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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62화 (262/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62화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손에서 마차 문이 바스러지는 소리를 분명히 듣고 케이를 보았다. 하지만 케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루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루쉬는 케이가 내민 손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루쉬가 케이의 등 뒤에서 덜컹거리는 마차 문을 보며 말했다.

“저 끝이 좀 우그러진 것 같은…….”

“먼저 타시죠.”

케이는 아루쉬에게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아루쉬는 그것을 보곤 고개를 갸웃해보였다.

“하지만 레이디가 먼저…….”

“그냥…… 그냥 타요, 먼저.”

케이가 다시 마차 문을 잡았다. 그 바람에 우직 하는 소리가 나며 마차 문이 다시 한번 우그러졌다. 아루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엘리자베스는 얼른 아루쉬의 등을 떠밀었다.

“먼저 타세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아루쉬는 별 수 없다는 듯이 케이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아루쉬의 뒤를 따라 마차에 오르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이 케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케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부드럽게 웃으며 엘리자베스를 마차 위에 올려놓았다.

* * *

저택에 도착해서 아루쉬가 말린 약초를 프란시스의 피부에 올려놓고 불을 붙이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엘리자베스와 프란시스는 아루쉬의 치료법에 처음엔 아연실색을 했지만 생각보다 피부에 주는 자극이 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받아들였다.

엘리자베스는 아루쉬가 말한 대로 따뜻한 수건을 가지러 1층으로 잠시 내려왔다. 그러자 거기엔 케이가 신문을 보며 삐딱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퉁명스럽게 물었다.

“공장엔 안 가봐?”

“안 가.”

케이는 메리나 콜린, 토비가 보기엔 무척이나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을 것이다. 그는 소파 위에 다리를 얹고 신문을 보는 데에 집중한 것 같았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볼 때 케이는 지금 무척이나 초조해 보였다.

지금 케이는 신문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 증거로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기가 무섭게 신문을 다음 페이지로 넘겼지만 엘리자베스가 뜨거운 수건을 메리에게 부탁하는 동안에는 페이지가 조금도 넘어가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벽에 기대어 서서 그런 케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케이가 신문을 접어서 내려놓으며 눈을 또르르 굴렸다.

“뭐야? 왜 날 감시해?”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엘리자베스는 팔짱을 끼고 케이를 삐뚜름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날 하도 감시하길래, 나도 널 감시해보는 거야. 이런 게 무슨 재미가 있는지 궁금해서 말이야.”

케이는 그 말에 신문을 옆으로 치우고 소파에 제대로 앉았다.

“난 감시한 적 없어. 폭력이나 감시 뭐 그런 거랑 난 거리가 멀어.”

케이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의 모습을 얄미운 듯 노려보다가 메리에게 아직 건네지 않은 수건 한 장을 가지고 주방에 들어가 차가운 물을 적셔 왔다. 엘리자베스는 그 차가운 수건을 들고 케이에게 성큼성큼 걸어가 그 수건을 케이의 이마에 툭 얹었다. 케이가 엘리자베스가 얹은 수건을 손으로 떼어냈다.

“뭐 하는 짓이야?”

“넌 이마에서 열을 좀 빼야 될 것 같아. 꼭 필요한 조치야. 그러고 있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피식 웃었다. 엘리자베스가 허리에 손을 얹고 그를 노려보는 것이 퍽 귀엽게 보였던 탓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주방에서 메리가 곧 뜨거운 수건 한 장을 들고 나오자 메리에게 말했다.

“수건 한 장만 더 데워서 위층으로 올려 보내줘. 한 장은 저쪽 환자한테 써버렸어.”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가리켰다. 케이는 어느새 엘리자베스가 준 수건을 이마에 얹고 눈을 감고 있었다. 메리는 쿡쿡 웃으며 알겠다고 말하곤 주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엘리자베스는 수건을 눈꺼풀 위까지 덮은 케이를 바라보다가 수건을 살짝 들췄다.

너무 심했나? 엘리자베스가 수건을 치워줄 셈으로 수건을 쥐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그냥 둬.”

“왜?”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말이 맞아. 나는 열을 좀 빼야 할 것 같아.”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수건 아래로 눈을 반만 뜨고 엘리자베스를 느슨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케이의 그런 표정이 묘하게 색정적으로 느껴져서 엘리자베스는 몸을 움츠렸다.

케이는 아무 말도 없이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제 입술로 끌어당겨 손등에 입을 맞췄다.

“왕립병원에서 사진이 잔뜩 찍혔더군.”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발로 옆에 있는 응접용 테이블을 툭툭 쳤다. 워낙 몸이 크고 다리가 길어서 한 번 다리를 꼬면 발이 테이블에 자연스럽게 닿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자신의 사진들을 바라보았다. 왕립병원에서 탄저병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사진이었다.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언제 이런 사진이……? 오늘 아침인가? 그런데 이 사진이 벌써 어떻게 신문에 났어?”

엘리자베스가 당혹스러운 눈으로 사진들을 바라보다가 그것을 집어 올렸다. 그러나 사진들은 신문에 난 사진이 아니라 인화된 사진인 듯 빳빳했다.

‘……?’

엘리자베스는 의아한 기분으로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수건 아래에 제 눈과 이마를 또 쏙 가리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아직 안 났어. 신문에.”

“그럼 이 사진들은 어떻게 구했어?”

엘리자베스가 심각한 얼굴로 사진을 넘겨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오전에 보았던 타블로이드지들을 떠올렸다. 과장되거나 사실 중 일부만 보여주어 왜곡된 정보를 전달하고 판매부수만 올리려는 신문들. 자신의 사진이 그 신문들 중 하나에 이용당할 생각을 하니 벌써 화가 났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사진을 넘기며 내는 펄럭거리는 소리를 한참 듣고 있다가 이마에 놓여 있던 수건을 옆으로 휙 치워버렸다.

“내가 샀어. 신문기자들한테. 엘리자베스 클레몬트와 관련된 기사를 취재하러 갔다 왔는데 사진이 있다, 그러면 그 사진이 무엇이든 나한테 먼저 와라. 내 맘에 들면 신문사보다 후한 값을 쳐서 팔아주겠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에 들려 있던 사진들을 빼앗아 들고는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테이블 위에 내던지며 말했다.

“리오든 타임즈.”

펄럭—

엘리자베스가 환자의 몸을 닦는 사진이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레본 헤럴드.”

펄럭—

엘리자베스의 땀을 간호사가 닦아주는 사진이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모던 데이즈.”

펄럭—

엘리자베스의 사진.

사진.

사진들이 케이의 손에서 떨어졌다.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구겼다.

“네가 이 사진들을 그 신문사들에게 고용된 사진사들에게서 샀단 말이야?”

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짭짤하게 챙겨갔으니 만족할 걸.”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네가 지금 한 게 뭔지 알아? 일종의 사적 검열이야!”

엘리자베스의 외침에 케이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더니 엘리자베스의 팔을 잡아 당겼다.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노려보면서도 케이에게 끌려갔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눈에 담긴 분노인지 애정인지 모를 감정이 맘에 들어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냥 난 네 사진이 갖고 싶었을 뿐이야. 몇 장 있으면 내 방에 장식해 놓기 좋을 거 같더군.”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의 품 안을 파고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제 품을 파고드는 케이의 눈빛에 어린 이채를 보았다.

‘개새끼…….’

엘리자베스는 다니엘 빌리스가 한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제대로 깨달았다.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허리를 감싸오는 케이의 손길을 느꼈다.

“미친놈…….”

엘리자베스가 말하자 케이가 또 한 번 웃었다.

“그걸 이제 알았으니 어떡해…….”

“무슨 헛소리야. 이미 알고 있었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갈색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그때 메리의 헛기침 소리가 응접실에 울려 퍼졌다. 엘리자베스가 벌떡 일어났다. 케이는 짜증스럽게 메리를 노려보았다. 메리가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엘리자베스에게 데운 수건을 내밀었다.

“제가 올라가서 대신 드릴까요?”

“아니! 내가 가야 돼!”

엘리자베스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외쳤다. 메리는 ‘그러시든지’ 하는 표정으로 층계를 가리켰다. 엘리자베스가 후다닥 수건을 들고 올라가자 메리는 케이를 보며 씨익 웃었다. 케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다음 계절에 고용 계약 안 해줄 거야.”

“그럼 저 없이 어디 한 번 이 저택의 안살림을 해보시든지요!”

메리는 케이의 으름장에도 조금도 기죽지 않고 소리쳤다. 케이는 그런 메리를 가만히 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호기롭게 외쳤던 메리는 막상 거구의 케이가 가까이 걸어오자 조금 위축된 얼굴로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메리를 내려다보며 헛기침을 했다.

가까이 온 케이의 귓가가 묘하게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메리는 의아한 얼굴로 케이를 경계했다.

“이봐.”

“네, 도련님?”

“다음 계절까지 고용 반드시 해줄 테니까 프란시스랑 엘리자베스를 지금처럼 잘 돌봐줘. 이건…… 이건 가족들이랑 옷이라도 해 입든지.”

케이는 품 안에서 수표를 꺼내어 메리에게 내밀었다. 메리는 케이에게 수표를 받고는 놀란 눈으로 케이를 바라보며 그대로 굳었다. 케이는 그런 메리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왜 그래? 내가 용돈을 찔러 준 게 그렇게 희귀한 일도 아니잖아?”

케이의 퉁명스러운 말에 메리가 케이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별안간에 얻어맞은 케이는 황당하다는 듯한 눈으로 메리를 보았다. 메리가 빨개진 눈으로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친절하게 말씀하신 건 이게 처음이라고요! 프란시스 부인께서 도련님이 요새 잠을 통 못 주무시고…… 어디 아프신 것 같다더니! 정말이에요?!”

메리는 그렇게 물으며 울먹거렸다. 케이는 메리가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당황한 얼굴로 턱을 악 물었다.

메리가 허리춤에 묶은 에이프런에 얼굴을 묻고 이내 아예 울기 시작했다. 케이는 그런 메리의 어깨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하지만 금세 손을 거둬들였다. 그러고는 우는 메리를 힐끔거리며 이제는 안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니지 않는 담배를 찾았다.

아무리 뒤져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케이는 메리의 어깨를 향해 다시 손을 뻗었다.

“……헛소리. 아픈 곳 같은 건 없어.”

떨리는 목소리로 거짓말을 했다.

“그러면 왜 이런 걸 주세요……. 왜…….”

“……그럼 도로 내놓든지…….”

“싫어요! 싫다구요!”

“참 나. 이봐, 그만 울어.”

자꾸만 우는 메리를 보며 케이는 애써 웃었다. 하지만 메리의 어깨를 토닥이며 어느새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해갔다.

그 여자도 내가 죽으면 이렇게 울까? 나 같은 개자식 때문에…….

케이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네가 울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를 울리는 게 나는 아니었으면 좋겠어.

나는 이미 너한테 차고 넘치는 개자식이잖아.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그는 속으로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부르며 어젯밤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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