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55화
“내가 널 공작부부처럼 취급했다는 거야?”
케이의 얼굴에 실금이 갔다. 그의 표정이 어긋나고 목소리에 오만한 기운이 서리는 것이 느껴졌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아니라고?”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말을 이었다.
“아버지도 늘 말씀하셨어. 내가 걱정된다고. 내가 인생을 망칠까 봐 걱정된다고. 그런 말로 날 가둬두셨지. 너도 다를 바 없어.”
“그럼 나보고 지금 네가 전염병에 걸리든 말든 그냥 두라는 거야?”
“그래!”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소리쳤다. 엘우드 밀은 두 사람의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손사래를 쳤다.
“이, 이, 이제 그만! 너! 너 나가서 기다려. 왕립학술원에 안 그래도 보비들이 돌아다녀서 아주 머리가 아프구만 네놈까지……! 학술원 내에는 원래 외부인은 출입금지라고! 특히나 도서관엔 말이야!”
엘우드 밀이 그렇게 말하며 복도에 엘리자베스를 기다리고 있는 보비들을 가리켰다. 엘우드 밀이 케이에게 버럭 소리쳤다.
“나가! 내가 이 녀석은 책임지고 데려다줄 테니까!”
엘우드 밀의 말에 케이는 가만히 엘리자베스를 바라보다가 이를 아드득 갈면서 밖으로 나갔다.
쾅! 문짝이 떨어져나가는 소리에 저 멀리에 앉아 있던 사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서는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면서도 차마 케이 하커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없었던 듯 혀만 끌끌 찰 뿐이었다.
* * *
케이가 나가고 엘리자베스와 엘우드 밀의 연구는 계속 되었다. 엘우드 밀은 자료를 찾는 내내 틈틈이 엘리자베스의 상태를 살폈는데 엘리자베스는 조급한 얼굴로 탄저균에 관한 자료를 살필 뿐 케이와 싸운 후유증으로 씩씩거리거나 넋이 나가 보이지 않았다. 엘우드 밀은 그것을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엘리자베스가 던지는 질문에 차분히 대답해주었다.
“그럼 포름알데히드를 땅에 부으면요?”
“그 정도 양의 포름알데히드를 부을 거면 그냥 새로 땅을 사는 게 싸지 않겠냐? 엉?”
엘우드 밀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답하자 엘리자베스는 시무룩해졌다. 엘리자베스가 한숨을 내쉬자 엘우드 밀이 뻐근해진 팔을 쭉 뻗으며 말했다.
“아휴…… 일주일이면 그냥 어떻게 버티지 않을까? 지원군도 오는 셈이라며. 그렇다면 조지 국왕이 일주일이면 엘린크 성에서 레트니를 깨부술 거고, 다들 엘린크를 탈출해나가면 그만이야. 안 그래?”
“그건 모르는 거죠. 전쟁이 하루 만에 끝나는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엘린크 성 안에 마녀의 저주니 뭐니 하는 소문이 퍼진 이상 일주일은 짧은 시간이 아니에요.”
엘리자베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엘우드 밀이 입맛을 다셨다. 엘리자베스의 말에도, 엘우드 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일주일은 길면서도 짧은 시간이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엘우드 밀에게 물었다.
“우선, 탄저균을 닭에게 주사하고 폐사를 진행해봐야겠어요. 실험을 해봐야 알 것 같아요. 이 논문에 의하면 석회가루도 효과가 있다는 것 같은데, 포름알데히드보다는 석회가루가 싸니까 정확한 양을 실험해봐야죠.”
엘리자베스의 말에 엘우드 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닭에게 주사할 때는 탄저균을 충분히 약화시켜야 돼. 탄저균은 왕립병원에서 구할 거지? 그럼 병원 쪽에서 실험을 진행하는 게 낫겠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이 다른 실험에서 탄저균을 이용했을 때 썼던 방법들을 알려주는 것을 자세히 들었다.
엘우드 밀의 말 중 반드시 외워야 할 것들을 적는 엘리자베스의 손끝이 떨려왔다. 엘리자베스는 퀴닌은 물론이고 저온살균 때도 실패할지도 모르는 설계를 실행한 적은 없었다. 그 실험들은 엘리자베스가 직접 설계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때 엘리자베스는 미래의 지식의 힘을 가지고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실험에 뛰어들었다. 어쩌면 남들보다는 훨씬 더 편하게 과학자 노릇을 했던 것이다. 그런 엘리자베스에게 이 실험은 처음으로 엘리자베스가 미래를 모르는 상태로 뛰어들어야 하는 미지의 세계와 같았다. 그걸 떠올릴수록 긴장이 돼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런 엘리자베스의 상태를 가만히 지켜보던 엘우드 밀이 물었다.
“너 왜 이렇게 조급해?”
“네?”
“아까부터 말이야. 갑자기 케이 하커에게 버럭 화를 내지를 않나. 무슨 일 있냐?”
엘우드 밀의 질문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아까 모건이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편지.
케이가 정말로 2년 전 엘리자베스의 편지에 답장을 썼을까? 지금 자신이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 주변을 손바닥으로 비볐다.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울상이 되자 당황해서 말했다.
“왜, 무슨 일인데?”
“……아무 일도 아니에요. 그냥…….”
엘리자베스는 떨리는 목소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헛기침을 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엘리자베스는 빨개진 눈으로 다시 엘우드 밀을 보며 말했다.
“치료제는요? 라듐을 가공하는 건 어떻게…….”
“아, 그거.”
엘우드 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컴컴해진 저녁 하늘에 도서관에 남은 것은 엘우드 밀과 엘리자베스밖에 없었다.
“글쎄. 일단은 전기적인 자극을 줘야 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만, 계산이 안 나와. 여기 보면…….”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로서는 알아듣기 힘든 설명을 열심히 해주었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설명을 들으며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엔 점점 눈빛에서 총기를 잃어갔다. 엘우드 밀은 그런 엘리자베스를 힐끔 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정신없지? 그냥 내가 열심히 하고 있다, 그것만 알아둬라.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답지 않게 그녀를 토닥이려는 듯한 말투에 조금 놀랐다. 엘리자베스는 들고 있던 펜을 이리저리 굴리며 망설이다가 말했다.
“……제가 실험체가 되면 어떨까요, 선생님?”
엘리자베스의 말에 엘우드 밀이 얼굴을 구겼다.
“뭐…… 라고?”
“제가 실험체가 되는 거예요.”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너.”
“제가 케이한테 물려서 다시 몰록이…….”
“닥쳐.”
엘우드 밀의 눈이 가늘어졌다. 엘우드 밀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너 완전히 돌았구나? 엉?”
“선생님.”
엘우드 밀은 손사래를 치며 엘리자베스에게 소리쳤다.
“내가 소리를 안 지를래도 안 지를 수가 없다, 이 자식아! 어떻게 그렇게 모자란 생각을 할 수가 있냐? 케이가 너한테 무슨 마음으로 치료제를 준 거라고 생각해? 케이 하커, 그 녀석이 나도 짜증나긴 한다만, 그거랑 기껏 나은 놈이 실험에 참여하려고 다시 물리는 건 다른 얘기지. 그리고 너 조 기억 안 나? 조는 너한테 물리고도 멀쩡했어. 그게 무슨 뜻일 거 같아? 형태가 몰록이 되지 않은 상태로 물어버리면 감염이 되지 않는다고. 케이가 완전히 몰록이 된 상태로 널 물게 만들려면 널 공격해야 할 텐데. 그러다가 그대로 죽어도 괜찮다 이거냐?”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를 보며 빈정거렸다. 그의 얼굴에도 속상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럼 어떡하냐구요!”
엘리자베스가 소리쳤다. 엘리자베스가 책상을 쾅 하고 내려치자 도서관이 쩌렁쩌렁하니 울렸다. 엘리자베스는 눈물이 잔뜩 고인 눈으로 엘우드 밀을 노려보았다.
“그럼 어떡해요…… 그 녀석이 죽어버리고 나면…… 나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은데……. 그 답답한 녀석이…… 정말…… 날 힘들게 한단 말이에요.”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조금씩 구기듯이 제 무릎을 당겨서 안았다. 도서관 의자 안에서 한 마리의 작은 새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훌쩍거렸다.
“……너무 힘들어요. 너무…….”
엘우드 밀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엘리자베스의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이 멍청한 자식들. 네놈들은 언제 클 거냐?”
“닥치세요…….”
엘리자베스는 훌쩍거리며 대답했다.
* * *
엘리자베스가 자정이 다 된 시간쯤에 도서관을 빠져나가려고 하자 엘우드 밀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데려다주마.”
엘우드 밀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저 밖에 보비들도 있고 걸어가면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에요.”
엘리자베스가 말하자 엘우드 밀이 재차 권유했다. 엘리자베스가 세 번쯤 거절하자 엘우드 밀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물러났다.
엘리자베스가 복도로 나가자 보비들이 퀭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녹초가 된 보비들은 엘리자베스를 따랐다. 그들은 엘리자베스에게 구시렁거렸다.
“공녀님. 원래 이렇게 늦게까지 책을 보십니까?”
“저희 여동생은 밤 열 시면 꼬박꼬박 자던데요. 피부 건강을 위해서요.”
“……네.”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구시렁에 길게 대꾸하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하며 회랑을 걸어 나왔다.
어두운 밤, 학술원에 불이 켜져 있는 공간은 몇 되지 않았다. 불야성과 같았던 박람회 이전의 모습과는 많이 대비가 되는 모습이었다. 회랑은 싸늘하고 어두웠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긴장을 했다.
도서관을 나오니 괜히 칠판에 그려진 목을 매단 여자 시체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엘리자베스가 어두운 복도를 최대한 천천히 걸어가며 뒤에 있는 보비들에게 물었다.
“혹시 레트니 애비뉴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용의자는 잡혔나요?”
“아뇨. 아직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경찰청이 아주 난리예요. 기자들이 잔뜩 몰려들어서는…… 피곤해죽겠습니다.”
보비가 한숨을 쉬는 것을 들은 엘리자베스의 마음에 분노가 일었다. 피곤이라니. 어디선가는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는데 겨우 피곤한 게 문제일까? 엘리자베스는 보비에게 한바탕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1층 복도를 걸어갔다.
저 멀리서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정문 앞, ‘후세를 위하여’라는 청동판이 있는 곳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상대가 학술원에서 공부하는 신사일까 싶어서 괜히 걸음이 더 느려졌다.
혹시…… 저 사람이 낙서를 한 장본인은 아닐까?
엘리자베스는 공포가 심장을 잠식하는 것을 느꼈다. 며칠 전까지 엘리자베스를 용기 내게 했던 수많은 희망들은 갑자기 이 순간 또 짧은 양초 위에서 타오르는 촛불처럼 꺼지기 직전으로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손에 묻어나는 땀을 닦아내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세 발자국쯤 걸었을까. 엘리자베스는 그 커다란 남자가 뒤를 도는 순간,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너.”
엘리자베스가 말하자 남자는 바깥 냄새가 잔뜩 묻은 재킷을 입은 채로 대답했다.
“끝났나?”
엘리자베스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케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원망스레 올려다보았다.
“기다린다는 말 없었잖아.”
“내 주특기잖아. 네가 다른 남자랑 집에 가든, 잠을 자든, 널 기다리는 거.”
케이가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