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57화
프란시스는 벌컥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보비들에게 소리쳤다.
“하루 종일 집 앞에서 이게 뭐 하는 짓들이야?”
프란시스가 분노하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엘리자베스는 놀라서 케이의 팔을 잡았다. 프란시스의 외침에 보비들이 말했다.
“부인. 아시다시피 이 거리에서 살인사건이 있었습니다. 저희는 부인과 아가씨의 안전을 지키려는 거구요.”
보비들의 말에 프란시스가 사나운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며 말했다.
“흥. 우리를 지키려는 건지, 감시하려는 건지, 알게 뭐냐. 어?!”
프란시스는 그렇게 말하며 현관문 옆에 있던 부지깽이를 들어 휘휘 흔들기 시작했다. 그걸 본 케이가 얼굴을 잔뜩 구기며 프란시스에게 걸어갔다. 그러다 케이의 정강이가 부지깽이에 한 번 부딪히기까지 했다. 하지만 케이는 얼굴을 살짝 찡그릴 뿐 가볍게 프란시스의 부지깽이를 뺏어들고는 프란시스에게 말했다.
“저들은 우리를 지키려고 온 게 맞아요. 그러니 그만 들어가시죠.”
“정말 우리를 지키러 온 게 맞는다면…….”
“프란시스!”
케이는 다시 부지깽이를 빼앗으려는 프란시스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케이의 말에 프란시스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졌다.
프란시스는 케이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불안한 얼굴을 해 보였다. 케이는 그런 프란시스의 어깨를 감싸 쥐고 안으로 들어갔다. 보비들에게는 미안하게 되었다고 간단한 인사치레를 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를 따라 들어갔다. 케이는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응접실 소파에 프란시스를 앉혔다.
프란시스는 소파에 앉아서는 불안한 얼굴로 케이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래? 뭔데? 조지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또?”
“또?”
엘리자베스가 얼굴을 구겼다. 그러자 케이가 나지막이 프란시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말했다.
“……저 배 같은 거 안 타요.”
케이의 말에 프란시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조지 국왕이 뭔가 명한 것도 없고……. 그러니 죽지 않는 한 엘리자베스를 떠날 일도 없어요.”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벽을 짚었다. 죽지 않는 한, 이라는 말이 엘리자베스의 가슴을 헤집어놓았다.
죽지 않는 한 케이가 나를 떠날 일은 없다.
그 말은 거꾸로 뒤집으면 죽는다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속절없이 다가오는 전쟁과 5개월이라는 기한에 숨이 막혀올 지경이었다.
프란시스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읽은 듯 케이를 재촉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죽을 수도 있다는 거니? 응?”
케이는 프란시스의 재촉을 가만히 듣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프란시스의 손을 잡았다.
“제가 부탁했던 것 기억하세요?”
“……뭐?”
“제가 멜니아로 떠나기 전에 부탁했던 거 말이에요.”
“……무슨…….”
“어머니.”
케이가 프란시스 앞에 두 무릎을 전부 꿇고 프란시스를 간절하게 올려다보았다. 프란시스는 케이의 그 행동을 보는 순간 눈이 새빨개졌고 벌벌 떨리는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케이가 말했다.
“……엘리자베스를 부탁해요. 당신 말대로 엘리자베스는 좋은 사람이고, 나보다는 확실히 살 가치가 있는 사람이죠.”
“케이 하커.”
프란시스가 잇새 사이로 흘러나오는 비명 같은 목소리로 케이를 불렀다. 그러나 케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프란시스에게 말했다.
“그러니 내가 만약에…… 만약에…… 없어지면……. 그냥 갑자기 없어지거나 아니면…… 죽었다고 하거나 그러면 내 생사에 대해서 궁금해하지도 말고 그냥 지체 없이 엘리자베스와 함께 안전한 곳으로 가세요. 그곳은 조지가 이긴다면 로킨트일 수도 있고 진다면 멜니아일 수도 있겠죠.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요. 그냥 살아남을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케이가 프란시스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프란시스가 와락 케이의 목을 껴안았다. 엘리자베스는 그 모습을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 다 살아남아요. 두 여자를 감히 그 누구도 마녀라고 부르지 못할 돈을 내가 당신들에게 줄 테니까.”
“왜 그러는데……? 응? 무슨 일인데……. 말을 해봐! 말을 좀…….”
프란시스가 케이의 어깨를 쾅쾅 때렸지만 케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프란시스의 작은 몸을 꽉 안고 이렇게 말했다.
“궁금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고. 어? 둘 다 살겠다고 약속을 하란 말이야.”
프란시스는 몇 번이나 케이의 등과 어깨를 때리다가 케이의 품 안에서 축 늘어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약속하마. 내가 반드시 엘리자베스를 구할 거야. 반드시. 이 레본 땅이 불바다가 된다고 해도 말이야.”
* * *
프란시스가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고 나자 케이는 프란시스를 가뿐히 들어 올려 자신의 침실로 옮겼다. 뒤를 따라 간 엘리자베스는 잠에 빠진 프란시스의 이마를 살짝 짚어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수업 때 아루쉬를 만나면 에테르를 보충하는 법에 대해서 더 배워서 약을 써야겠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는 프란시스가 깨지 않도록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침실을 나와서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배고프지 않아?”
엘리자베스는 아까부터 제 배가 주기적으로 소리를 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케이가 눈치챘다는 걸 알고 얼굴을 붉혔다.
엘리자베스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자 케이는 피식 웃고는 아래층으로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내려왔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와 함께 식사실 아래에 있는 주방에 도착하자마자 조리대 위에 놓여 있는 파이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런 것도 먹어?”
“이게 뭔데?”
“키드니 파이.”
키드니?
엘리자베스는 생소한 이름에 눈을 가늘게 뜨고 답했다.
“뭔지 모르겠는데.”
“안 먹어봤다는 뜻이군. 그럼 그냥 있어. 좀 뒤져보면 스프를 끓일 만한 게 좀 있을 거야. 밥도 안 먹고 하루 종일 책이나 보고…… 잘 하는 짓이군.”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왠지 심통이 나서 파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왜 미트 파이가 있는데 그런 걸 먹어? 그냥 이거 먹자. 맛있어 보이는데? 뭐가 들어간 건데?”
“알면 못 먹을걸.”
“먹을 거야.”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곤 얼른 옆에 있는 나이프와 포크를 들어 파이를 한 조각 큼지막하게 잘랐다. 조금 식기는 했어도 파이에서 기름이 흘러나오는 게 맛이 좋아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자른 조각을 크게 입에 넣었다.
고기 냄새가 진하게 나는 게 원래 엘리자베스의 취향일 법한 음식은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배가 고플 때는 이런 느끼함조차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왜? 괜찮은데?”
“……괜찮다고?”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가 흘린 고기 한 조각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토비랑 메리가 먹으려고 구운 모양이야. 토비가 좋아하는 심장이랑, 메리가 좋아하는 뇌가 그대로 있는 걸 보니까.”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눈썹을 찌푸렸다.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파이를 한 조각 더 자르려던 엘리자베스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엘리자베스가 눈을 끔뻑거리며 케이를 보았다.
“바, 방금 뭐라고……?”
“키드니 파이. 정말 안 먹어봤어?”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의 손에서 포크를 빼앗아서 파이 안에 있는 작은 조각들 몇 개를 끄집어내 보여주었다.
“이건 심장. 이건 소장.”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제 입을 가렸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하얘지는 것을 본 케이의 얼굴도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내가 ‘키드니’ 파이라고 했잖아. 여기 ‘콩팥’처럼 보이는 것도 있네.”
“그 키드니가 그 키드니인지 몰랐어!”
엘리자베스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입을 틀어막고 치밀고 올라오는 토기를 주체하지 못하며 주방을 뛰어다녔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케이는 제 손바닥을 가리키며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그냥 여기에 뱉어.”
“우우우우 우우우우!”
엘리자베스는 절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 엘리자베스의 속에서 치밀어오르는 것은 정상적인 상태의 파이가 아닐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울상이 되어서는 케이의 어깨를 마구 두들겨 팼다.
‘이 나쁜 자식!’
왜 심장이랑 뇌 얘기는 해가지고!
눈물이 고일 정도로 구역질이 치밀어오르자 엘리자베스는 별 수 없이 파이가 담겨 있던 그릇을 붙잡고 먹었던 만큼의 파이를 뱉어냈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등을 두들겨주며 피식 웃고야 말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웃음소리를 듣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웃지 마!”
“안 웃었어.”
“다 들었어!”
“귀도 밝네.”
“뭐?”
“이리 줘. 내가 치우고 올게.”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들고 있는 그릇을 가리키며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비밀 선물처럼 품 안에 고이 감싸 쥐고 얼른 밖으로 뛰쳐나갔다. 케이는 결국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엘리자베스가 다시 주방으로 돌아왔을 때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 줄 스프를 끓이고 있었다. 능숙하게 야채를 썰어 넣고 토마토소스를 집어넣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원망스럽게 보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시선을 받으며 또 웃다가 몇 대 얻어맞고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소의 심장을 넣은 키드니 파이 좋아해! 없어서 못 먹는다고. 가끔 일 끝나고 맥주랑 같이 키드니 파이 먹으면 피시 앤 칩스보다 훨씬 나아!”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는 입 주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난 저런 게 있는 줄도 몰랐어…… 남부에서는 키드니 파이 같은 건 안 먹었는데…….”
“남부엔 소가 흔하니까 그렇지. 내장 같은 건 잘 안 먹잖아, 거긴. 도시는 뭐든지 비싸다고.”
엘리자베스는 시무룩한 얼굴로 케이를 보았다.
“네가 하도 난 못 먹을 것처럼 말하니까 오기 때문에 먹었잖아.”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다가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고 주물럭거리며 손등에 입을 맞췄다.
“왜 그런 오기를 부려?”
“무시당하고 싶지 않아서.”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내가 널…… 무시했나?”
엘리자베스가 한숨을 쉬었다.
“무시라고 느꼈지. 전부 내 열등감 때문이겠지만.”
엘리자베스의 눈동자에 일종의 체념 같은 감정이 서리자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다가 얼굴을 찌푸렸다.
“……난 언제나 네가 날 무시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널?”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이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는 화로 앞에서도 여전히 짝다리를 짚은 채로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며 삐뚜름하게 웃었다.
“그래. 첫날부터 말이야. 내 말을 못 알아들었잖아. 내가 너무 빠르고 천박한 말씨를 쓴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지. 뭐라고? 다시 말해줄래?”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흉내를 내듯이 우아하게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황당한 얼굴로 케이의 어깨를 때렸다.
“그건…….”
“그건?”
“그건 내가 너무 당황해서 그런 거지!”
“뭐가 당황스러웠는데?”
엘리자베스는 불꽃 때문에 한쪽 얼굴만 환하게 빛나는 케이의 얼굴을 보았다.
갈색 머리카락에 까무잡잡한 피부, 갈색 눈동자, 그리고 삐뚜름한 콧대와 들개처럼 사나운 눈빛.
너는 모를 거야. 네가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너의 모든 특징이 나에겐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