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54화
“엘리자베스.”
국왕의 알현실에서 얼을 빼놓고 있던 엘리자베스를 조지의 목소리가 가볍게 깨웠다. 엘리자베스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춰 인사했다. 조지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 모양이구나?”
엘리자베스는 조지의 말에 금방 케이와 관련된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는 최대한 침착하게 탄저균으로 이미 성내가 오염되었을 거라는 이야기, 그리고 당장 성내에서 가축이나 농작물을 거래하거나 섭취하는 행위를 금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엘리자베스의 말을 들을수록 조지의 얼굴은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마침내 엘리자베스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조지는 피로한 얼굴로 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한마디로 엘린크 성이 오염되었으니 그 성에서 나는 모든 생명체를 먹지 말도록 해라?”
조지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다급하게 말했다.
“원래대로라면 당장 성을 폐쇄하고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합니다.”
“전쟁 중에 말이냐?”
조지는 냉소적으로 꼬집으며 손사래를 쳤다.
“네가 말하는 대로 명령하면 엘린크 성이 오염된 게 아니라 마녀의 저주에 걸렸다고 소문이 날게다. 그럼 그 성 안에 있는 내 병사들과 주민들은 벌벌 떨다가 하루라도 빨리 투항하고 싶어 안달이 나겠지.”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대로 두면 엘린크 성에서 사상자가 더 나올 거고 그것도 병사들의 사기에는 과히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조지가 발을 까딱까딱하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엘리자베스는 조지의 숙고가 두려웠다. 위정자들이 숙고를 한다는 것은 정답을 두고 나쁜 길로 우회해가고 싶다는 뜻이고, 그럴 때 그들이 내놓는 답은 놀라울 정도로 비상식적이었다.
조지의 다음 대답 역시 비슷했다.
“차라리 사망자를 전부 묻어버리면 모를까…….”
“폐하!”
조지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안광을 번뜩였다. 엘리자베스는 그 순간 조지의 눈에서 레트니의 눈빛을 읽었다. 도무지 표정이라는 것은 없고 오로지 욕망과 결핍, 그 사이만을 오가던 레트니의 눈빛 말이다.
그리고 조지의 눈빛은 지금 결핍으로 인해 굶주린 눈에 가까웠다. 엘리자베스는 절망스러운 기분으로 조지를 보았다.
조지는 엘리자베스를 보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창문을 걷었다. 그러곤 엘리자베스에게 정원에서 여전히 각국의 외교관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건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주일. 일주일이면 서부 항구로 멜니아와 이오페아 각국에서 연합군을 보내주기로 했다. 숫자는 얼마 되지 않지만 상징적인 의미가 있지. 그들은 리오든 서부 항구에 집결하였다가 남부로 가서 남부군의 허리를 칠 것이다.”
당초 2주 동안 전투를 벌이지 않겠다고 한 것과는 계획이 달라졌다.
엘리자베스는 조지가 작금의 상황을 조금 더 촉박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그 일주일동안 정말 사상자들을 파묻겠다는 것인가? 엘리자베스가 뒷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으로 조지의 등을 보았다.
“연합군들은 참전을 통해 자신들의 이권을 얻을 수 있다고 보고 있고, 나는 이른 전투를 통해 지리멸렬한 수성으로 인해 리오든이 조금이나마 분열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일주일. 그게 가장 빠른 시일이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폐하. 전투를 앞당기신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십니다. 하지만 사상자를 묻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지금 탄저균에 감염된 사망자를 엘린크 근처 땅에 묻으면 엘린크 성은 물론이고 성에 딸린 영지 전체가 전쟁에서 이기든 지든 100년간은 거의 쓸 수 없는 땅이 될 것입니다. 어떤 가축도 기를 수 없고, 식물도 키울 수 없는 땅이요.”
“엘리자베스.”
조지가 뒤로 돌았다. 그러나 창문에서 나오는 햇빛 때문에 조지의 얼굴 표정은 거의 읽을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긴장된 얼굴로 조지가 천천히 자신의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역광에서 벗어난 조지의 얼굴에는 의외로 절망감이 깃들어 있었다.
조지가 말했다.
“일주일이다. 탄저균에 대해 알리는 것은 연합군이 각지에서 모여든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것은 내일로 하겠다. 너는 일주일동안 탄저균을 약화시킬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라. 뭐든 좋아. 전투가 시작되면 엘린크 성에 식료품을 조달하기 어려울 수 있다.”
엘리자베스는 조지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지는 지금 정치적인 편한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가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케이와 엘리자베스가 목숨을 의탁한 이자가 레트니와는 다른 자라는 것에 감사할 지경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조지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조지가 놀란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말렸다.
“그만 하거라.”
“제가 꼭……. 꼭 탄저균을 약화시킬 방법을 찾겠습니다. 어떻게든요.”
엘리자베스가 결연하게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반드시 조지의 승리를 목도해야만 했다. 그 승리가 엘리자베스와 케이의 미래를 바꿔놓아야만 했다.
* * *
엘리자베스는 궁에서 바로 학술원으로 출발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엘리자베스가 한 일은 학술원 도서관에 가서 엘우드 밀에게 탄저균에 대한 모든 책들을 꺼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엘 선생님은 정말로 탄저균에 대한 모든 책을 거침없이 꺼냈다.
“이건 너무 개론이니까 제외하고…… 여기에도 탄저균 논문이 실려 있어.”
엘 선생님이 꺼내준 책은 총 20권 정도. 엘리자베스는 생각보다 적은 양에 놀란 눈으로 엘 선생을 보았다.
“정말이에요? 이것밖에 안 돼요?”
“그래. 탄저병이라는 건 학질이랑 다를 바가 없어. 가난한 자들의 질병이라고. 거기다가 학질은 그나마 도시 노동자들에게도 발견되지만 탄저병은 가축을 키우거나 농작물을 재배하는 농부에게서나 발견되니까 리오든에서 한가하게 시간이나 때우는 과학자들의 관심사일리가 있냐.”
엘우드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엘리자베스가 머리를 부여잡았을 때였다. 뒤에서 도서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자베스는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문틀에 거대한 몸을 기댄 채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케이가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보자마자 얼굴을 돌렸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것을 눈치채고 어이가 없다는 듯한 얼굴로 엘리자베스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넌 여기가 네 집이냐?”
엘우드의 말에 케이는 조금도 반응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엘리자베스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몸을 숙였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눈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일찍 온다고 했잖아?”
“……그랬지.”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아까 모건이 한 말 때문이었다.
케이는 창문 너머 붉은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벌써 해가 저물어가. 돌아가자.”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엘우드 밀이 곤란하다는 듯이 케이의 등짝을 때렸다.
“이봐! 엘리자베스는 지금 이 책들을 읽어야 한다고. 이 중에는 보관서고에 있는 책도 있어서 여기서 다 읽지 않으면 안 돼.”
엘우드 밀에게 등짝을 맞은 케이는 엘우드 밀을 당장이라도 죽여버릴 듯이 노려보았다.
“이게 뭡니까?”
케이는 엘우드 밀이 가리킨 책의 이름들을 보았다. 질병. 역병. 감염. 질환. 친숙하지 않은 단어들을 바라보던 케이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설마 엘린크에서 돈다는 그 식중독을 치료해보려고?”
엘우드 밀이 발끈해서 대답했다.
“그건 식중독이 아니야! 탄저병이라고! 학질 같은 전염병이란 말이다!”
엘우드 밀의 말에 케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전염병?”
“그래. 당장 치료방법이나 예방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엘린크 성 전체가 폐쇄될 수도 있어!”
엘우드 밀이 소리쳤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케이가 물었다.
“정말이야? 네가 간 왕립병원에 전염병 환자들이 있었어?”
“……응.”
엘리자베스가 가까스로 대답하자 케이가 분노한 얼굴로 엘우드 밀의 멱살을 쥐었다.
“어떻게 엘리자베스를 전염병 환자가 있는 곳에 보낼 수가 있습니까?”
“……컥…… 이봐. 내가 보낸 게 아니잖아……? 너 미쳤어?”
엘우드 밀은 컥컥거리며 황당한 눈으로 케이를 보았다. 엘우드 밀이 허우적거리는 사이 멀리에 있던 사서 하나가 엘우드 밀, 엘리자베스, 케이 쪽으로 걸어왔다. 사서는 케이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그 사서 선생님이 무척이나 사람 화를 돋우는 건 아는데요, 도서관에서 이러시면…….”
케이가 사서의 말에 엘우드 밀의 멱살을 쥐었던 손을 풀고 엘우드 밀을 땅바닥에 던져버리다시피 했다.
엘우드 밀이 나동그라지자 케이는 엘우드 밀을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사서에게 말했다.
“죄송하게 됐군요. 그럼 이만.”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면 말이다.
케이는 갑자기 휑해진 제 손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뭐야?”
“뭐라니. 다신…… 다신…… 사람 때리지 않는다고 했잖아. 넌 왜 약속을 안 지켜? 넌 왜 늘 하는 말마다 거짓말투성이냔 말이야.”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노기어린 음성에 엘우드 밀을 슬쩍 보았다. 케이는 흔들리는 눈으로 머리를 헝클였다.
“난…… 난 자꾸 널 위험에 빠뜨리는 이 자식이 싫어서…….”
“그럼 사람을 때려도 된다는 거야?”
“때리지 않았어. 살짝 민 거야.”
케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다시 잡으려고 했다. 그때 엘우드 밀이 혀를 끌끌 찼다.
“이게 살짝 민 거야? 참나.”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손을 다시 뿌리치고 엘우드 밀이 일어나는 것을 도우려고 손을 뻗었다.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손을 잡은 채로 케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거짓말쟁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얼굴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그는 엘리자베스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다신 안 그래. 정말이야.”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넌 언제나 거짓말만 하잖아.”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말하며 엘우드 밀의 재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었다. 엘우드 밀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다른 사서를 보았다. 그 사서는 혀를 내두르며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에게 다정하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선생님?”
“괘, 괜찮다.”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의 새삼스러운 다정함에 조금 당황해서 대답했다. 엘우드 밀과 엘리자베스가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하는 것을 보던 케이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가자.”
“싫어.”
“왜 싫은데?”
“난 거짓말쟁이랑 같은 마차 타기 싫어.”
“그럼 너 혼자 마차 타. 난 걸어가든지 말을 타고 갈게.”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소리쳤다.
“싫다니까! 이 책들 다 읽고 가야 해! 당장 저 전쟁터에는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나보고 집에나 가라는 거야?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쉐필드에서처럼 아름다운 꽃 노릇이나 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