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혼하러 돌아왔다 263화 (263/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63화

꿈속에서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청혼을 하는 케이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내 아버지가 널 꼬셔서 어떻게든 공작가에 편입되라고 하더군. 그러면 나한테 공장을 주겠다고 말이야. 이런 말을 들으면서까지 나와 결혼이 하고 싶어?”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청혼을 받아들이기 위해 걸어가자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엘리자베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되어 느꼈다. 엘리자베스가 된 케이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넌 내 거야, 케이. 네가 무슨 꿍꿍이를 뒤로 품고 있든 그런 것은 상관없어. 네가 내 것이기만 하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손을 잡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회하게 될 거야…….”

엘리자베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케이를 마주 쳐다보았다.

그 오랜 시선의 의미를 케이는 알 수 있었다.

21살,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그때는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이유가 자신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엘리자베스의 푸른 눈동자는 케이의 탁한 갈색 눈동자에 비해 월등하게 아름다웠고 고귀했다. 엘리자베스의 눈동자가 케이의 탁한 눈동자를 지나 콧대, 입술을 지나갈 때 케이는 온몸이 달아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제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엘리자베스가 주지시키는 것 같아서.

그럴 때면 케이는 오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엘리자베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지금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는 중이었다.

엘리자베스와 케이의 남은 생을 변화시킬 무언가.

엘리자베스가 리오든에 올라오고 나서 매일매일 갈구했던 무언가. 지금 엘리자베스와 케이를 쳐다보고 있는 귀족과 젠트리들을 실망시킬 그 무언가—

사랑.

우리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그 천지개벽할 일이 일어나길 바라.

엘리자베스는 속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물론 그때의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마음 따윈 조금도 모르는 채 결국 엘리자베스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로버트가 흡족하게 박수를 쳤다. 케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귀족과 젠트리들이 케이와 엘리자베스의 약혼을 축하하는 말을 건넸다.

그게 케이의 첫 청혼이었다.

“축하합니다, 로버트 하커 씨.”

“축하드려요, 공작님.”

엘리자베스인 케이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그때 당시 엘리자베스가 느꼈던 것과 똑같을 구역감을 느꼈다.

귀족과 젠트리의 결합에 눈이 새파란 귀족들도, 갈색 눈동자를 가진 젠트리들도 다들 기쁘게 웃었다. 그건 정말로 두 젊은 남녀의 결합을 축복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혼인을 통해 젠트리들이 상류 사회에 진입할 거라는 예감, 혼인을 통해 상류 사회에 진입한 젠트리들을 이용해먹을 수 있을 거라는 예감. 그들은 각자 다른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중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했던 말의 진짜 의미를 조금이나마 깨닫는 중이었다.

이제부터 엘리자베스와 케이는 서로를 이용하고 뜯어먹는 관계로 살아가게 될 거라고.

엘리자베스는 불길한 예감을 들은 사람 같은 얼굴로 그곳에 서 있다가 이내 견디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아니, 케이가 눈을 떴을 땐—

그곳은 또 다른 곳이었다.

“피부가 희고 머리가 백금발이며 눈이 초록색인 것이 솔타니스의 특징이다. 솔타니스는 인류 중 가장 우월한 인종이며, 피부가 검고 머리가 탁하며 눈이 검은 자들은 잡종이다. 인류 대부분의 범죄는 이들이 벌인다.”

케이는, 아니, 디트리히 폰은 하얀 조명이 아주 밝게 켜진 거대한 창고에 서서 확성기에 대고 연설을 하는 남자와 함께 서 있었다. 디트리히 폰 앞에는 죄수복을 입은 피부가 검거나 어두운 사람들이 100명 정도 서 있었다.

디트리히 폰은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자신과 같은 가운을 입고 있는 연구소 직원들을 보았다. 그들은 대부분 백금발에 하얀 피부, 초록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디트리히 폰의 시선은 그들 중에서도 가슴팍에 ‘엘우드 밀’이라는 수가 놓인 가운을 입은 한 남자에게 오래 머물렀다.

그는 오랫동안 그 남자에게서 죄책감의 기운을 찾아 헤맸다.

이 개 같은 세상을 변화시킬 희망.

디트리히 폰이 알던 엘우드 밀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

그는 그런 것에 휘둘려 잠시 옆에 있던 남자가 건네는 주사약을 늦게 받아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남자가 디트리히 폰에게 말했다.

“동무. 정신 차려. 왜 그래?”

“……아뇨. 아닙니다.”

“얼 빼고 있지 말라고. 이건 조국의 사활이 걸린 실험이야. MLK. 주사약이 생각보다 많이 부족한 것 같으니까 내일부턴 제약소로 당신도 차출이야. ……잎을 잘 다뤄야 해. 이국 놈들의 저항이 생각보다 강력해서 물량이 부족하다고 하더군. 아홉 부족장 중 여덟 놈을 잡아 들였는데도 아직도 남은 부족이 계속 싸우고 있다고 하잖아. 저기, 보이지? 마지막으로 잡혀온 여덟 번째 부족장이야.”

디트리히 폰은 남자의 말에 끄트머리에 서 있는 한 남자를 응시했다. 케이는 디트리히의 눈으로 그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한 남자를 떠올렸다.

‘……아루쉬.’

검은 머리카락, 검은 피부, 그리고 검은 눈. 오랜 항해에 지쳐서 늘어져 있는 다른 이들과 달리 눈빛에 살기를 품고 있는 그 남자에게는 반항기가 남아 있었다. 그는 아루쉬를 무척 닮았으나 아루쉬는 아니었다. 마치 형제나, 아들처럼 무척 닮은 다른 사람이었다.

“크큭…… 그 얘기 들었어? 저놈이 그랬대. ……잎을 훔쳐서 이런 실험을 하기 시작하면 갸흐통은 물론이고 곧 이 세계가 멸망할 거라고. 어머니 신의 저주를 받을 거라고. 퉷. 더러운 이교도 새끼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땅에 침을 뱉었다. 디트리히 폰은, 아니 케이는 그 말을 들으며 오랫동안 아루쉬를 닮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 * *

아루쉬의 치료는 저녁이 다 되었을 즈음에 끝이 났다. 케이는 프란시스와 아루쉬, 그리고 엘리자베스가 내려올 때까지 응접실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었다.

케이는 계단을 내려오는 아루쉬의 발소리를 듣고 신문을 내렸다. 아루쉬는 케이와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 보였지만 케이는 웃지 못했다.

그는 꿈속에서 보았던 아루쉬를 닮은 남자의 눈빛을 잊기가 어려웠다.

아루쉬가 케이의 어두운 얼굴을 보며 뭔가를 물으려고 할 때였다. 토비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계단 위에 서 있던 프란시스와 엘리자베스가 토비를 보았다.

“저, 마님. 누군가가 엘리자베스 양을 찾는데요? 왕립병원에서 왔대요.”

프란시스는 토비의 말에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토비에게 방문객을 들어오라고 하라고 말했다. 토비가 곧 다시 나가서 방문객을 데리고 들어왔다.

“브레드 선생!”

엘리자베스는 땀에 절어서 들어온 브레드를 보곤 놀란 눈으로 외쳤다. 브레드는 커다란 저택을 보더니 그 위용에 약간 기가 죽은 듯 제 모자를 구깃구깃하게 말아 쥐고 말했다.

“엘 선생님……!”

“엘 선생님?”

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는 얼굴을 붉히곤 얼른 브레드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에요?”

“그, 그게……. 조엘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요. 아시다시피 다니엘 경이 병사들 사이에 더 사망자가 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쓰라고 했는데 조엘이 갑자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몇 시간째 구토를 하고 이제는 정신착란 증세까지 있어요. 패혈증인가 해서 온갖 항생제를 먹였지만 전혀 듣지를 않아요…….”

브레드가 벌벌 떨면서 이야기 하는 사이에 메리가 물을 가져와 브레드에게 내밀었다. 브레드는 메리에게 손사래를 치며 물을 거절하고 엘리자베스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저 정말 염치가 없지만……. 저희들의 힘으로는 도무지 조엘을 치료할 수 없어요.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엘리자베스는 브레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재킷에 팔을 꿰고 있었다. 케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를 타고 가.”

엘리자베스는 브레드에게 물었다.

“말을 타고 왔어요?”

“네? 아, 아뇨. 옴니버스를 타고…….”

“그럼 탈 줄 알아요?”

“네? 어……. 아뇨.”

“토비! 너 말 탈 줄 아니?”

“당연하죠, 아가씨.”

“그럼 넌 나랑 같이 말을 타고 가자. 다이애나 왕립병원까지 갈 수 있을까?”

“중간에 말에게 물을 먹일 수만 있으면 충분해요.”

“좋아. 가능한 빨리 가야 해.”

엘리자베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토비는 밖으로 나가 말을 골랐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팔을 잡았다.

“말을 타는 건 위험해.”

“말이 마차보다 빨라. 당장 가지 않으면…….”

엘리자베스가 말꼬리를 흐리자 브레드가 불안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가지 않으면……?”

“……혹시 몰라요.”

“뭘 모른다는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한참 망설이다가, 토비가 말 한 마리와 함께 정원 중앙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브레드에게 말했다.

“브레드 선생. 의사는 언제나 환자가 거짓말하는 상황에도 대비해야 해요.”

“조엘이 무슨 거짓말을 했다는 거예요?”

“조엘이 염소 고기를 먹지도 않고 만지지도 않았다면 왜 마녀의 저주를 두려워했겠어요!”

엘리자베스는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그 말에 브레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건 물론 가설일 뿐이다. 하지만 조엘이 마녀의 저주를 두려워했다는 점. 그리고 조엘이 소화기 탄저 얘기에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점. 마지막으로 지금 브레드가 말하는 끝없는 구토, 정신착란 등의 증세가 소화기 탄저에 들어맞는다는 점.

이 모든 것을 꿰뚫는 가설은 단 하나.

조엘이 염소 고기를 먹었지만 먹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엘리자베스는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달려야 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뺨에 입을 맞추고 서둘러 정원으로 뛰쳐나갔다. 엘리자베스는 따라 나오는 케이에게 말했다.

“브레드 선생에게 마차를 내줘. 부탁해.”

“이걸 덮어. 말을 타면 추워.”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 모포 같은 망토 하나를 둘러주었다. 엘리자베스는 포근한 모포의 냄새를 맡고 부드럽게 웃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이마에 입을 맞추곤 토비에게 당부했다.

“뒤에 레이디가 타고 있다는 걸 잊지 말고 달려라, 토비. 철없이 장애물 넘기 같은 걸 하면 안 돼. 알겠냐?”

“알겠어요, 도련님.”

토비가 대답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내준 케이의 다리를 밟고 말 위에 올라탔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와 함께 말을 타고 가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케이 같은 거구가 함께 타면 속도가 느려졌다. 엘리자베스는 토비가 말을 몰기 시작하자 케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곧 허벅지와 엉덩이를 마구 밀어내는 말의 움직임에 재빨리 토비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토비가 외쳤다.

“꽉 잡으세요, 아가씨!”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