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49화
케이가 엘우드 밀의 창백한 얼굴을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미래의 갸흐통이 어떤 짓을 했는지 아주 약간이나마 알겠더군. 저번 꿈을 꾸고 말이야. 몰록은 켈크족 노예들의 피를 ‘조율’하는 생체실험임과 동시에 인간병기야. 이오페아 대륙을 쓸어버리기 위한 인간병기. 그러니까 MoLoK이라고 이름을 지은 거지.”
“케이……!”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손을 잡으려는 순간 케이가 엘우드 밀 앞에 있는 책상을 쾅 내려쳤다. 엘우드 밀은 어두운 얼굴로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가 말했다.
“당신에게 어떤 사정이 있든 중요하지 않아. 당신은 이런 엄청난 생체실험에 사람들을 동원시켰어. 당신이…….”
“케이 하커! 선생님한테 사정이 있었을 거야! 네 맘대로 사정이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어! 그 피실험자 중 한 명이 선생님의 동생이었고, 선생님은 그 동생을 지키려고 총까지 쏘면서 포로들을 대피시켰어!”
엘리자베스가 소리치자 케이가 움찔했다.
몰록이 된다고 해서 몰록이었던 이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오는 것은 아니다. 종래에 몰록이 된다면 몰록들끼리는 자아와 피아가 불분명해진 상태에서 모든 기억을 가져오는 것 같지만, 아직 케이는 몰록이 아니었다. 케이는 케이였다. 그러니 케이의 기억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도 내가 본 걸 보지 못해서 그래. 환자복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주사를 놓던 이들…….”
케이는 헛구역질이 난다는 듯이 입을 가렸다. 엘리자베스는 아까 케이가 엘우드 밀의 시선을 피하던 것을 떠올렸다.
“너, 어젯밤에 그 꿈을 꾼 거야?”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이가 대답했다.
“꼭 그 꿈만 꾼 건 아니야. 네 꿈도 꿨어. 어린 시절, 쉐필드 지평선 앞에 앉아 있던 너에 대한 꿈. 그 꿈을 꾸고 일어났다가 다시 잠들었을 땐 디트리히 폰의 기억 속의 갸흐통을 보았어. 완전히 생지옥이 따로 없었지.”
케이의 대답에 엘리자베스가 흠칫했다.
그러니까 오늘 새벽에 케이는 동이 터오는 레트니 애비뉴를 보면서 엘리자베스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케빈은 엘리자베스와 케이, 그리고 엘우드 밀의 대치 상태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MLK라니. 인종주의라니. 이거 지금 미래 얘기 맞죠? 한 100년 쯤 전에 부족 국가들끼리 싸우던 때의 이야기 아니고?”
케빈의 물음에 엘우드 밀이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니라고…….”
“선생님.”
엘리자베스가 부르자 엘우드 밀이 손사래를 쳤다.
“걱정하지 마라. 그때처럼 뛰쳐나가지 않을 거야. 케이 하커의 말대로 난 개자식이고, 어떤 사정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는 실험에 참여한 건 맞아. 하지만 MLK에 담긴 뜻은 기억이 안 나서 잘 몰랐지만…… 그게 정말 그런 뜻이라면……. 나 역시 혼타니스인 건 절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케이 하커.”
케이는 엘우드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지?”
“무슨 말이겠냐. 나 역시 국가에서 ‘조작’한 혈통을 가진 인간이라는 거지. 뻔하지 않냐. 내가 왕족일리는 없고 분명히 이런저런 더러운 짓을 해서 초록색 눈, 하얀색 피부, 백금발의 머리카락, 전부 열성인자만 모아놓은 나 같은 인간을 만들어냈겠지.”
케이는 이를 아드득 갈았다.
“지금 댁도 피해자라는 말이 하고 싶은가?”
“그래. 정답이야.”
“이봐!”
“내가 피해자이기 때문에 남들에게 그런 실험을 하는 걸 찬동한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야!”
엘우드 밀은 케이의 분노한 눈을 보며 소리쳤다. 엘우드 밀의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내가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자이기 때문에 나도 알고 있다는 거야. 이 세상이 인종주의에 물드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날 봐. 난 내 하나뿐인 가족도 잃고 다신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머나먼 과거 땅에 내던져졌어. 그러니까 이제부터 너랑 너.”
엘우드 밀은 케이와 엘리자베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너네 둘은 열심히 레본을 레트니로부터 지켜야 된다. 나랑 얘.”
엘우드 밀은 케빈과 자신 또한 가리켰다.
“둘이 치료제를 만드는 동안…… MLK라는 실험이 특정인종을 대상으로 했다는 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다만 당장 치료제를 만드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아. 내 기억을 되살리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은 것 같고.”
엘우드 밀은 씁쓸한 얼굴로 케이가 적은 종이를 자신의 쪽으로 회수해 갔다. 엘우드 밀은 Modify Low Kelkblooded라는 글자를 뚫어지게 보다가 그것을 가슴팍에 안았다. 엘우드 밀의 표정은 아까처럼 창백하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결연해 보였고, 엘리자베스에게는 그 사실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에게 손을 뻗으려고 했지만 케이가 잡아당겼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위로해주지 마. 어떤 이유로든 위로받을 이유가 없는 인간이야.”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슴이 이렇게 답답해지는 것을 막을 도리 역시 없었다.
* * *
아무 성과를 얻지 못한 엘리자베스와 케이는 도서관 문을 나서서 회랑이 있는 1층 복도로 다시 걸어왔다. 저 멀리 잔뜩 모여 있는 보비들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아까의 안 좋은 기억 탓에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이내 보비들 사이에 서 있는 다니엘 빌리스를 보고 긴장이 또 다른 긴장으로 완화되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다니엘 빌리스가 자신을 알아보는 거리에 오자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다니엘은 예의 다정한 미소를 띠며 케이와 엘리자베스에게 인사했다.
다니엘이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 강의에서 아주 불미스러운 일이 있으셨나 보군요?”
다니엘은 그렇게 말하며 아까 엘리자베스에게 건방지게 굴던 보비를 가리켰다. 엘리자베스는 얼굴이 잔뜩 찌푸려진 보비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네, 뭐…….”
다니엘은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가만히 보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고는 품 안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어 보비의 턱 끝을 겨눴다. 보비의 눈에 잔뜩 두려움이 서렸다. 엘리자베스가 놀라서 말했다.
“뭐 하시는 거예요?”
“뭐 하긴요. 업무태만이 아닙니까. 국왕 폐하께서 엘리자베스 양을 지키라고 하셨고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건 사실 태만도 아니라…… 반역에 가깝습니다. 요새의 상황에서는.”
다니엘은 칼끝을 보비에게 겨눈 채 눈을 반짝였다. 보비가 벌벌 떨며 말했다.
“자, 잘못했습니다, 다니엘 경. 하, 한번만 자비를…….”
“경사. 지금 너는 네 목숨에 자비를 구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반역이라면 네 어린 아들과 아내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나마 나에게 부탁해야지.”
그 말에 보비가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흘렸다. 보비는 한참 고뇌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아들과 아내만이라도…….”
엘리자베스는 보비의 눈물을 보면서도 그가 불쌍하다든가 하는 기분은 조금도 느끼지 못했다. 저 경사에게 아내와 아들이 있다는 사실은 조금 놀라웠지만.
어쨌든 저 경사는 지금은 강한 사람 앞에 있기에 바들바들 떨며 두려워하는 척을 하지만 당장이라도 아까처럼 자신에게 남을 이용할 권리가 주어진다면 다시 그걸 무기로 돈을 뜯어내거나 자신의 이득만 챙길 것이었다.
하지만—
다니엘의 칼끝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엘리자베스가 얼른 다니엘에게 말했다.
“그만, 그만 하세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다니엘이 흥미롭다는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왜입니까?”
“왜냐구요? 당연한 걸 물어보셔야 되나요?”
엘리자베스가 황당해서 되물었다. 다니엘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턱짓으로 학술원 창문 너머로 엘리자베스와 케이, 다니엘과 보비의 상황을 흥미롭게 관전하는 이들을 가리켰다.
“오늘이야 그냥 모욕을 좀 당하셨지만 앞으로 저들이 얼마나 엘리자베스 양에게 해코지를 하려고 들지 모를 일입니다. 이런 식으로 한 번 본보기를 보여 기를 죽여 놓아야 엘리자베스 양의 앞으로의 생활이 조금이나마 편해지실 텐데요?”
다니엘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거 알고 계시잖아요. 본보기를 보여 기를 죽여 놓는 것, 그게 바로 오늘 아침 레트니 애비뉴에서 일어난 일이죠. 그런데 반대로 이쪽에서도 기를 죽여 놓으려고 이 사람을 죽인다고요? 그건 피가 피를 부르는 거잖아요. 지금 리오든은 안 그래도 반쪽으로 붕괴되고 있어요.”
다니엘은 동의할 수 없다는 눈으로 말했다.
“글쎄요. 반쪽이라니…… 그건 좀 수치상 맞지 않는 말이죠. 조지 국왕 폐하의 편과 아닌 편. 둘 중 누가 리오든에 많겠습니까?”
하지만 그러면서도 다니엘은 단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러자 보비가 바들바들 떨면서 동료의 품으로 쓰러졌다. 동료는 보비를 질질 끌고 학술원 밖으로 나갔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보면서 다니엘에게 말했다.
“여기 왜 오셨어요? 케이를 보러 오셨나요?”
다니엘은 케이와 눈을 마주치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요. 아닙니다. 케이 하커 씨와 하루에 두 번이나 대화를 나누는 일은 정말이지…… 좀 피하고 싶군요.”
“누가 할 말을.”
케이가 응수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다니엘이 왜 이렇게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지 의아했다.
엘리자베스가 몇 번 보지는 않았지만 다니엘은 제 주군을 지키는 것 외에 다른 것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케이는 조지의 편이었다. 그런데 다니엘이 케이와 척을 질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엘리자베스가 답을 찾지 못하는 사이 다니엘이 말했다.
“토닉워터를 군수물자로 먼저 엘린크에 내려 보내는 일에 대해 들으셨을 겁니다. 엘리자베스 양.”
다니엘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다니엘이 케이와 엘리자베스 사이에 비밀이 없다는 사실을 꿰뚫어보게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뭔가를 꿰뚫어본 사람들 특유의 음험함 같은 것은 티끌만큼도 없이 담백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퀴닌에 조금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우스리오든에서 엘린크로 가는 중간 지대에 있는 다이애나 왕립병원에서입니다.”
“거기서 뭐가요?”
“그곳에서 학질 환자 하나가 퀴닌을 처방받은 뒤에 몸에 수포 같은 게 났다고 하더군요. 그것 때문에 왕립병원이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퀴닌의 부작용이 아니냐고요.”
다니엘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제가 볼 때 이상증세라기 보다는 치료 과정에서 다른 병에 감염…….”
“……그런 의학적인 얘기를 하기 보다는 왕립병원으로 일단 같이 가시죠. 가셔서 거기에 있는 환자는 물론이고 남부에서 열심히 싸우다 실려 온 병사들의 사기도 좀 북돋아 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다니엘의 말에 케이가 비릿하게 웃었다. 케이는 다니엘을 노려보며 앞으로 나왔다.
“개소리.”
케이의 말에 다니엘이 피식 웃었다.
“개가 개소리를 하지 무슨 소리를 합니까?”
“넌 지금 그냥 엘리자베스 클레몬트를 데리고 병사들이 입원해 있는 왕립병원에 가고 싶은 거잖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