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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66화 (266/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66화

남자가 바닥에 떨어뜨렸던 단검을 주워들었다. 남자가 케이의 어깻죽지를 온 힘을 다해 찔렀다.

케이는 남자의 공격을 미리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피하지 않았다. 이미 온몸에 독처럼 퍼진 분노가 케이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케이의 어깻죽지에 단검이 파고들었다.

‘달콤한 냄새…….’

그 순간 이상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하지만 그 소리에 집중하기 전에 케이는 제 어깨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끈적거리는 피 냄새에 이미 온 정신을 빼앗겼다. 케이는 저도 모르게 남자의 크라바트를 붙잡고 있던 손아귀에서 힘을 뺐다. 그러고는 뒤로 살짝 물러나 제 어깻죽지를 손으로 훑었다. 손바닥에 뜨거운 검은 피가 묻어나왔다. 케이는 피가 묻은 제 손바닥을 혀로 핥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먹어 보고 싶다…….’

이 기괴한 식욕이 어디까지 흘러갈까? 신화 속 어떤 사내처럼 케이는 제 몸을 다 먹고도 허기에 시달리는 입만이 남아 평생을 지옥 속에 살아가게 될까?

케이는 불쾌한 상상 속에서 비틀거렸다. 그 순간 남자가 단검을 쥐더니 다시 휘두르려고 했다. 남자의 피투성이가 된 입술이 벌어졌다. 케이는 그 모습을 아주 느린 속도로 바라보았다.

남자가 입을 열고, 이렇게 말한다.

“……이……. 더…… 러…… 운…… 피…….”

남자의 말에 케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더러운 피.

그 순간 자신이 지금 꿈속에 있는지, 아니면 현실 속에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미래의 갸흐통, 창고 안에 수많은 포로들을 가둬둔 연구소에서 일어날 법한 일이 지금 레본에서도 일어나고 있나? 특정 인종을 제외한 나머지 인류를 말살하고 지도부의 비도덕성을 여러 가지 비약으로 포장하는 그 더러운 세계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지금 레본에서, 조지 국왕이 적어도 입으로나마 노동자의 인권과 여자, 이교도 역시 레본의 시민으로 살게 해주겠음을 읊는 이 세계에서…… 이 세계에서도 일어나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자신이 꿈에서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케이는 후자를 선택했다. 이곳은 꿈일 거라고. 그렇게 믿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단숨에 단검을 든 남자의 손목을 꺾은 것은 설명할 수가 없지 않겠나.

케이는 제 손 안에서 남자의 손목이 으스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케이는 목구멍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며 낑낑거리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케이의 눈을 보며 결국은 다리 사이로 뜨끈한 액체를 내보냈다.

케이의 눈은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났다. 남자의 손에서 단검이 떨어지며 경쾌한 금속성이 거리에 울려 퍼졌다.

케이의 입에서는 짐승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크르르…….”

케이가 손목을 놓아주자 남자는 부러진 제 손목을 쥔 채 무릎만으로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다시 공격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케이는 땀과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움직이는 남자를 천천히 따라갔다.

남자가 더 이상 기기도 힘들어 중간에 멈춰 섰을 때 케이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케이가 말했다.

“다시…… 다시 말해봐.”

제가 말하는 것이 인간의 말인가, 괴물의 말인가. 어쨌든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케이는 다시 말했다.

“더러운 피라고, 다시 말해보라고.”

남자는 또다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케이의 갈색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케이는 남자의 어깨를 쥐었다. 남자는 케이의 팔을 떼어내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곧 힘이 빠졌다. 케이는 아무런 방해 없이 남자의 턱을 쥐었다. 제가 손에 힘을 조금만, 조금만 더 주면 당장 남자의 턱을 으스러뜨릴 수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에 살짝 뒤로 물러났다. 버둥거리는 남자를 한 손에 쥔 채 왔던 길을 되짚어 간 케이는 남자가 떨어뜨린 단검을 주웠다. 케이가 단검을 쥐자 남자가 놀란 눈으로 더 가냘픈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흐…… 흐흑…… 으아아아!”

케이는 귀를 아프게 하는 비명을 들으며 상상을 했다.

남자의 목을 저 단검으로 찔러 거기서 흘러나오는 더러운 피를 제 입으로 받아 마신다. 오랜만에 몸 안에 들어차는 충만감에 케이는 몸을 떨리라. 그는 남자의 피로 갈증을 해소하고 남자의 살을—

탕!

그 순간이었다. 귀를 찢어놓는 파열음과 함께 어둠 속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놀란 케이가 뒤로 돌다가 남자를 놓쳤다. 바닥에 떨어진 남자는 기절했는지 힘없이 늘어졌다. 케이는 옆문에 서서 연기가 흘러나오는 총을 들고 있는 엘우드 밀을 보았다.

“이 미친 자식!”

엘우드 밀이 소리쳤다.

케이는 바닥에 떨어진 탄환에 묻은 초록색 발광물질을 바라보았다. 케이의 몸이 그 초록색 물질을 보는 순간 이성의 가냘픈 끈을 끊어내고 날뛰기 시작했다. 케이는 엘우드 밀을 향해 단검을 겨눴다.

엘우드 밀은 케이에게 총을 겨눴다. 총신이 가늘게 떨렸다. 엘우드 밀은 케이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정신 차려라, 케이! 정신 차려!”

엘우드 밀은 케이에게 경고하면서 자신의 곁에 쓰러져 있는 하녀의 목에 손가락을 대고 맥박을 확인했다.

케이는 엘우드 밀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마치 짐승 같은 소리가 케이에게서 흘러나왔다.

엘우드 밀은 케이가 자신을 향해 튀어오르는 것을 보며 총을 두 손으로 제대로 잡았다. 여차하면 쏴야 한다. 엘우드 밀은 자신의 머리는 확실하게 알고 있는 그 사실을, 방아쇠를 당겨야 할 이 작은 손가락도 이해할지 궁금했다.

엘우드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당겨야 했다.

탕!

엘우드 밀의 손목이 반동으로 인해 뒤로 밀려났다. 총구에서 발사된 탄환이 긴 초록색 궤적을 그리며 허공으로 날아갔다. 케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엘우드 밀의 입에서 거친 숨과 함께 욕설이 흘러나왔다.

“씨…… 씨발……!”

엘우드 밀은 허공을 향해 총구를 겨눈 채로 단숨에 케이의 몸에 깔려버렸다. 케이가 엘우드 밀의 몸을 짓누르고 엘우드 밀을 노려보았다.

초록색 눈—

케이가 중얼거렸다.

“……피부가 희고 머리가 백금발이며 눈이 초록색인 것이 솔타니스의 특징이다.”

케이의 말을 듣는 순간 엘우드 밀이 얼굴을 찌푸렸다. 케이는 엘우드 밀의 얼굴을 보면서 귓가에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 그렇다고 봐. 누군가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인간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이 엉망진창은 절대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없잖아. 그게 우리가 먼저여야 한다고, 그게 내 조국이고 나여야 한다고 생각해.’

케이는 그 목소리가 자신에게 익숙하다고 여겼다.

그건 디트리히 폰의 목소리였다. 누구보다 먼저 인간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결국은 괴물이 되어버린 자.

케이는 디트리히 폰의 말을 그대로 입 밖으로 냈다.

“형. 나는 형을 믿어. 형 안에 있는 선한 모습들. 위기를 맞으면 누구나 잠시 나빠질 수는 있는 거잖아.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거야. 바닥만이 진짜 그 사람의 모습은 아닌 거잖아.”

엘우드 밀의 초록색 눈동자 속 동공이 수축했다.

엘우드 밀은 얼이 빠진 얼굴로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케이는 엘우드 밀의 몸을 짓누르고 있던 제 몸을 뒤로 뺐다. 뒤로 물러선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목구멍으로 침과 위액이 섞인 액체를 뱉어냈다.

몸이 벌벌 떨렸다. 조금 전 느꼈던 기묘한 허기가 역겨워서 참을 수 없었다. 케이는 제 위장까지 뱉어내고 싶은 기분으로 구토를 했다.

케이가 바닥을 벌벌 기는 동안 엘우드 밀이 상체를 일으켰다. 엘우드 밀은 케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 방금…… 한 말…….”

케이는 한참을 토하다가 엘우드 밀을 보았다. 엘우드 밀의 손에 들려 있는 총을 보며 케이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죽어버리고 싶다. 다시는 괴물이 될 수 없도록, 이 자리에서—

‘난 매일매일 불행할 거야. 너로 인해, 내 인생은 무너질 거야. 난 절대 행복하지 않을 거고, 불행할 거야. 평생을 널 원망하면서 살 거야.’

‘죽지 않겠다고 말해.’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말이 케이의 이성을 간신히 붙들어놓았다.

케이는 엘우드 밀을 노려보았다. 케이는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왜…… 왜 쏘지 않았어…….”

“왜냐니. 미쳤냐? 넌 지금 사람의 몸을 하고 있잖아. 그런 상태로 쏘면 죽어, 이 미친놈아.”

“당신이 죽을 수도 있었어.”

케이의 말에 엘우드 밀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지친 얼굴이었다. 엘우드 밀은 비틀비틀 일어나서 저 쪽 뒤에 엎어진 남자의 코 밑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엘우드 밀은 허탈하다는 듯이 그의 옆에 앉았다.

“살아는 있군……. 정말 살아만 있어……. 넌 방금 살인을 저지를 뻔한 거야.”

“살인자였어!”

“왜, 그래서 너도 살인자가 되려고?!”

엘우드 밀이 케이에게 호통을 쳤다. 엘우드 밀은 핏발이 선 눈으로 바닥을 기어 다니는 케이를 차분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방금…… 방금 말이야……. 나한테 기억이 돌아왔거든?”

“뭐……?”

케이는 엘우드 밀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것을 놀란 눈으로 주시했다. 엘우드 밀은 제 머리를 헝클이며 뒤로 돌았다. 케이는 엘우드 밀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내가 포로들에게 실험을 지시한 연구소 책임자에 가까웠다는 것도, 내가 결국 디트리히 폰이 괴물이 되게 만들었다는 것도……. 전부 기억이 났다. 전부.”

엘우드 밀의 고해성사를 들으며 케이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뭐 하는 짓이야?”

엘우드 밀은 뒤로 돌았다. 뒤로 돈 엘우드 밀의 얼굴에는 퀭한 피로감만이 가득했다. 케이는 비릿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이는 엘우드 밀에게 비척비척 걸어가 거구의 몸으로 엘우드 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치료제는? 치료제에 대해서도 기억이 났겠지, 이 살인자 새끼야.”

케이의 눈에 안광이 돌았다. 엘우드 밀은 케이의 말에 제 발 밑에서 꿈쩍도 하지 못하는 크라바트를 한 젊은 귀족을 내려다보았다. 엘우드 밀이 떨리는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넌…… 넌 몰라……. 전쟁이 어떤 건지, 넌 모른다고!”

“무슨 개소리야! 우린 지금 전쟁 중이야, 엘우드 밀!”

케이가 소리쳤다. 엘우드 밀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네가 뭘 알아? 네가 멸망한 세계를 본 적이나 있어? 비행선이 하늘을 가득히 메우고 불을 등에 업고 강으로 뛰어들어 익사하는 사람들. 매일 눈을 뜨면 강 위에 떠 있는 시체들. 방화와 약탈— 사람들 사이의 혐오와 경멸. 총력전이라는 게 뭔지 알고나 있나?”

케이는 비틀거리며 머리를 쥐었다.

비행선? 비행선이라고?

케이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이어지는 두통에 차마 말을 하지 못했다.

케이는 고개를 꺾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케이는 눈앞에 번뜩이는 환영을 보았다.

검은 배처럼 생긴 것들이 하늘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것들은 날아다니다가 배 아래쪽에서 커다란 철 덩이를 떨어뜨렸다. 철 덩이는 하늘에서 빠른 속도로 내려와 땅에 내다 꽂힌다.

쾅!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땅이 불바다가 되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 누군가는 엘우드 밀의 말처럼 불을 등에 업고 강으로 뛰었다.

케이는 이를 악물었다.

그곳은 지상에 도래한 지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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