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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50화 (250/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50화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다니엘의 속내를 어느 정도 깨달을 수 있었다.

엘린크에서는 역병이 돌고 있다고 했고 그 역병의 환자들이 남부에 있는 왕립병원에 몰렸다면 거기에 엘리자베스가 가서 얼굴을 비추고 오는 것이 기사거리도 되고 엘린크의 병사들에게는 사기 진작도 될 것이다. 엘리자베스 역시 다니엘이 사실 퀴닌 때문이 아니라 그걸 노리고 여기에 왔을 거라는 짐작을 했다.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그 역병이라는 거 정확하게 증상이 어떻죠? 검은 점이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하지만 다니엘 빌리스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대답했다.

“가서 직접 보시는 게 빠르실 겁니다.”

다니엘 빌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학술원 정문에 세워져 있는 마차를 가리켰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 걸어와 말했다.

“저 작자에게 끌려 다닐 셈이야?”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쉬었다.

“방금 엘우드 밀 선생님이 한 말 못 들었어? 어쨌든 전쟁이 끝나야 우리한테도 미래가 있는 거야. 레트니는…….”

엘리자베스는 레트니의 이름을 말하다가 다니엘을 힐끔 보았다. 다니엘은 자신이 순수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런 미래를 당겨올 사람이라고. 알고 있잖아.”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고통스러운 듯이 얼굴을 가렸다. 케이가 말했다.

“하지만 역병이야. 위험한 곳이잖아.”

“그 정도 접촉으로 위험했다면 벌써 왕립병원이 폐쇄됐겠지. 그런데 식중독에 가깝다며. 일단 보자고. 응?”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엘리자베스는 때를 놓치지 않고 얼른 케이의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케이가 바람 빠진 열기구처럼 축 처지는 것을 본 엘리자베스가 옅게 웃자 케이가 말했다.

“저녁엔 윌슨에게 반드시 가야 돼.”

케이의 말에 다니엘이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제가 공녀님을 에스코트하면 되겠군요. 어렵지 않습니다. 케이 하커 씨와 있는 것보다 훨씬 안전할 테니까요.”

다니엘의 말에 케이가 으르렁거렸다.

“누구한테? 네놈한테?”

“우리 모두한테요.”

다니엘이 말했다. 그러곤 다니엘이 정중하게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잡기 전,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뒷목을 잡아당겼다. 커다란 거구가 엘리자베스의 손에 쉽게 끌려왔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고 말했다.

“이따가 봐. 응?”

* * *

다니엘의 말대로 왕실에서 보낸 마차에는 많은 호위가 딸려 있었다. 마차 뒤에는 뒤쪽에 군인들이 서서 갈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군인들은 총검을 격식 있게 받쳐 들고 뒤쪽을 지키고 말을 탄 보비들이 마차를 따랐다. 엘리자베스가 커튼을 걷고 그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전투가 일어나도 30분은 버티겠네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다니엘이 무료한 눈으로 말했다.

“요새의 리오든에서는 총격전쯤은 각오해야죠.”

다니엘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아까 보비를 죽이려던 행동이 그저 자신을 시험하려던 게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엘리자베스는 다니엘이 괘씸해져서 그를 살짝 노려보았다. 그러자 다니엘이 피식 웃었다.

“그런 눈빛은 뭐랄까…… 케이 하커 씨와 상당히 비슷하군요.”

“어떤 눈빛인데요?”

엘리자베스가 묻자 다니엘이 짐짓 민망한 얼굴을 해보였다. 별로 민망하지도 않으면서.

엘리자베스는 다니엘의 의뭉스러움이 다소 불쾌했다. 엘리자베스가 그를 재촉했다.

“그냥 말해요.”

“……건드리면 문다. 그런 눈빛이랄까요?”

다니엘은 그렇게 말하며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엘리자베스는 웃는 다니엘을 보며 한숨을 내쉬곤 다니엘이 웃음을 멈추길 기다렸다. 그리고 물었다.

“대체 케이와는 왜 사이가 좋지 않으신 거죠?”

“사이가 좋지 않다…… 라. 그것 참 순진한 표현이로군요.”

다니엘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손 안에서 엘리자베스의 바지가 바스락거렸다. 다니엘은 그것을 보더니 말했다.

“아이쿠. 무서워서 말을 해드려야 하나요?”

“뭘요?”

“개새끼는 개새끼를 알아보는 법입니다, 엘리자베스 양.”

다니엘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자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케이 하커 씨는 당신의 개새끼죠. 당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개새끼. 절대 당신을 물지 않고 하지만 때로 엇나간 충심에 헛짓도 하는 개새끼 말입니다.”

다니엘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 말이 모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름대로 진실에 가까웠다.

“내 말이 맞았나 보군요?”

다니엘이 빙그레 웃자 엘리자베스가 달아오른 뺨을 쥐고 톡 쏘았다.

“똑바로 말해요, 돌리지 말고. 국왕 폐하와 케이의 사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죠?”

“그건 아닙니다. 그냥 저는 폐하를 지키는 개새끼고 만약 폐하에게 필요하다면 엘리자베스 양도, 케이 하커 씨도 이용할 용의가 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면전에 대고 이런 말을 하는 다니엘이 조금 소름 돋았다. 그러나 다니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케이도 마찬가지인 것 같더군요. 국왕 폐하마저도 엘리자베스를 위해서라면 이용할 용의가 있죠. 아니, 국왕뿐이겠습니까? 이 나라, 이 국민마저도 이용하고 버릴 생각이 있죠. 여차하면 멜니아로 당신을 데리고 튈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케이가 주었던 가짜 통행증이 떠올랐다.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자 다니엘이 재밌다는 듯이 그녀를 응시했다.

“알고 있군요?”

“……뭘요?”

“당신의 개새끼가 당신에게 얼마나 충실한지.”

엘리자베스는 다니엘이 자신의 속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두 사람의 사이에 관한 질문을 꺼내게 만든 것도, 그리고 그 질문을 통해 자신이 케이의 계획에 얼마나 가담한지 알아보는 것도 이미 계획된 판이었는지도 몰랐다.

엘리자베스는 두려운 얼굴로 말했다.

“왜 우리가 이런 얘기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당신과 나, 그리고 케이와 조지 국왕 폐하께서는 전부 한 편이에요. 지금은 화합해야 하는 때라구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다니엘이 코웃음을 쳤다.

“화합이라. 말은 좋습니다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우리 쪽이 강세일 때는 본보기를 보여줘 확 기를 눌러놔야 할 때도 있는 겁니다.”

“그럼 아까 그 보비를 죽이겠다는 거 진짜였어요?”

엘리자베스가 당황한 얼굴로 묻자 다니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경사 놈은 지금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날뛰고 있어요. 그 경사 놈이 여기저기서 뒷돈을 처먹은 것 같더군요. 리오든에 파견된 군인들, 경찰들 중에 가끔 저런 놈들이 있습니다. 조지 폐하께서 힘을 주니 그 힘이 정말 자신의 힘인 줄 알고 설치는 것들. 은근히 귀족들의 돈을 먹고 수사를 방해하거나 때로는 몰래 귀족들을 도와주는 놈들. 저놈도 그런 놈들 중 하나죠. 며칠 내로 저런 놈들을 한번 싹 뿌리 뽑을 겁니다. 먹은 돈은 토해내게 만들고 횡령이든 업무태만이든…….”

다니엘의 눈동자에 이채가 깃들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안에서 무서운 맹목성을 읽고 몸을 떨었다. 그 맹목은 다니엘의 말대로 조지 국왕을 향한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다니엘의 충정이 무서웠고 다니엘이 저런 정도의 맹목을 가지고도 케이와 다니엘이 같은 종류의 개새끼라고 말하는 게 의아했다. 엘리자베스가 보았을 때 케이는 저런 남자와는 결이 달랐다.

“……반역이든. 다양한 죄목을 더해서 상부의 즉결 재판 하에 처형되겠죠.”

다니엘은 그렇게 말하며 제 쪽의 창문을 쳤다. 그러자 아까의 그 경사가 말을 타고 달리다가 다니엘을 보곤 비굴하게 웃어 보였다. 다니엘은 그런 경사를 향해 인자하게 마주 웃어주었다. 엘리자베스에게는 그 미소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다니엘의 말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그가 그런 수를 저 미소 속에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무서웠다. 엘리자베스는 언젠가 저 미소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길 바라며 마차 좌석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말했다.

“조금 자야겠어요. 도착하면 깨워줘요.”

엘리자베스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자꾸만 오늘 있었던 일들이 맴돌았다.

평민 하녀만 죽이고 돌아다니는 귀족들.

마녀라는 낙서.

붉은 피와 허공에 매달린 여자 시체.

그리고…….

MLK.

엘리자베스는 그녀와 케이의 세계 앞에 놓인 미래가 그런 꼴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후세를 위하여.]

엘리자베스는 아까 학술원 정문을 나올 때 보았던 청동판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가 언제나 어렴풋이 생각해왔던 ‘가설’이 가짜로 밝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나 과거보다는 미래가 더 나은 곳이다.

엘리자베스는 가슴 한 구석이 시려오는 것을 느꼈다.

* * *

엘리자베스는 다이애나 왕립병원에 거의 도착했다는 말에 눈을 떴다. 잠깐 잠을 들기도 했지만 역시나 꿈은 꾸지 않았다.

내내 악몽에 시달려왔을 케이를 생각하며 기분이 좋지 않았다. 특히나 켈크족에 대한 저주에 가까운 단어를 보았을 케이라니.

케이는 갈색 눈동자에 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고고학자들이 정의하는 전형적인 켈크족이었다. 왕족의 피가 섞인 엘리자베스는 혼타니스에 가까웠고.

엘리자베스는 또다시 케이가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이번에는 엘리자베스와 케이 자신이 벌인 것이 아니었고 외부의 상황이 벌인 것이었다. 그래서 더 속이 탔다.

엘리자베스는 마차 커튼을 치고 밖을 보았다. 그러자 드넓은 목초지와 숲이 보였다. 엘리자베스가 오랜만에 보는 자연경관에 조금 향수를 느끼며 다니엘에게 물었다.

“창문을 조금 열어도 되나요?”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다니엘은 친절하게도 직접 창문을 열어주었다. 다니엘은 품 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더니 엘리자베스에게 하나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평소라면 사양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엘리자베스의 코끝을 간질이는 이 나무냄새가 무척이나 달콤하게 느껴졌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도 비릿한 물 냄새, 무거운 나무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엘리자베스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런 냄새를 맡으면 언제나 쉐필드가 떠올라 마음이 답답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달랐다.

쉐필드는 이제 더 이상 엘리자베스의 고향이나 현재가 아니고 과거일 뿐이기 때문일까?

엘리자베스는 그저 이 청량감 있는 냄새들을 즐기기만 하면서 마차에서 내릴 때까지의 짧은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곧 마차가 멈춰 섰다. 보비 하나가 말에서 내리더니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다니엘 빌리스는 먼저 마차에서 뛰어내려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뻗었다.

“가시죠.”

엘리자베스는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기가 무섭게 호송용 마차에서 내리는 환자 하나를 보았다.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환자였다.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까까지의 청량감 있는 나무 냄새가 갑자기 소독약과 땀 냄새, 피 냄새와 같은 병원 냄새로 덮이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진짜로 집에 온 기분이 들었다.

엘리자베스가 결연하게 말했다.

“……들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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