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56화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눈썹이 잔뜩 비틀렸다.
“다른 남자랑 내가 언제 잤어?”
“바실리 스트리트에서?”
케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며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케이는 준비되어 있던 마차의 문을 열고 엘리자베스를 번쩍 들다시피 해서 마차 위에 올렸다. 오랜 공부 때문에 지쳐 있었던 엘리자베스는 단숨에 마차에 타졌다.
“……나 윌리엄 조쉬랑 자지 않았어.”
“그래. 말했어.”
“오늘도 엘 선생님이랑 정말 연구에 바빴어.”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는 도서관 안에서 엘우드 밀과 함께 연구에 매진하던 엘리자베스를 떠올렸다. 그런 모진 말로 자신을 내쫓아놓고 엘리자베스는 잘도 책에 파묻혀 있었다. 케이가 복도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도 늘 말씀하셨어. 내가 걱정된다고. 내가 인생을 망칠까 봐 걱정된다고. 그런 말로 날 가둬두셨지. 너도 다를 바 없어.’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을 듣는 순간 지옥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엘리자베스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기억을 남겨두었던 남자—
어린 소녀가 지평선에 앉아 하염없이 변화의 아침을 기다리게 만들었던 남자—
엘리자베스에게 케이가 그런 남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케이에게는 그게 바로 지옥이었다.
케이는 복도 창문 너머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하얗고 조그마한 손가락은 자꾸만 내려오는 금발의 머리카락을 자꾸만 쓸어 올렸고 그때마다 책에 집중하고 있는 푸른 눈동자가 잘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때때로 고개를 들어 엘우드 밀에게 뭔가를 질문했다. 과학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았는데 두 사람이 서로를 대화를 할 때면 엘리자베스는 책에 집중하고 있을 때만큼이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내가 얼마나 그 눈동자를 사랑하는지, 너는 알까?
케이는 그 눈동자가 엘우드 밀의 눈동자와 마주칠 때마다 엘우드 밀의 초록색 눈동자를 짓이겨버리고 싶었다.
하얀 피부에 백금발의 머리카락,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엘우드 밀은 순혈 혼타니스였다. 케이는 꿈속에서 순혈 혼타니스를 아주 많이 보았다. 어린 디트리히 폰은 엘우드 밀과 함께 순혈 혼타니스들만 모여 있는 보육원에서 자란 것 같았다.
엘우드 밀은 그 혼타니스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천재였다. 그는 책을 한 권 읽으면 그 책의 내용을 사진이라도 찍은 것처럼 기억했다. 그 책의 내용만 기억하는 게 아니라 책의 배열, 책 속에 나왔던 이미지 자체까지 외워버리는 식이었다.
케이는 꿈속에서 디트리히 폰이었고, 디트리히 폰이 엘우드 밀을 사랑하고, 또 질투하는 감정을 그대로 느꼈다.
디트리히 폰 역시 과학자였다. 하지만 엘우드 밀 같은 천재는 아니었다. 디트리히 폰은 엘우드 밀이 먼저 국가 연구소로 차출되자 그와 함께 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 그를 뒤따랐다.
하지만 그곳에서 엘우드 밀은 디트리히 폰이 기억하고 있던 다정한 형이 아니었다. 엘우드 밀은 조국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냉혹한 과학자가 되어 있었고 디트리히 폰은 그런 엘우드 밀을 보면서 갈등하고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여전히 엘우드 밀을 사랑했다. 엘우드 밀은 분명 그 사실을 모를 테지만…….
케이는 알 수 있었다.
엘우드 밀이 MLK 같은 무시무시한 실험을 계획했을 때조차 디트리히 폰은 그를 설득할 생각을 했으니까. 디트리히 폰은 여전히 엘우드 밀을 자신이 사랑하는 형으로 기억하고 있을 뿐, 그의 행동을 판단할 의지는 조금도 없었으니까.
그게 사랑이 아니면 무엇인가.
케이는 디트리히 폰이 느끼는 동질감과 열등감, 그리고 사랑을 강렬하게 기억했다. 왜냐하면 디트리히 폰과 엘우드 밀이 백금발에 초록색 눈, 그리고 하얀 피부를 똑같이 닮았듯, 엘리자베스와 엘우드 밀도 서로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왕족의 피가 섞인 엘리자베스. 과학을 사랑하는 엘리자베스. 자신이 알 수 없는 말을 나누는 엘리자베스와…… 엘우드 밀.
케이는 강렬한 질투에 시달리며 창문 안을 바라보다가 회랑으로 나갔다. 엘리자베스가 바실리 스트리트에서 잠들었던 때를 떠올리며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네가 윌리엄 조쉬 따위와 잤건 자지 않았건 그건 상관없어. 엘 선생님과 무슨 사이인지도 상관없어.
나는 절대로 엘우드 밀처럼 네 말을 전부 이해하고 네가 원하는 걸 이뤄줄 수 없다는 게, 그게 나를 끔찍한 기분에 빠뜨릴 뿐이야.
케이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에 덜컹거리며 출발하는 마차 안에서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에 이마를 기대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서 케이를 보았다. 케이가 말했다.
“난…… 난 원래 무식해. 몸이 아니라 논리로 얘기하는 방식은 모르고…….”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에 기대었던 이마를 살짝 들어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흡사 엘리자베스의 발아래에 기는 어린 강아지 같아서 엘리자베스는 마음이 약해졌다.
“……난 그냥…… 네가 위험해지지 않았으면 한 거야……. 네가 하고 싶은 일을 막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그냥 눈이 돌아서 앞도 뒤도 보지 못한 거야……. 그냥 나는 그런 개자식이라서…….”
케이의 목소리가 떨려올 때마다 엘리자베스의 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케이의 붉은 입술을 보면서 엘리자베스는 어제 다니엘 빌리스가 한 말을 떠올렸다.
‘알고 있군요? 당신의 개새끼가 얼마나 충실한지.’
엘리자베스는 그 말의 진위를 지금에서야 확인한 기분이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 목줄이라도 매인 것처럼 쩔쩔 메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케이가 정말 자신 때문에 이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언제부터…….”
“뭐?”
“아니, 아니야.”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그저 케이와 엘리자베스와 이 리오든 전체의 미래가 걸린 조지 국왕의 승리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져 화를 버럭 낸 것뿐이었는데,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이런 극악무도한 미래를 만들어낸 것이 전부 엘리자베스였는데도.
생각해보면 그랬다.
레트니가 도망친 것도 의회 청사에서의 테러 사건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엘리자베스가 기억하고 있는 1년 6개월의 미래에서 케이는 몰록이 될 위기에 처한 채 시한부 삶을 살지도 않았고 전쟁이나 테러를 겪으며 불안한 삶을 살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하커 공장에서 주식을 나눠주고 차근차근 진보적인 미래를 위해 앰버와 함께 싸워나가고 있었다.
아니.
정말 그랬나?
앰버는 엘리자베스에게 그 머리핀이 처음부터 엘리자베스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켈토로 가는 배편도. 결국 모든 게 엘리자베스 때문이라고. 엘리자베스가 아니었다면 케이가 참정권 운동에 뛰어들 일도 없었을 것이라고.
앰버는 말했다.
아니, 어쩌면 케이도 말했는지 몰랐다.
‘켈토로 가자.’
믿지 않았던 것은 엘리자베스뿐일지도 몰랐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흔들리는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케이는 몸을 잔뜩 숙인 채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케이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흔치 않은 일에 약간의 쾌감을 느꼈다.
케이가 말했다.
“내가…… 내가 개자식인 건 고쳐나갈게……. 뭐든지 할게……. 나한테 얼마의 시간이 남아 있든 나는 전부 너를 위해서 쓰고 싶을 테니까. 그렇게 할 테니까…… 나 때문에 불행해? 대답해봐. 네가 그렇다고 하면…… 그러면…….”
케이는 조급하게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너는 나를 불행하게 하기도, 행복하게 하기도 하는 유일한 사람이야.
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
내가 매일 말해줘도 넌 몰라.
내가 네 말을 믿지 않았듯이, 너도 내 말을 믿지 않으니까.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케이의 턱을 끌어당겼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짓에 순순히 딸려 왔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러면 그냥 날 떠나게? 내가 다른 남자랑 행복하게, 이제는 기다리지도 않게?”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이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대답을 종용했다.
“너도 대답해봐. 응?”
케이는 차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대신 슬픈 눈으로 엘리자베스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엘리자베스의 푸른 눈동자를 보았다.
그러면서 케이는 어린 날 자신이 버리고 갔던 금발의 인형을 떠올렸다.
그는 그런 삶을 살아왔다.
가질 수 없는 것들에는 미련을 가지지 않았고 버려질 것 같으면 먼저 버렸다. 결코 사랑받을 수 없었으므로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버리고 온 금발 인형을 찾으러 돌아가 밤늦게까지 더러운 흙을 파헤쳤어도, 프란시스가 손목을 그은 날이면 프란시스를 업고 왕진 의사의 집까지 뛰어가느라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어도, 귀족의 말씨가 아니면 알아듣지도 못하는 어린 여자애를 꿈속에서 매일 만났어도—
케이는 어쨌든 그들 중 무엇도 사랑하지 않았노라 자신을 위로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별 수 없이 엘리자베스에게 속을 까보여야 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종용에 이를 악물고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날…… 날 버리지 마.”
“…….”
“날 버리지 마,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한순간 일그러졌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머리통을 제 품 안에 끌어안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가슴팍에 기대어서 계속해서 말했다.
날 버리지 말라고.
날…… 날 버리고 가지 말라고.
그 말이 제 입에서 흘러나와 제 귀로 다시 돌아오는 순간에 케이의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제 얼굴을 잡고 입을 맞추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귀며 볼, 코, 눈꺼풀 따위에 입을 맞추는 동안 내내 그 말을 반복했다.
날 버리지 마.
케이는 그 말이 어쩌면 지난 생애 전체를 관통해 케이가 사랑했던 것들에게 꼭 하고 싶었던 말이라는 생각을 했다.
제발 날 그만 버리라고.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엘리자베스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 * *
“내일부터 왕립병원으로 매일 간다고?”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우뚝 멈춰 섰다. 엘리자베스는 저택 정원 한가운데에 멈춰선 케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다독였다.
“괜찮아. 탄저균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잘 옮지 않아. 기침으로 옮는 병이 아니라서…….”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헝클이며 한참을 괴로워했지만 끝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승복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늘 지는 싸움을 자꾸만 혼자서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엘리자베스가 저택의 현관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프란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