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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51화 (251/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51화

왕립병원의 의사, 간호사, 그리고 환자들은 엘리자베스를 알아보는 눈치였다. 엘리자베스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들은 엘리자베스를 구경거리처럼 힐끔거렸다.

하지만 그런 부담스러움도 잠시였다. 엘리자베스는 곧 퀴닌을 처방받은 이후 몸에 수포가 있다는 환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환자는 이미 수포에서 빨갛게 피가 비쳤다. 엘리자베스는 환자의 상태를 살피려다가 간호사 중 하나가 장갑을 끼지 않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당장 나가!’

엘리자베스는 이 자리에 엘 선생이 있었다면 저 간호사는 엄청난 호통과 모욕을 듣고 울면서 뛰쳐나갔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는 아까부터 엘리자베스 쪽을 보며 동료들과 속닥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부르자 긴장한 얼굴로 걸어왔다.

“장갑을 끼는 게 좋겠어요. 이 환자는 피부병이 의심된다구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간호사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는 뒤에서 참관하고 있는 다니엘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저, 저도 아까까진 하고 있었는데—”

엘리자베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까까지 했다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감염은 잠깐의 방심으로 일어나는 거예요. 당장 이 방을 나가서 장갑을 끼고 와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간호사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뛰쳐나갔다. 반성의 기미는 없고 지적당한 것에 심통이나 난 것 같은 간호사의 상태를 보니 왜 엘 선생님이 가끔 그렇게 호통을 치는지 알 것 같았다.

물론, 엘리자베스는 그럴 마음이 없었지만.

엘리자베스는 깨끗한 천으로 입을 가리고 손에 장갑을 꼈다. 그리고 환자의 환부를 깨끗하게 소독하면서 살폈다.

“죽겠어요. 너무 가렵고 이젠 따가워요.”

엘리자베스는 환부가 붉게 변한 것을 보며 물었다.

“혹시 막 긁었어요?”

“네…… 밤에도 잠이 안 오는데 어떡해요?”

“그래도 절대 긁으면 안 돼요. 여기에 무슨 세균이 있는지 모르고 그게 손을 통해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있는 데다가 이렇게 피가 나기 시작하면 감염 위험이…….”

엘리자베스는 환자에게 단호하게 설명하며 병변 부위를 살폈다. 병변의 원인은 다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이렇게 피부가 뭔가로 지진 듯이 빨갛게 변하는 것.

엘리자베스는 병변의 형태를 가만히 보다가 문득 어떤 생각을 했다.

전염병.

병변.

검은 점…….

엘리자베스는 퍼뜩 고개를 들어 다른 환자를 돌보던 간호사에게 물었다.

“여기 엘린크에서 온 병사들도 있다고 했죠?”

“네. 그렇습니다, 아가씨.”

평민 출신일 것이 분명한 간호사는 엘리자베스를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처럼 칭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호칭을 정정해주는 대신에 다급하게 물었다.

“몇 층에 있죠?”

“4층입니다.”

“그럼 지금 이 환자와 병동이 겹친 적은 없나요?”

“……그, 글쎄요? 확인해보겠습니다, 아가씨.”

간호사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다니엘을 보았다. 다니엘은 엘리자베스에게 걸어오려고 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니엘과 보비들, 그리고 간호사들을 향해 말했다.

“다들 마스크와 장갑을 하고 병동으로 들어오는 게 좋겠어요.”

“하지만……!”

간호사 하나가 반발하려고 하자 엘리자베스가 다니엘을 노려보며 말했다.

“내 말을 들으라고 명령해줘요. 나도 당신을 이용해야겠어요. 엘린크 병사들은 물론 이 왕립병원 전체를 위한 일이에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다니엘이 흥미롭다는 듯이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는 간호사들과 보비들 모두에게 엘리자베스의 말을 들을 것을 지시했다.

“여긴 왕립병원이고 지금은 공녀님의 말씀이 국왕 폐하의 말씀과 다를 바 없습니다. 두 번은 말하지 않지요. 지금부터 엘리자베스 양의 말씀을 그대로 이행하세요.”

다니엘의 말에 간호사들은 한숨을 내쉬긴 했어도 순순히 밖으로 나갔다. 장갑은 꼈지만 마스크는 하고 있지 않던 간호사들과 보호장구가 없던 보비들, 그리고 다니엘이 전부 장갑과 마스크를 장착하는 것을 보며 엘리자베스가 다니엘에게 걸어갔다. 그 역시 깨끗한 천을 얼굴 주위에 두르는 마스크를 장착한 채였다.

“엘린크 성에서 온 병사들에게 전부 검은 점이 있었나요?”

“시체들에게도 있었죠.”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이 말했다.

“그런 탓에 신의 저주가 내렸다면서 저쪽에서는 무척 좋아하는 모양입니다만…… 검은 점이란 게 사실은 원래 있었던 것일 수도 있고—”

다니엘이 주변의 눈치를 보며 작게 말하자 엘리자베스가 그 말을 끊었다.

“점이 맞아요? 점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데요? 위치는 대부분 손이었나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다니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간호사 하나를 불러왔다. 엘리자베스가 다니엘에게 물었던 질문을 똑같이 간호사에게 했다. 그러자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대부분 손에 있어요. 그리고 점의 크기는 이 정도. 점이라기보다는…… 뭔가에 타들어 가는 것 같은…….”

간호사의 말에 다니엘이 혀를 차며 간호사를 노려보았다. 간호사는 금방 주눅이 들어 다시 자신이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다니엘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불로 지진 것 같다는 말은 아마 떠다니는 낭설을 들어서 하는 말일 겁니다. 식중독을 어떻게든 신의 저주로 여기고 싶어서 안달이 난 몇몇 나약한 자들의…….”

“아니요. 불로 지진 것 같다는 말, 진짜일 거예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다니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요?”

“일단 환자를 직접 봐야겠어요. 4층이라고 했죠? 그리로 가보죠.”

엘리자베스는 다니엘의 대답 같은 건 듣지 않고 복도를 뛰듯이 걸어갔다. 마음이 급했다. 정말 엘리자베스가 생각하는 그 병이 맞는다면—

이 병이야말로 치료제 같은 건 없었다.

* * *

4층의 간호사와 의사들은 위생상태가 더 나빠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기겁을 하며 간호사와 의사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미쳤어요?! 장갑도 두건도 하지 않고 수포가 난 환자들을 만지다니! 대체 뭐하는 짓이에요!”

엘리자베스는 10분 전에 자신은 소리를 지르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을 스스로 깼다. 엘리자베스는 간호사 두 명을 울렸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의사에게는 왕립병원에서 다시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해주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더러운 성질머리를 꼭 닮아가는 것 같아서 기분이 더러웠다. 하지만 자괴감에 빠질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의사와 간호사들을 모두 내보내고 그들이 돌아올 동안 병사들을 살폈다.

엘린크에서 온 병사는 총 10명 남짓. 병사들은 신의 저주니 뭐니 하는 말을 믿는 건지 정신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괜히 십자가를 만지작거리며 기도문을 외우고 있거나 땀을 흘리면서 가족들을 찾기도 했다.

생각보다 이 적은 숫자의 환자들이 엘린크 성의 사기에 큰 문제를 안겨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우선 가장 상태가 안 좋아보이는 남자에게 걸어갔다. 그는 덩치가 왜소한 남자였는데 간호사들이 약식으로 적어둔 진료 차트에는 나이가 겨우 19살이라고 되어 있었다.

“멜린 씨?”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녀님.”

멜린이 바들바들 떨며 대답했다. 엘리자베스는 환자와 의사 사이의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해 일부러 다정하게 말했다.

“나이가 겨우 19살인데 참전할 생각을 하다니 정말 대단하네요. 자랑스러워요, 정말.”

멜린은 그 말에 붕대를 감아둔 팔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아가…… 아니, 공녀님.”

엘리자베스는 멜린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냥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좋겠어요. 난 여기에 의사로 온 거니까요.”

“그럼 엘 선생님이라고 부를까요?”

멜린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흠칫해서 멜린을 보았다. 멜린은 해맑게 말했다.

“간호사 중에 엘리자베스라는 분이 계신데, 그분은 늘 엘, 이라고 불리시더라구요.”

엘리자베스는 멜린의 말에 묘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맘대로 해요, 멜린.”

“네, 엘 선생님.”

엘 선생님이라니.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스승의 이름으로 불리는 게 어색해 잠시 손을 쥐락펴락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엘리자베스는 멜린의 손 근처의 붕대를 풀어냈다. 그러자 근처에 서 있던 다니엘도 관심을 가지고 걸어왔다. 다니엘은 멜린의 손을 보며 얼굴을 구겼다.

그도 그럴 것이 멜린의 손 상태는 끔찍했다. 사람의 피부라고 하기엔 너무 딱딱하게 굳어있고 손 전체에 수포와 검은 병변이 진행 중이었다. 멜린은 제 손을 보면서 겁에 질리는 듯한 표정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멜린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소독을 할 건데, 조금 따끔할 수 있어요. 그런데 상처를 계속 보고 있으면 실제로 아픈 것보다 훨씬 더 아픈 것 같은 착각이 들기 마련이에요, 멜린 병사. 그러니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게 좋겠어요.”

“네? 아…… 네!”

멜린은 착하게도 엘리자베스의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돌리고 눈을 꽉 감았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앳된 옆얼굴을 보면서 이 소년과 청년의 중간쯤에 있는 남자가 엘리자베스와 처음 만났을 때의 케이와 같은 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멜린은 엘리자베스가 거즈에 소독약을 묻혀 살살 닦아내는 동안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멜린을 보며 새삼스럽게 그때의 케이 하커가 무척이나 어린 나이였음을 실감했다. 물론 19살이면 레본에서는 이미 결혼을 하고도 남을 나이이지만 인생을 겨우 20년도 살지 못한 인간 개체란 어쩔 수 없이 미숙한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일부러 멜린에게 말을 걸었다.

“어떤 이유로 입영하게 되었나요, 멜린?”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멜린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당연히 조국을 위해 봉사하고 싶은 마음으로…….”

엘리자베스는 멜린의 대답에 살짝 웃고는 다니엘에게 저쪽으로 가 있을 것을 권했다. 다니엘도 별로 이런 지리한 치료과정을 보고 싶지는 않은 듯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엘리자베스는 다니엘이 물러나자 멜린에게 다시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멜린.”

“……제 부모는 엘린크 전 성주님의 소유인 농노들이었습니다. 성주님께서 저희 부모님을 자유인 신분으로 만들어주시면서 빌려주신 땅이 있는데, 이번에 참전하면 밀린 지대를 탕감해주신다고 하셔서…….”

엘리자베스는 멜린의 말에 왠지 씁쓸한 기분이 느껴졌다.

사실 영주들 모두가 클레몬트 공작부부가 땅과 농노를 잃고 도시의 귀족이 된 것은 아니다. 영주들 중 몇은 수완 좋게 땅을 유지했고 그러면서 농노들을 자유인 신세로 풀어준다고 말하며 땅을 빌려주고 세금이 아닌 지대를 받아 챙겼다.

그 지대는 당연히 세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비싼 금액이며 영주들은 농노들에게 치안을 유지해주거나 때로 곳간을 풀어 굶지 않도록 해줄 의무가 있었던 것과 달리 자유인에게는 땅을 빌려주는 대가로 지대를 받을 뿐 어떤 의무도 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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