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47화
한참을 안고 있던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엘우드 밀과 치료제 얘기를 하고 가자고 했다. 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데리고 도서관으로 가다가 우뚝 멈춰 서서 물었다.
“조지 국왕이 왜 너를 부른 거야?”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이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 표정에 엘리자베스는 별로 좋지 않은 소식이 원인이었다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케이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엘린크 성 안에 사상자가 났다는 군. 염소를 잘못 먹은 병사들이 병에 걸렸다는데…….”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몇 명이나?”
“열 명 정도.”
케이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엘리자베스 역시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열 명의 사상자는 숫자만 생각한다면 별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전쟁 상황에서 사상자는 아무리 작은 숫자라도 사기에 영향을 미쳤다. 아니나 다를까 케이가 말을 이었다.
“문제는 시체 몸에 검은 점 같은 게 있었는데 그게 시체들 대부분에서 발견됐나 봐. 적군에서 그걸 신의 저주라고 부르고 자신들에게 신의 가호가 따른다고 말하는 것 같더군. 아군 병사들은 그런 말을 믿는 건 아니더라도 레트니가 자신들이 먹을 음식에 독 같은 걸 탈 수 있다고 생각해서 두려움에 떤다고 해. 레트니의 식량이 떨어지려면 한참 남았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사기가 떨어져서는 곤란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절박한 상황이 되면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인, 평소라면 절대 믿지 않았던 것들에까지 의존하게 된다. 심령과학회 부스 놈들은 그것을 이용한 것이다.
그런데 목숨이 달린 전쟁 상황이란 당연히 병사들로서는 가장 절박한 상황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작은 이상 징후나 기상변화에도 자꾸 그걸 어떠한 징조라고 말하며 믿는 자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조금 우울해졌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잡아당기며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왜 그래? 어쨌거나 넌 내가 지켜. 알고 있잖아.”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살짝 웃고 말았다.
하지만 속은 쓰렸다. 리오든에서 평민과 귀족이 분열되고 있듯이 전선에서 병사들도 분열하고 있었다. 이런 지리멸렬한 싸움에서는 언제나 먼저 분열하는 쪽이 위험하다.
“그래서 조지는 왜 널 불렀지?”
엘리자베스는 자꾸만 엉겨 붙는 케이를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케이는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토닉워터 말이야. 그게 일종의 건강음료잖아. 많은 양을 생산해서 병사들에게 보낼 수 있으면 좋겠대. 제철소에서 나오는 신식무기들도 엘린크 성에 우선 공급하고.”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연히 그러겠다고 했겠지?”
“당연하지. 문제는 윌슨인데……. 윌슨한테 정강이를 몇 대 얻어맞으면 3일 안에 해주겠지.”
케이가 피곤하다는 듯이 어깨를 주물럭거렸다. 엘리자베스는 그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윌슨이 널 때리기도 해?”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순진한 말에 쿡쿡 웃었다.
“당연하지. 그 노인네가 어렸을 땐 툭 하면 사람을 그 지팡이로 때려서 여기저기 멍들기 일쑤였어. 그 지팡이 말이야. 그거 노인네 걸음걸이 보조용이 아니고 사실 그냥 이 사람 저 사람 패려고 가지고 다니는 거야.”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입을 가렸다.
“진짜 어린 애들을 때렸단 말이야?”
엘리자베스의 미간이 찌푸려지자 케이는 조금 당황했다. 왜 이렇게 놀라는 거지? 케이는 농담을 해서 엘리자베스를 웃겨주려던 소기의 목적이 조금도 달성되지 않자 고개를 갸웃했다.
“남자들끼린 원래 친근함의 표시로 맞기도 하고 맞아주기도 해.”
“여자들끼린 안 그래.”
엘리자베스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그녀는 곧 아,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그럼 아까 조셉한테 한 짓도 진짜 친근함의 표시야?”
“미쳤어?”
“그럼 아까 그거랑 네가 자꾸 미리엄이나 에드워드의 뒤통수를 때리는 건 무슨 차이야? 내가 볼 땐 별로 차이가 없어.”
케이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볼 땐 차이가 커. 그리고 에드워드를 때린 건…….”
케이는 차마 말을 잊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헝클였다. 가끔 엘리자베스와 같이 있으면 바보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남자들끼리 약한 폭력은 유대감을 만들어줘.”
“폭력은 자라나는 습성이 있어. 원래 작은 폭력이 자라나서 큰 폭력이 되는 거야. 남자들이 폭력을 통해 유대감을 형성한다면 그건 남자들이 미개하다는 뜻이겠지?”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엄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케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엘리자베스를 철없는 아가씨처럼 보았다.
“너도 내 뺨을 때리거나 가슴을 때리는 건 수없이 하잖아. 난 그게 유대감의 표시라고 봤는데? 특히나 침대에서는.”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동그래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정강이를 발로 찼다. 케이가 장난스럽게 윽, 소리를 내며 허리를 동그랗게 말았다.
“이것 봐. 내가 좋으니까 이러지.”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시끄러워!”
엘리자베스는 귀를 틀어막고는 새빨개진 얼굴로 도서관까지 잰 걸음으로 걸어갔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단 두 걸음 만에 따라잡고는 귀를 가린 엘리자베스의 손을 내렸다. 그러고는 엘리자베스의 빨개진 눈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군가를 때리는 게 싫어?”
엘리자베스는 빨개진 얼굴로 웅얼거렸다. 케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뭐라고?”
“……네가 맞는 게 싫어!”
엘리자베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케이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케이의 귀가 새빨개졌다.
케이는 한껏 달아오른 얼굴로 한쪽 팔로 제 입을 막았다. 케이의 빨개진 얼굴을 보며 엘리자베스가 퉁명스레 말했다.
“네가 맞는 것만큼 때리는 것도 싫긴 해. 그래도 솔직히 네가 맞는 게 좀 더 싫긴 하지만……. 어쨌든 미리엄이랑 에드워드한테 좀 잘 해줘. 때리지 말고. 그 사람들은 널 때리지 않잖아. 윌슨은 널 때린다고 했지만…… 그래도 반격하지 마. 그냥 때리지 말라고 해. 내가 대신 말해줄까?”
엘리자베스의 진지한 눈동자를 보며 케이는 생각했다.
엘리자베스는 이렇게 진지할 때가 귀엽다.
케이가 귀엽다고 생각해본 생명체는 별로 없었다. 미숙하고 무디고 약해 보이는 것. 케이는 그런 성질들을 혐오하는 편이었다. 그러므로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보면서 귀엽다는 감정을 처음 깨달아가는 중이었다.
케이는 남자들만 모인 집단에서 자라왔고 언제나 약한 것은 나쁜 것이라 배워왔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를 볼 때면 약한 것은 나쁜 게 아니라 그냥 약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 미숙하고 무디고 약해 보이는 것이 용기를 내거나 힘을 내면 그것만큼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리고…….
너만큼 사랑스럽고…….
너만큼 내가 독점해보고 싶었던 것도 없다.
케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에드워드를 때린 건 유대감 때문이 아니야. 실토하지. 내 오래된 지기도 네 옆에 있으면 너한테 꼬이는 하루살이쯤으로 보여. 너한테 닿을 수 있는 것, 너한테 말 걸 수 있는 건 나뿐이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하지만 네가 싫다고 하면 그것도 하지 않지. 네 말대로 넌 가질 수 있는 물건 같은 것도 아니고 또 난 네 맘에 들고 싶으니까. 네가……. 날 맘에 들어 해서 영원히 날 가졌으면 좋겠으니까.”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눈이 커졌다. 엘리자베스가 놀라서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드르륵— 오래된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익숙한 소년이 엘리자베스에게로 달려왔다.
“엘리즈!”
“케빈!”
엘리자베스가 케빈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이었다. 케빈이 케이를 보지 못하고 엘리자베스의 얼굴부터 그러쥐었다. 케빈은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엘리자베스의 뺨을 잔뜩 눌러버리고 말했다.
“괜찮은 거예요? 네? 아니 수업 때 그 난리가 났으면 나를 불렀…… 크헉!”
케빈은 차마 다음 말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벽에 밀어붙여졌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멱살을 잡고 벽에 짓눌러버린 케이 하커를 보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어딜 감히 손을 대?”
케이 하커의 목에서 짐승들이 적을 만났을 때나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자베스는 잔뜩 울상을 짓고는 케이의 손을 찰싹 때렸다.
“방금 그랬잖아! 이런 짓 안 한다고! 방금! 5초 전에 그랬잖아! 어?!”
엘리자베스의 외침에 케이가 엘리자베스와 케빈을 번갈아 보았다. 케빈은 컥컥거리며 엘리자베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사, 살려…….”
“…….”
케이는 케빈을 노려보더니 손에서 힘을 풀었다. 케빈이 컥컥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케빈은 원망스러운 눈으로 케이에게 외쳤다.
“이 미친 인간! 짐승! 야만스러운 놈!”
“놈?”
“아니…… 분!”
케빈이 외치자 케이는 손가락을 바지에 닦는 시늉을 하며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케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케이가 말했다.
“이제 안 해. 정말.”
“……거짓말. 네 말을 믿는 게 아닌데.”
엘리자베스의 말에도 케이는 오만한 표정을 지을 뿐 뭐라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결국 또 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때 열린 문으로 누군가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엘우드 밀이었다. 그는 쓰러져 있는 케빈과 엘리자베스, 그리고 케이를 보더니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하이고. 또 난리를 치고 있구나. 케이 하커, 학술원에 들어와 소란을 피웠다지?”
케이는 엘우드 밀의 말에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케이는 어쩐지 엘우드 밀의 시선을 피하는 눈치였다.
“피울 만했소.”
“……그랬겠지. 누가 뭐래냐? 들어와라. 치료제 얘기를 좀 하자. 도서관에 아무도 없어. 요새 도서관에서 공부할 정신머리가 박힌 놈들이 없는 모양이야. 상황을 골라가며 공부를 하다니, 요즘 애들은 아무래도 대성하긴 그른 것 같다.”
엘우드 밀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가장 먼저 케빈과 케이를 두고 엘우드 밀을 따라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엘리자베스가 투덜거렸다.
“요즘 애들이라니……. 그 말 되게 이상한 거 아세요? 선생님은 미래에서 왔잖아요. 선생님 입장에서 생각하면 사실 우리는 일종의 조상님 같은 거라구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뒤에서 케빈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맞네!”
케빈의 말에 엘우드 밀이 케빈을 쓱 노려보았다. 케빈은 아까 케이에게 잡힌 멱살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엘우드 밀은 케이에게 의자 하나를 빼주며 말했다.
“앉아. 치료제에 관해서 내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 같으니까.”
“……!”
그 말에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변했다. 엘리자베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이에요? 뭔가 생각이 나신 거예요?”
“아니, 기억이 아니라 이건 순전히 삽질의 결과야. 내가 직접 해낸 거라고 할 수 있지.”
엘우드 밀은 특유의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케이가 자리에 앉았다. 엘우드 밀은 자신의 새로운 연구 결과를 세 사람 앞에서 털어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