오든에 살고 있어. 이 리오든을 저런 괴물 새끼가 헤집어 놓게 내버려둘 순 없잖아. 그리고 만약…….”
“만약?”
“만약 내가 괴물이 된다면 엘 선생이 나를 죽여줄 거다, 케빈.”
케이가 케빈의 손을 뿌리쳤다. 케빈은 어두운 뒷골목으로 뛰기 시작한 케이를 보며 망연자실한 눈으로 거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말발굽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케빈은 사라지는 케이의 뒷모습을 보며 외쳤다.
“여, 여기 사람이 쓰러져 있어요! 여기에요! 여기!”
케빈이 손을 흔들자 멀리서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쓴 보비 둘이 소리쳤다.
“뭐야! 어서 이리와!”
“아까 들린 총성이 이쪽인가? 넌 누구야?”
케빈은 불안한 표정으로 쓰러진 남자와 여자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제, 제가…… 여자 비명소리가 들려서…… 나와 봤더니…….”
케빈은 남자가 가까스로 눈을 뜨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케이…… 하커…….”
케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놈이 케이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케빈은 남자의 등 뒤, 가로등 아래 떨어진 쇠 집게를 바라보았다. 이를 악문 케빈이 말했다.
“……저 집게가 보여서…… 제가 이 남자의 뒤통수를 후려쳤어요. 저예요, 저!”
보비들이 케빈의 말에 서둘러 말에서 내렸다.
케빈은 이미 아무도 없는 어두운 뒷골목만을 응시했다. 어두운 뒷골목 안쪽은 리오든 특유의 공장 매연과 섞인 짙은 밤안개가 짙게 깔려 한 치 앞도 보기 힘들었다.
* * *
엘리자베스는 눈을 희번득하게 뜨고 있는 조엘의 앞에서 거친 숨을 토해냈다. 옆에서 간호사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결국…… 죽었어요.”
엘리자베스는 조엘의 가슴을 내려쳤다. 그러나 조엘은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땀으로 범벅이 된 이마를 장갑 위의 손등으로 거칠게 닦았다.
결국 조엘이 죽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느님을 찾으며 중얼거릴 때부터 상태가 좋지는 않아 보였지만 그래도 내일이면 항생제의 효과가 들어 호전될 줄 알았는데……. 너무 늦게 약을 쓴 모양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처음 잃은 환자도 아닌데 무시무시한 탈력감에 몸을 까딱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간호사가 말했다.
“아침이 되면 병원에 기자들이 엄청 몰려오겠죠……? 탄저병으로 병사가 죽었으니…….”
엘리자베스는 간호사를 노려보았다.
“지금 기자가 문제예요?”
엘리자베스의 날카로운 질문에 간호사는 우물쭈물하다가 조엘의 머리 위로 하얀 천을 덮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돌렸다.
결국 절망감이 한 사람을 질식시켰다.
엘리자베스는 이 절망감이 불러올 또 다른 절망감을 생각해봤다. 리오든 사람들에게 탄저병으로 죽은 병사 소식이 들려오고 검은 점이 생기면서 죽는다는 마녀의 저주가 돌아다니고 또 부잣집이 모여 있는 거리에서는 마녀를 죽이려는 청년들이 돌아다니리라.
이 미친 세상을…….
너 없이 나보고 혼자 살라고.
자정쯤에 케이와 포옹했던 것이 떠올랐다. 케이에게 반드시 살라고 윽박을 질렀던 때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지금 당장 케이를 다시 보고 싶었다. 다시 보게 된다면 아까처럼 포근하게 안지 않고 더 격하게 안아줘야지. 목덜미를 꽉 안고 케이의 숨을 다 들이마셔야지. 우리 둘이 하나가 된 것처럼.
엘리자베스는 비틀거리면서 일어어나 조엘의 시체를 덮은 하얀 천을 벗겨냈다. 조엘의 눈은 부릅떠진 채였다.
그는 어쩌면 죽을 때까지 신을 찾았는지도 몰랐다. 저 천장 위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신을.
엘리자베스는 그의 눈을 감겨주었다.
엘리자베스는 병실 문을 나서면서 장갑과 마스크를 벗어서 통에 던져 넣어 버렸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친 숨을 토해내며 복도를 걸었다.
브레드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엘리자베스에게 말을 걸려고 하자 뒤에서 간호사가 제지했다.
“조엘이 죽었어요. 어떡하죠?”
엘리자베스는 간호사와 브레드의 말소리를 들으며 복도 끄트머리까지 걸어갔다. 그 순간이었다. 눈앞이 번뜩였다.
펑!
엘리자베스는 눈앞에서 반짝거리는 불빛을 보고 그대로 굳었다.
저 불빛이 낯설지 않았다. 저건—
‘조명탄.’
엘리자베스는 저런 번쩍이는 불빛을 쏘는 탄환을 엘우드 밀에게 받은 적이 있었다.
뒤에서 브레드가 말했다.
“번개가 치는 건가요?”
엘리자베스는 브레드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