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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59화 (259/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59화

엘리자베스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났다. 케이는 아직 침대 속에 있었다.

잠든 케이가 가끔 눈을 찌푸리거나 얼굴을 찡그릴 때마다 엘리자베스의 가슴은 덜컹 내려앉았다.

나쁜 꿈을 꾸고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코와 입술에 입을 맞추며 마음속으로 케이의 꿈이 평안하길 빌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케이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콧잔등 위로 쏟아지는 아주 희미한 아침 햇살 따위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뻐근하긴 했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대충 옷을 쑤셔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가능한 집안의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려고 엘리자베스의 발뒤꿈치는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2층에 다다랐을 때 프란시스가 막 방에서 나오다가 엘리자베스를 마주쳤다.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놀라서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프란시스에게 어색하게 목 인사를 했다.

“일어나셨어요?”

“그래, 일어났다. 케이는?”

“케, 케이를 왜 저한테…….”

엘리자베스가 당혹스럽게 묻자 프란시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왜냐니? 케이랑 같은 방에 있다가 나온 거 아니니?”

“어…… 그건……!”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말에 반박하려다가 이미 걸린 게 분명하다는 걸 깨닫고는 희미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프란시스는 복도에 있는 협탁에 놓인 위스키 잔에 물을 가득 따라서 마시곤 관자놀이를 손으로 마사지하면서 말했다.

“수도의 귀족들은 미혼 남녀 간의 일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다만…… 그건 전부 허세일 뿐이야. 그렇게 떠들어대는 수도의 귀족들 중 정말 정숙한 10대를 보낸 이가 얼마나 되겠니.”

“저흰 20대인데요.”

“어쨌든.”

프란시스는 손사래를 쳤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프란시스에게로 쭈뼛거리며 다가가 말했다.

“저번에는 약혼하지 않은 남녀가 한 집에서 지내는 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프란시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프란시스는 엘리자베스를 힐끔 보며 대답했다.

“그거야 너희가 약혼했으면 하니까 하는 말이었지. 두 사람이 서로 맺어졌으면 하니까.”

엘리자베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프란시스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지금 약혼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케이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 앞뒤가 꽉 막힌 녀석의 청혼을 받아내려면 일단 치료제부터 개발해야 했다.

프란시스가 말했다.

“……케이는 어디가 아픈 거냐?”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에게 어떻게 대답할지 골똘히 생각하다가 그냥 진실을 말하기로 했다.

“네.”

“어디가? 얼마나? 나을 가능성은 없고?”

“어디라고 말씀드리긴 어려워요. 치료를 받아봐야 알겠죠.”

“치료? 네가 할 수 있는 거야? 넌 유명한 의사잖니. 신문에서도 매일 네 얘기야. 어제 저녁 신문에는 네가 왕립병원에 가서 병사들을 치료했다고 대문짝만하게 기사가 났어.”

프란시스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며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손에서 느껴지는 간절함 때문에 마음이 안 좋았다.

과거 남부에서 엘 선생과 함께 빈민들을 치료하며 돌아다닐 때마다 가끔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곤 했다. 자신의 친구나 아이, 또는 부모가 아파서 데리고 온 보호자들이 엘리자베스나 엘 선생님의 손을 꼭 잡고 치료할 수 있는지 묻는 상황 말이다.

그 중 반 정도는 치료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지만 그 중 반 정도는 거짓말도, 진실도 얘기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 반의 반 정도는 끝내 치료 중 목숨을 잃었다.

엘리자베스는 지금 그 상황 속에서 환자의 보호자임과 동시에 의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환자가 낫길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며 스스로의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막상 의사인 엘리자베스는 스스로에게 거짓말도, 진실도 얘기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프란시스에게 케이가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을 줄 수도 없었고 케이가 죽을 거라는 절망만 안겨주기도 싫었다.

엘리자베스가 곤란한 얼굴로 프란시스를 보고 있을 때였다. 위층에서 케이가 내려오며 프란시스에게 말했다.

“그런 걸 엘리자베스에게 물어서 뭐하시게요. 어차피 묻는다고 한들, 안다고 한들, 변하는 건 없어요. 그리고 제 명줄은 엘리자베스도, 저도 모르는 일이구요.”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다른 위스키 잔을 집어 위스키를 쪼르륵 따라서 한 모금 마셨다. 프란시스는 그걸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잔을 빼앗아 들었다.

“뭐하는 짓이야? 아프다면서 술이라니.”

“그런 아픈 게…….”

“목이 마르면 기다려라. 내가 아래에서 빵이랑 스프랑 커피를 내올 테니까 말이야.”

프란시스는 케이의 말 따윈 단호하게 끊더니 위스키 잔은 물론이고 위스키 병까지 빼앗아 들고 1층으로 내려갔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프란시스의 등을 보며 소리쳤다.

“저 지금 왕립병원으로 가봐야 하는데……!”

케이가 물었다.

“이 아침부터?”

“오후에는 학술원에서 수업이 있으니까.”

엘리자베스의 대답에 케이가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보통은 오후에 수업이 있으면 오전에는 집에서 쉬지.”

“폐하가 일주일의 시간을 주셨어. 어쨌든 힘이 닿는 데까지는 그분의 뜻을 이룰 수 있게 해드려야 해. 그게 우리가 살 길이고……. 것보다—”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가 내려간 1층 계단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프란시스한테 그런 얘기해도 되는 거야? 프란시스가 많이 속상해하는 것 같은데…….”

엘리자베스가 말을 흐리자 케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배를 탄다고 말하는 것보단 이게 나을 것 같았어. 프란시스는 물론이고, 너한테도.”

“나?”

엘리자베스는 ‘너한테도’라는 케이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의아한 얼굴을 하자 케이는 조금은 피곤한 듯 벽에 몸을 기대고 대답했다.

“그래, 너. 프란시스도, 너도, 내가 없으면 속상해는 할 거잖아. 그러면 너도 프란시스도 속상해할 서로를 걱정할 거고. 그러면 둘 다 서로가 걱정되어서라도 잘 살겠지. 죄책감이나 부채감 같은 걸로 인생을 삐뚤게 살지 않고.”

“케이 하커!”

케이의 대답에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원망스럽게 노려봤다.

케이 하커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조금이나마 정을 주려고 하면 금세 마음을 닫아버렸다.

자신이 죽은 뒤에 두 여자가 서로를 걱정하면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니. 케이의 머릿속에 그런 사악한 계산속이 있는 줄은 몰랐었다. 나한테는 자기를 버리지 말라고 해놓고는, 엘리자베스는 물론이고, 프란시스까지 버리고 갈 셈이었다니.

가슴 속에 까만 재가 앉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재는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온 사방을 더럽힐 것이고, 엘리자베스가 숨만 잘못 쉬어도 그녀의 코며 입, 폐 안으로 파고들어올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녀를 꽁꽁 묶어두는 질식할 것 같은 재투성이 우울감 속에 갇힌 것 같았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읽고 그녀의 팔을 잡아 당겼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

“대답해.”

엘리자베스는 불퉁하게 말했다.

“왜.”

“내가 어제 금발 인형 얘기 해줬지?”

엘리자베스는 금발 인형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 주방에서의 일이 떠올라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금발 인형이 무엇인지 슬그머니 궁금해지기도 했다. 앰버가 커피하우스에서 엘리자베스에게 얘기해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가지고 싶어 했던 그 인형을 닮았어요.’

“그래. 해줬어. 앰버도 그 얘기한 적 있어. 네가 꼭 사고 싶어 했다는 그 인형.”

케이는 피식 웃었다.

“사고 싶었지…… 그런데 쥐뿔 돈이 있어야지. 그래서 훔쳤어.”

“그 어린 나이에?”

“그래. 그 어린 나이에 돈이 어딨어서 그런 걸 사. 아버지한테 얘기했다간 사내놈이 인형 같은 걸 탐낸다고 죽도록 맞거나 마구간에서 밤새 말똥이나 치워야 할 텐데.”

엘리자베스는 갖고 싶은 것을 갖지 못하는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쉐필드의 작은 소녀도 아버지 서재에 쌓여 있는 수많은 책들에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고 늘 창문 너머로 그 서재를 건너다보며 자수를 두거나 차를 우리는 법을 배워야 했으니까.

“그래서 훔쳤는데, 그걸 어디다가 둘 데가 없는 거야. 마구간 외에는. 그래서 그걸 그냥 버렸어. 내 손으로.”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왜 버려! 어렵게 훔친 걸!”

케이는 쿡쿡 웃으며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훔치지 말라고 해야지, 레이디.”

“……그건…….”

엘리자베스가 머쓱하게 관자놀이를 긁적이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너를 닮은 인형이었지. 머리는 금발에, 피부는 하얗고, 눈동자는 푸른…… 난 그런 인형처럼 생긴 여자애를 내 인생에 본 적이 없었어. 그런 여자애를 볼 일이 어디에 있겠어. 이런 왕족 여자애를…… 감히…….”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 온 피부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전율을 바라보며 제 안의 욕망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케이는 서둘러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놓아주었다. 엘리자베스가 아쉬운 얼굴로 케이를 보았지만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보지 않으려는 듯 벽에 기대어 서서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말했다.

“감히 그런 걸 말똥 냄새가 나는 곳에 가져다 놓을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대답이 없자 고개를 들어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러자 켄터베리 홀에서 손에 말똥을 묻히고 마부의 옷을 입은 채 자신을 지금처럼 쳐다보던 엘리자베스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감히 이 아름다운 인형에게서 말똥냄새를 풍길 순 없잖아.

지금의 케이는 그렇게 생각했던 어린 시절을 우습게 여겼다.

엘리자베스의 손에는 말똥이 묻어도, 아니 더한 것이 묻어도 결코 그녀를 더럽힐 수 없었다. 감히…… 감히 그럴 수는 없었다.

케이가 그렇게 생각하며 말했다.

“네가 네 인생에서 좋아해도 된다고 허락받은 건 나뿐이라고 했지? 나도 그래. 내 인생에서 좋아해도 된다고 허락받은 건 너뿐이야.”

케이의 얼굴이 떠오르는 아침 햇빛 때문인지 아니면 무엇 때문인지 빨갛게 물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숨을 멈췄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알았다.

엘리자베스가 마차에서 내리던 그 순간, 리오든의 그 어떤 풍경보다 케이 하커가 엘리자베스를 압도해버렸던 그 순간—

아, 이 녀석이 내 인생을 뒤흔들 바로 그 녀석이구나, 느껴졌던 그 순간—

엘리자베스 역시 케이 하커의 인생을 뒤흔들어버렸다는 것을.

엘리자베스가 여태까지 케이 하커가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켰다고 믿었던 그 모든 순간에 엘리자베스 역시 케이의 인생을 변화시켰을 거라는 것을.

엘리자베스는 그 깨달음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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