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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48화 (248/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48화

“결국 물질의 방사능을 약화시키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의미잖아요? 그쵸?”

엘리자베스가 묻자 엘우드 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람 몸에 있는 다른 세포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정도로 독성을 줄이는 방법이 제일 큰 문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원자에 있는 더 작은 알갱이가 가속되고 에너지가 높아진 상태로 인체의 심부에 접근해야 돼. 일단 지금 이 치료기기는 그렇게 구조되어 있다.”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에게 사용한 적이 있는 치료제의 기기를 세 사람 앞에 내밀었다. 그 치료제는 특수한 유리병에 들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원자보다 더 작은 알갱이요?”

“그래.”

엘우드 밀은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케빈이 끼어들었다.

“원자보다 더 작은 알갱이가 어디에 있어요? 원자설이라는 것도 사실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판에!”

케빈의 말에 엘우드 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제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래! 네놈들이 이렇게 말할 줄 알았어! 네놈들이 이렇게 말하니까 정말 여기가 멍청한 고대인들이 사는 고대 국가라는 걸 알겠다!”

케빈은 엘우드의 말에 벌컥 소리를 질렀다.

“어허이! 본인도 딱히 모든 기억을 찾은 것도 아니면서! 지금 이 고대인들의 지식수준밖에 없잖아요, 삼촌도!”

그 말에 엘우드 밀이 얼굴을 구기며 소리쳤다.

“허 참! 원자를 구성하고 있는 건 크게 양성자, 중성자, 전자가 있다고!”

엘우드 밀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엘리자베스와 케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사람 사이에 침묵이 지나갔다. 엘리자베스와 케빈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이 놀란 눈으로 서로를 응시하는 사이에 케이가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면서 역시나 놀란 눈의 엘우드 밀을 보았다.

케빈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바, 방금…… 뭐라고요?”

엘우드 밀은 자신이 더 놀란 눈으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양성자, 중성자, 전자……. 핵…… 전자…… 음이온…….”

엘우드 밀의 중얼거림에 엘리자베스와 케빈은 서로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지금 선생님이 뭐라고 한 거야……?”

“글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무슨…… 양성자? 양성자라고 하지 않았어?”

엘리자베스가 얼굴을 구기자 케이가 옆에서 엘리자베스의 팔을 잡아당기며 중얼거렸다.

“왜 그래? 뭔데?”

하지만 엘리자베스와 케빈 중 그 누구도 케이에게 원자나 원자를 쪼갠 더 작은 물질 따위의 설명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그건 케이가 이해하지 못할 게 분명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고 엘리자베스와 케빈의 지식수준이 아직 원자론을 믿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엘우드 밀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내가 이걸 어떻게 알지?”

엘리자베스는 왜인지 참담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선생님이 있던 미래에서는 원자보다 더 작은 알갱이를 발견했나 보네요.”

“근데 넌 표정이 왜 그렇고?”

엘우드 밀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가 시무룩한 얼굴로 도서관 안에 있는 수많은 책들을 둘러보았다.

왕립학술원 도서관에 있는 장서는 총 4000질 정도다. 대부분이 학회에서 발행한 논문집 따위가 많으니 장서 숫자로 따지면 그 양이 어마어마할 것이다. 물론 모든 장서들이 이 책장에 나와 있는 것은 아니고 오래된 책들은 따로 지하 보관실에서 햇빛을 보지 않도록 고이 모셔져 있다고도 들은 적이 있었다.

오래된 책들 중에는 100년 가까이 전의 책을 사서들이 부식을 염려해 필사해 놓은 것들도 있었다. 100년이라면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아도 사실 100년 전에는 지구가 평평하고 이 평평한 지구의 물들이 전부 쏟아지는 폭포 같은 곳이 세상의 끝에 있다는 얘기를 담아둔 책들도 존재했다.

사실 과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 거짓이다.

엘리자베스는 레본의 과학의 첨단이라는 이곳 학술원 안에서 과학적 사실이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어제는 사실이었던 것이 오늘은 거짓으로 밝혀지고 내일은 또다시 새로운 사실이 등장한다.

과학자들의 논쟁 장이란 사실 전쟁터와 같은 게 아닐까? 엘리자베스가 늘 하던 생각이었다.

그리고 지금 엘리자베스의 앞에서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엘우드 밀은 그 수많은 논쟁들이 휩쓸고 간 뒤, 피투성이가 된 병사들의 갑옷 사이에서 살아남은 사실들을 포착해버린 미래인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지금은 신봉하고 있는 아군의 기조도 엘우드 밀이 기억만 찾는다면 손쉽게 거짓으로 탄로 날 것이며 사실은 엘리자베스를 포함한 모두가 터무니없는 과학적 가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음이 드러날지도 몰랐다.

지금 이 도서관에 있는 수천 권의 장서는 그 전쟁터에서 용맹하게 싸우고 있는 장수들이 쓴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장서들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갑자기 의욕이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사실 지금 원자가 있니 없니 하는 소리를 하며 싸우고 있는 건 미래에 가면 비웃음을 살 논쟁거리가 될 거잖아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세 사람이 하는 소리, 나한테는 전부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후세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보다 더 발전된 지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건 전부 우리 덕분이잖아. 왜 시무룩해?”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저었다.

“꼭 그렇지 않아. 어떤 과학자들은 평생 삽질만 하다가 끝나기도 한다고……. 그런데 선생님은…… 그 삽질의 끝에 아무것도 없는지, 아니면 금괴가 묻혀 있는지 알고 있는 거야.”

엘우드 밀은 그 말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나도 다 기억이 나는 건 아니야. 양성자, 중성자, 전자. 그래. 이건 기억이 난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기억이 나. 뭔가 이거에 관련된 걸 조금 더 읽으면 기억이 더 날 것 같기도 한데……. 어쨌거나 시무룩해할 것까진 없잖냐? 어차피 나도 미래로 갔다면 거기선 바보 취급을 당했을 거야.”

“지금 절 바보 취급하신다는 말이세요?”

엘리자베스가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엘우드는 엘리자베스에게 과학을 처음으로 접하게 하고 가르쳐준 훌륭한 스승이었지만 이럴 땐 영락없는 재수 없는 놈이었다.

“그럼, 당연하지. 네가 바보가 아니면 뭐냐?”

입을 떡 벌린 엘리자베스는 당장 엘우드 밀에게 뭔가를 던지려고 주변을 뒤졌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잡아 채서 자신의 쪽으로 가까이 끌어온 다음 흥분한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씨익 웃었다.

“어떻게, 내가 처리해줄까? 네가 폭력을 쓰게 허락만 해주면 당장 저 자식을 교회 첨탑 위에 달아줄게.”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엘우드 밀을 보았다. 엘우드 밀은 한 달 쯤 전에 케이에게 얻어맞았던 곳을 손으로 문지르며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는 엘우드 밀의 분노 따윈 우습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그런 건 쉽고. 어쨌거나 내 생각은 이래. 미래의 놈들이 꼭 과거보다 나은 놈들이라는 법은 없다는 거지. 노력하지 않으면 저렇게 오만방자해지고 또 몰록이니 뭐니 하는 무시무시한 것들도 만들게 되지.”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의 손과 허리를 놔주었다. 케이의 말에 엘우드 밀의 표정이 한층 험악해졌다.

“너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

“네. 들으라고 하는 소립니다. 저도 꿈속에서 기억 하나를 찾았거든요.”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뭔데? 치료제에 관한 거야?”

“아니.”

케이가 대답했다.

케이는 엘우드 밀이 가지고 있던 노트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더니 엘우드 밀이 들고 있던 펜촉이 다 망가진 만년필을 잡아채서는 노트 끄트머리에 이렇게 썼다.

[MLK]

케이의 글씨를 보던 엘우드 밀이 얼굴을 구겼다.

“MLK. 이게 뭐야?”

엘우드 밀의 표정을 가만히 보던 케이는 제 턱을 만지작거리며 오히려 되물었다.

“무슨 뜻인지 모르시겠어요? 기억나는 건요?”

“전혀 없는데?”

“……그럼 말해드리죠.”

케이는 MLK라고 쓴 자신의 글씨 밑에 이렇게 썼다.

[M odify(수정하다)

L ow(열등한)

K elkblooded(켈크족의 피를 가진 자들을)]

“켈크족?”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리고 있을 때 케이가 Mo와 Lo, 그리고 마지막으로 K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걸 보던 엘우드 밀의 표정이 굳어졌다. 케빈이 엘우드 밀의 옆에서 고개를 내밀고 케이가 동그라미 친 부분들을 보았다.

[Mo Lo K]

“몰록……?”

케빈의 말에 엘우드 밀이 갑자기 이마를 짚었다.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는 엘우드 밀의 하얗게 질리는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몰록이 신화 속에 나오는 악마의 이름을 딴 건 줄 알았는데, 어제 꿈을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그건 열등한 켈크족의 피를 가진 자들을 제 입맛에 맞게 수정하겠다는 미래인들의 욕망이 담긴 실험 명칭이었습니다. 이걸 보고도 정말 기억나는 게 없나? 엘우드 밀 동무?”

케이의 말에 엘우드 밀의 얼굴이 더 새파랗게 질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들으며 자신도 손가락이 저릿해지면서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켈크족이라면 이오페아 대륙, 그 중에서도 선더렌과 레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갈색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를 가진 인류를 칭하는 말이었다. 물론 이제 와서는 그런 식으로 인종을 분류하는 게 큰 의미가 없지만 선더렌과 레본을 포함한 이오페아 대륙 대부분의 왕족들은 근친혼을 통해 혼타니스 혈통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왕족이라면 엘리자베스처럼 금발 머리카락에 푸르거나 초록색인 눈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인종 분류가 현대에 와서는 의미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고고학자들과 그에 선동당한 귀족들은 갈색 머리카락, 갈색 눈동자를 가진 노동자들은 더러운 켈크족의 피가 섞였고 왕족의 피가 섞인 귀족들은 대부분 눈이 파랗거나 초록색이라며 구분 지으려고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왕립학술원에 와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접하면서 그런 말들이 얼마나 비논리적인 믿음인지 알게 되었다. 갈색 눈동자는 우성이었고, 그래서 갈색 눈동자를 가진 어머니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나 할머니만 있더라도 우성인자는 쉽게 발현되었다. 그러니 갈색 눈을 가진 노동자들 중에서도 혼타니스의 피가 섞인 자들이 분명히 있다는 뜻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불안감에 손에서 땀이 배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Modify라는 글자 앞에 그대로 시선을 고정했다. ‘수정하다’, 혹은 ‘변형하다’라는 뜻을 가진 이 글자는 분명 혈통 따위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자꾸만 엘리자베스의 머릿속에는 일전 꿈속에서 보았던 혼타니스 어린 아이들로만 이루어진 보육원이 어른거렸다.

인간 공장.

엘리자베스는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미래가 과거보다 낫지 않을 수도 있다.

케이의 말이 이보다 더 와닿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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