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53화
“네. 귀감이요. 제 말에 뭔가 실수라도……?”
의사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굳어지자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실수는 없지만……. 귀감이라니…… 말이 좀 과하네요. 일손이 딸릴 때는 와서 조금 도와줄 순 있겠지만…….”
“정말요?! 저희 일손이 엄청나게 딸린답니다!”
의사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의사는 방실방실 웃으며 엘리자베스의 손을 덥썩 잡고 말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엘 선생님! 저희가 말만 왕립병원이지 리오든에서도 가장 먼 곳이라 예전에는 정신병원으로 쓰였었고 지금은 제대로 교육된 인력이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당황할 일이 많으셨을 줄로 압니다.”
엘리자베스는 의사의 말에 아까 마스크와 장갑을 끼지 않고 병동을 돌아다니던 간호사와 의사들을 떠올렸다.
정신병원이라니.
정신병원은 말이 병원이지 레본에서는 거의 격리용 시설, 내지는 수용소에 가까웠다. 엘리자베스는 이 병원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알 것 같았다. 전쟁 상황에 아픈 병사들이 올 곳이 이런 곳밖에 없다는 사실이 엘리자베스를 답답하게 했다.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그럼 내일부터라도 오도록 할까요? 어떠세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의사는 물론이고 뒤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간호사들도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아까 엘리자베스가 능숙하게 환자들을 처치하는 것을 보고 이미 마음을 빼앗긴 상태였다. 처음 간호사들이 보였던 반발에 비해 지금의 반응이 너무 열광적이라서 엘리자베스는 조금 놀란 눈으로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죠.”
“그런데 탄저병은 딱히 약이 없지 않습니까? 계속 이렇게 피부를 소독해주는 걸로 충분할까요?”
의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피부 탄저가 도는 거니까요. 치사율이 높은 편도 아니고 전염성이 강한 편도 아니니 괜찮을 겁니다. 그래도 환자들의 상태를 잘 보고 항생제를 써주세요. 염소 고기나 다른 폐사한 가축을 잘못 먹은 사람들이 있는지 앞으로 들어오는 병사들에게도 틈틈이 조사해주시고요.”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고 환하게 웃는 의사의 배웅을 받으며 다니엘과 함께 다시 마차에 올랐다.
엘리자베스는 그때까진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 몰랐다.
그날 밤, 레트니 애비뉴에서 케이에게 늦게 왔다고 잔소리를 한참 듣고 나서 다음 날 아침 왕립학술원으로 출근해 엘우드 밀을 만나게 될 때까지는 말이다.
* * *
“탄저병……?”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엘우드 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엘리자베스는 엘 선생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왠지 불안해져서 물었다.
“왜요? 제가 뭔가 처치를 잘 못했나요? 뭘…….”
“아니. 처치에는 문제가 없다. 나는 처치를 가지고 뭐라고 하는 게 아니야.”
“그럼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엘우드가 엘리자베스를 사서 자리 쪽으로 끌어왔다. 그러곤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그 폐사된 가축이 있던 우리며 뭐며 전혀 소독하지 않은 거지? 아니, 물론 소독을 했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만…….”
“그게 무슨…….”
“염소고기만 조심해서 될 게 아니야. 내가 여기에 앉아 있으면서 다른 해의 홀램브로 학술지들까지 전부 읽었는데 말이야. 내가 알기로 탄저균은 탄저병에 걸린 생명체가 죽으면 그 지역을 전부 오염시킨단 말이다. 한 마디로 혹시 염소가 폐사하기 전에 이미 그 마녀의 집이란 곳에서 죽은 생명체가 있었을 수도 있고 거기서 난 음식이나 가축이 그 좁은 성내에서 거래되었을 수도 있어.”
엘리자베스는 엘우드의 말에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을 느꼈다.
엘리자베스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엘우드 밀에게 말했다.
“그럼 어떡해요? 사상자가 추가로 날 수도 있다는 건가요?”
“그래. 당장 식물이나 가축과 접촉하는 것을 금하고 소독과 위생에 신경 써야 해. 내가 읽은 논문에서는 탄저균은 흙 속에서는 100년까지도 매복할 수 있다고 되어 있어. 그 말은 탄저균으로 이미 성내가 오염된 상태라는 뜻이지.”
엘리자베스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엘린크는 수성의 요지가 되었다. 병사들에게 그 엘린크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려면 너무 많은 것들을 각오해야만 했다.
엘리자베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엘우드 밀이 엘리자베스를 걱정스럽게 보았다.
“왜? 어떡하려고?”
“일단 폐하를 뵈어야겠어요. 사상자가 나기 시작하면 사기가 꺾일 텐데……. 그러기 전에 빨리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해요. 성을…… 버리든지.”
엘우드 밀이 고개를 내저었다.
“성을 버리는 데에는 국왕이 절대 동의하지 않을 거다. 나라도 그럴 거야. 성을 버리는 건 전선에서 후퇴를 의미하고 사우스리오든에는 수많은 공장이 있어. 그 공장 몇이 야습이라도 당하면 이쪽에 불리해.”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이 도서관에서 지내는 1달 반 간 레본의 지리에 대해 많은 지식을 쌓았음에 조금 감탄했다. 엘 선생은 꼭 과학이나 의학뿐 아니라 다양한 지식 습득에 있어서 엘리자베스보다 훨씬 속도가 빨랐다. 슬그머니 가슴 속에서 투기의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엘리자베스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말해드리지 않을 순 없어요.”
* * *
엘리자베스가 입궁했을 때는 궁 안에는 선더렌과 멜니아의 외교관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알현을 대기하라는 명을 받고 정원에서 하릴없이 서성거리다가 회랑에서 나오는 멜니아의 외교관인 모건을 보았다. 모건은 엘리자베스를 보더니 반갑다는 얼굴로 먼저 다가와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공녀님. 저는 스미스 모건이라고 합니다. 제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모건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이 악수를 청하는 것임을 알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의외로 모건은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더니 가볍게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엘리자베스는 조금 놀라면서 말했다.
“당연히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스미스 씨. 저는 엘리자베스 클레몬트라고 합니다. 제 이름은 이미 아시는 것 같지만요.”
스미스 모건.
멜니아의 대통령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자는 지금만큼은 레본 땅에 외교관의 신분으로 와 있었다. 물론 그저 실무나 보는 서기관들과는 달리 이자는 특별 대사의 자격으로 온 것이었다.
하지만 특별 대사고, 대통령 후보고 간에 멜니아 땅에서는 ‘경’ 같은 칭호가 없이 ‘씨’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임을 엘리자베스는 알고 있어서 그를 스미스 씨라고 부른 것이다.
모건은 엘리자베스의 말에 껄껄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이 레본 땅에서 지내면서 어떻게 엘리자베스 양에 대해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레본의 급진적인 변화의 물결 속에 언제나 엘리자베스 양이 있었는 걸요. 특히나 엘리자베스 양이 국회의원 후보자로 등록되어…….”
“평민원 추천인입니다.”
엘리자베스는 모건의 지극히 멜니아다운 어휘 선택을 정정해주었다. 그러자 모건이 얼른 사과하며 말을 이었다.
“평민원 추천인으로 등록되어 의회 청사 앞에 수많은 군중이 모였을 때는 다소 놀라웠습니다. 저는 레본 땅을 사랑합니다만…… 글쎄요……. 레본은 좀 뭐랄까 열정이 부족한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딱딱하고 경직되어 있지요.”
이 남자는 지금 레본이 이오페아 다른 국가들은 물론 멜니아에 비해 보수적인 국가라는 사실을 에둘러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의 레본은 정말이지 열정적이고 뜨거웠습니다. 아, 물론 그 뒤에 일어난 참사에 대해서는 저도 무척이나 애달프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픔이 있으면 그만큼의 성장도 있는 법이 아닙니까. 조지 국왕 폐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성장의 밑거름으로 쓰실 수 있는 분입니다.”
엘리자베스는 모건의 말에서 진심을 읽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모건은 정치인이고 외교관이었다. 그의 말이 진심이든 거짓이든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모건의 진심이란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를 테니까.
“당연합니다. 폐하께서는 분명히 그러실 수 있는 분이세요.”
모건은 엘리자베스의 대답을 들으며 그녀의 푸른 눈을 뚫어지게 보다가 말했다.
“붉은 머리핀이 아주 잘 어울리겠군요.”
엘리자베스는 모건의 뜬금없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뭐라고…….”
“케이 하커가 디자인한 그 머리핀 말입니다. 아직 받지 못했나요?”
엘리자베스는 모건의 말에 얼굴을 굳혔다. 모건이 실수를 했다는 듯이 제 입을 막았다.
“아이고, 내가 말실수를 했군요. 전 이미 케이가 준 줄로 알았는데 아니었다니. 제 실수입니다.”
머리핀.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방에서 발견했던 그 머리핀을 떠올리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엘리자베스는 모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 핀을…… 어떻게 아시죠?”
“케이가 스케치를 가지고 있던 것을 앰버가 꼭 실물로 만들어 주고 싶다고 했고 내가 직접 업자를 소개해줬어요. 그때는……. 그때는 그게 앰버의 것이 아닌가 해서 앰버한테 물어봤었는데 앰버는 절대 아니라고 했지요.”
모건은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케이가 얼마 전에…….”
모건은 회랑에 있는 다른 이들을 힐끔 바라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가짜 통행증을 만들어달라고 했고, 그 중 하나는 케이의 것, 하나는 금발 여자의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가 당신의 것이라는 건 당연히 알 수 있었고 케이에게 당신과 케이를 지금 당장 이 레본 땅에서 나갈 수 있도록 멜니아에 망명시켜주겠다고 했지요.”
엘리자베스는 모건의 눈빛이 비치는 욕망을 읽었다. 멜니아로 망명.
엘리자베스는 잠시 비오는 날 꾸었던 달콤한 꿈을 떠올렸지만 그건 잠시 뿐이었다.
타국의 유력 대통령 후보를 통해 타국으로 망명한 왕족의 삶. 그건 엘리자베스에게는 유배 생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를 쥐고 모건은 분명 케이 역시 이용하려고 들 테다.
“그러니까 케이가 지금은 당신에게 조지 국왕이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조지 국왕이 들으면 천인공노할 일이죠. 한낱 국민에게…… 물론 공녀님을 비하하는 말은 아닙니다만…… 국왕이 필요하다라. 그런 표현을 쓸 수 있는 건 케이뿐일 것입니다. 그래서 케이에게 혼자라도 가겠냐고 물었더니 나에게 화를 내고 통행증이나 만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알았죠. 붉은 루비 머리핀은…….”
모건은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한쪽 눈을 감았다. 마치 상상 속의 루비 핀을 엘리자베스에게 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붉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금발에 어울리겠구나, 하고. 아, 그리고…… 앰버가 이야기해줬는데 그 스케치가 담긴 노트 속에 다른 것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케이의 편지 말입니다.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앰버가 차마 그건 훔쳐보지 못해서 첫 문장만 읽고 덮었다고 했는데, 이렇게 시작한다더군요.”
“……?”
“엘리자베스에게. 네 편지는 잘 받았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단 하나의 편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