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65화
케이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엘리자베스는 생각했다.
이 개 같은 자식을 살고 싶게 하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
엘리자베스가 불행할 거라고 말하는 것.
엘리자베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케이가 조엘처럼 멍청한 생각을 할까 봐 두려웠다. 시시각각 조여 오는 죽음이 케이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도, 살고 싶다는 생각을 조금씩 케이가 체념하는 것도—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지옥에 떨어지길 바라는 게 아니면 어떻게든 살아. 살란 말이야. 죽음 같은 건 준비하지도 말고……. 내 앞에서 이야기하지도 마. 알겠냐고!”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멱살을 잡은 손에서 힘을 뺐다. 그러자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꽉 안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품 안에서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흐느끼며 케이에게 매달렸다.
“……죽지 마. 몰라…… 그냥 죽지 말라고……. 죽지 않겠다고 말해……. 약속해줘…….”
하지만 케이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 * *
조엘의 상태가 다시 나빠졌다. 엘리자베스는 금방 다시 병동으로 올라가야 했다.
케이는 토비에게 엘리자베스를 맡기고 말을 몰아 리오든으로 향했다. 그가 리오든에 진입하자마자 곧장 향한 곳은 왕립학술원이었다.
케이는 왕립학술원의 뒷문으로 들어가 여전히 불이 켜져 있는 도서관의 문을 열었다. 불 켜진 도서관에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한 사람만이 앉아 있었다. 엘우드 밀이었다.
그는 케이가 문을 여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케이가 그에게 걸어가자 고개를 들었다. 케이는 엘우드 밀이 앉아 있는 책상을 쾅 내리치며 말했다.
“치료제는 어떻게 됐나?”
책상이 울리는 바람에 엘우드 밀이 놀란 눈으로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너 뭐야? 갑자기 와서는…….”
“내 질문에 대답해, 엘우드 밀.”
케이는 엘우드 밀의 눈을 보면서 디트리히 폰을 떠올렸다. 이 눈동자 안에서 죄책감을 찾아 헤매던 그 간절한 마음.
케이는 지금 이 남자를 믿어도 될지 의심스러웠다.
“이봐!”
엘우드 밀이 발끈해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케이는 엘우드 밀의 눈을 보았다. 그 순간, 케이의 귓가에 디트리히 폰의 목소리와 엘우드 밀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나만이 널 이해할 수 있고…….’
‘너만이 날 이해할 수 있어.’
방금까지 관자놀이에 핏대를 세우며 자신을 노려보던 케이가 갑자기 멈칫거리며 비틀거리자 엘우드 밀이 다급하게 물었다.
“왜 그래? 머리가 아프냐? 허기? 갈증? 근육통? 뭐야?”
엘우드 밀이 다급하게 케이에게 걸어와 물었다. 케이는 핏발 선 눈으로 엘우드 밀을 노려보다 그의 멱살을 쥐었다. 하지만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멱살이 잡힌 것은 엘우드인데, 케이는 오히려 자신이 목이 졸린 것처럼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 쓰레기 자식……. 너…… 치료제 만들 수 있는 거 맞아? 기억을 잃어버린 건……. 맞나?”
엘우드 밀은 케이에게 멱살을 잡힌 채로 케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는 케이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급하게 케이의 눈꺼풀을 열어보았다.
“동공 수축은 정상이고……. 뭔가 병리적인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너 역시 지금 몰록으로의 전이가…….”
“내 말에나 대답해, 엘우드 밀!”
“닥쳐! 너 지금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다고, 이 새끼야!”
엘우드 밀이 소리쳤다. 케이는 엘우드 밀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디트리히 폰과 똑같은 초록색 눈동자.
탕!
‘디트리히!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고!’
‘씨발! 다 나가!’
케이는 하얀 방에서 엘우드 밀이 디트리히 폰과 다른 포로들을 풀어주는 환영을 보았다. 케이의 몸이 점점 무너졌다. 엘우드 밀은 당황한 얼굴로 케이의 몸을 붙들었다.
“이 개자식아. 무너지지 마! 네가 쓰러지면 내가 잡을 수가 없잖아! 덩치는 커다란 자식이……!”
엘우드 밀은 얼른 케이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왔다. 케이는 비틀거리며 중얼거렸다.
“형…… 형……. 나…….”
“뭐?”
“아니, 아니야…….”
케이는 중얼거렸다. 엘우드 밀이 다급하게 케이를 붙잡았다.
“이 자식아. 네가 날 못 믿는 건 알겠지만 난 의사야. 내가 만약에 전쟁터에서 널 만났더라도, 그래서 네가 적군이었더라도 난 네가 죽어가고 있으면 일단 살려. 살려서 포로로 데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니까 증상을 똑바로 말해. 무슨 일이야!”
케이는 엘우드 밀의 말과 겹쳐지는 엘리자베스의 말을 떠올렸다.
‘전쟁터에서 군의관들은 적군도 살릴 의무가 있어요. 군의관은 군인이기 전에, 인간이기 전에, 의사입니다.’
‘내가 지금 당장 당신들을 죽여버리고 싶어도 당신들이 내 앞에 환자로 누워 있다면 일단 살려는 놓을 거라는 뜻이야.’
케이는 엘우드 밀의 초록색 눈동자를 보며 엘리자베스의 파란 눈동자를 떠올렸다. 케이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책상을 붙잡았다. 헛구역질이 흘러나왔다. 케이는 제 몸을 어떻게든 가누려고 노력하며 엘우드 밀을 노려보았다.
“날……. 날 살려.”
“그래. 널 살릴 거라고. 그러니까…….”
“이국…… 이국에서 온 무슨 잎사귀 같은 걸로 만드는 거야. 몰록이 되는 주사약.”
“뭐?”
엘우드 밀이 미간을 찌푸렸다.
케이는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이내 술에 취한 사람처럼 책상 아래로 쓰러졌다. 엘우드 밀은 다급하게 케이의 머리를 받치려다가 그만두었다.
케이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엘우드 밀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쓰러진 사람치고 너무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엘우드 밀은 그 기세에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케이가 말했다.
“네놈이, 그 MLK라는 실험을 고안해내면서 이국에서 잎사귀를 가져왔어. 물론 순순히 가져온 게 아니라 강탈해왔겠지. 수많은 무역회사들이 이국에 그러했듯이. 어쨌든 그 잎사귀를 정제하면 약이 돼. 몰록이 되는 약. 그걸 계속해서 투여하면…….”
엘우드 밀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를 붙잡았다.
그는 뒤로 몇 발자국 더 물러나더니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러기를 수 분— 엘우드 밀은 갑자기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엘우드 밀이 정신없이 자료를 찾는 사이에 케이가 조금 정신이 든 몸으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엘우드 밀이 케이를 붙잡았다.
“너 뭐야? 그 몸으로 어딜 가겠다는 거야? 일단 앉아. 엉?”
“……아니, 엘리자베스에게 다시 가봐야겠군.”
엘우드 밀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 달밤에? 엘리자베스가 어디에 있는데? 이봐! 야! 이 멍청한…….”
엘우드 밀은 도서관을 나간 케이의 뒷모습을 보며 다급하게 케이를 불렀다. 하지만 엘우드 밀은 케이를 따라 나가지 못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수많은 자료들을 바라보았다.
이 수많은 자료들을 하나로 이어줄 선.
엘우드 밀은 그것을 엉뚱하게도 다른 곳에서 발견한 것 같았다.
그는 서둘러 펜을 잡았다. 잊어버리기 전에 이것만 써놓고 케이를 잡으러 갈 생각이었다.
* * *
케이는 어두운 학술원 1층 회랑을 걸었다. 회랑을 걷는 사이 말을 제대로 묶지도 않고 왔다는 게 생각이 났다. 케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날 살려.’
케이는 자신이 엘우드 밀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지겨운 생이라고—
언제나 생각해왔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인생에 들어온 순간부터 케이는 이 인생이 너무나 소중해졌다.
케이는 제 품에서 자신이 불행할 거라고 지껄이던 엘리자베스를 떠올렸다. 엘리자베스가 얼마나 손쉽게 자신을 변화시키는지 깨달았다. 허탈한 마음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조급하고 두려웠다.
가진 게 없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케이의 걸음이 다시 빨라졌다. 그때였다. 밖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케이는 다시 걸음을 멈췄다. 후문으로 향하려던 그는 비명소리가 들린 곳이 후문이 아니라 학술원에서 일하는 급사들이나 드나들 법한 옆문이라는 것을 알고 발걸음을 돌렸다.
케이는 삐걱거리는 옆문을 열었다. 어둠 속 닭장과 축사에서 닭들은 푸드덕거리고 돼지들은 불안한 듯 컹컹거렸다. 질척거리는 흙이 케이의 구두에 붙어왔다. 케이는 불쾌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닭과 돼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케이는 가만히 옆문 옆에 있는 쇠 집게를 집어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열린 옆문의 사각지대에서 검은 그림자가 툭 튀어나왔다. 케이는 어둠 속에서 날렵하게 움직이는 상대에게서 피 냄새를 맡았다. 케이의 목구멍 깊은 곳에서 구역질이 올라왔다. 케이가 쇠 집게를 상대에게 던졌다.
케이는 그 상대가 몰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금방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상대의 입에서 사람의 말이 나왔으므로.
“……으억! 씨발, 너 누구야!”
케이는 쇠 집게를 왼쪽 눈에 정통으로 맞은 상대가 비틀거리는 것을 보고 다시 옆문이 가려주고 있던 사각지대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학술원에서 일하는 것처럼 보이는 평민 하녀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손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따끈한 혈향.
케이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 혈향은 길게 이어져 방금 케이에게 얻어맞은 상대의 손에 들린 단검에서도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이놈이 평민 하녀를 찌르려고 하자 하녀가 저항하다 손이 피투성이가 된 것이다.
쇠 집게를 다시 주워든 케이는 상황을 파악하고 달아나기 시작한 상대를 향해 내던졌다.
쇠 집게는 사람의 힘으로 던졌다기에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날아가 남자의 허벅지를 가격하고 건너편에 있는 가로등에 박혔다. 케이는 온몸의 근육이 날뛰는 것을 느꼈다.
‘이 새끼가 범인이다.’
케이는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돌아서는 순간 남자의 목덜미에 있는 하얗게 다려진 크라바트를 보았다. 전형적인 귀족의 차림이었다. 케이는 강의실 안에 그려져 있던 목이 매달린 여자의 시체를 떠올렸다. 벌벌 떨면서 보비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던 엘리자베스도.
이 새끼가 그 모든 것의 범인이다.
케이는 직감했다. 아니, 물론 아닐 수도 있었지만 이자는 적어도 공범이었다. 레트니 애비뉴에서 살인을 하고, 바실리 스트리트에서 살인을 했으며, 엘리자베스의 강의실에 피를 붓고, 마녀라는 낙서를 한 자가 모두 같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래도 이 사람이다.
케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낙서를 보고 웃은 사람, 그 낙서 때문에 벌벌 떠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속으로 고소하게 생각한 사람, 엘리자베스가 밖으로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게 만들었으며, 메리가 매일 아침 우물물을 길러 나갈 때마다 토비와 함께 나가게 한 사람.
모두 같은 사람이다.
결국은 같은 사람이다.
케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로등에 꽂혀 있는 쇠 집게를 보고 벌벌 떨며 제 다리를 붙잡은 채 연신 소리치는 남자에게 걸어갔다.
“살려줘요! 살려주세요!”
방금까지만 해도 하녀를 찌르려고 했던 남자는 우습게도 제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조금 전 케이가 엘우드 밀에게 그랬던 것처럼.
“역겨운 새끼.”
케이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남자의 가슴팍을 강하게 걷어찼다. 빠직, 남자의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케이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남자를 노려보며 남자의 크라바트를 쥐었다. 집에서 고용한 하녀가 다려줬을 이 하얗고 빳빳한 크라바트.
케이가 그 크라바트를 움켜쥐고 남자를 깃털처럼 가볍게 들어올리려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