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46화
“케이!”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손을 잡았지만 케이는 이미 보비에게 위협적으로 가까이 걸어간 후였다.
거구의 케이는 보비를 아래로 찍어 누르듯 내려다보며 말했다.
“범인을 잡았는데 처벌할 수가 없다. 근거가 뭔가? 경사?”
“그, 그건……. 그건…… 고의성이 엿보이지 않기 때문에…….”
“고의성이 엿보이지 않는다뇨! 저건 명백한 살해 협박입니다!”
뒤에서 패트릭이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케이는 그런 패트릭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에 긴장한 패트릭은 입을 다물었다. 케이가 보비를 가는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다는데?”
“어허이. 살해 협박이라니. 뭐 솔직히 내 장난이 과했던 건 인정해. 하지만 학술원 내에서는 가끔 학생들끼리 이런 저런 장난을 하기도 한다고. 특히 죽은 쥐의 피를 뿌리는 것은 시험을 잘 보라고 기원해주는…….”
그때 조셉이 저 뒤에 숨어 있다가 나와서 헛기침을 하며 항변했다. 엘리자베스는 조셉의 뻔뻔함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보비들은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조셉이 뒷돈을 찔러준 것 같았다. 케이는 조셉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조셉을 내려다보았다.
“과학자가 참으로 미신을 좋아하는군, 조셉. 그래……. 네 이름이 조셉이었지. 오랜만이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흐르는 살기를 느끼며 생각했다.
오랜만이라고? 케이가 조셉을 언제 봤길래?
엘리자베스가 흐릿한 머릿속을 뒤져봤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에게는 더 생각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케이가 다음 순간 조셉의 멱살을 쥐고 엘리자베스와 보비들, 그리고 학술원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이 개 같은 자식아.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제대로 들어. 하일 강 유역에 너도 가보면 알게 될 거다. 거기에 이름을 모를 시체가 얼마나 많은지 말이야. 대부분은 악어에게 뜯어 먹혀 얼굴 같은 건 알아볼 수도 없지. 나는 노스리오든 거리에서 네가 보이면 당장 너를 내 마차에 끌고 들어가서 죽도록 패주고 생 고문을 한 다음 네 얼굴을 난도질해서 피 칠갑을 만들어 하일 강에 던질 거다…….”
“어어, 케이 하커 씨!”
케이의 말에 조셉의 얼굴이 점점 희게 변했다. 케이의 얼굴에는 장난기나 허세라곤 조금도 없었고 조셉은 종잇장처럼 쉽게 케이의 손에 끌려 다녔다.
보비가 그 모습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케이는 보비의 만류에도 거침없이 제가 하려던 말을 했다.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 네 주위로 악어 떼가 몰려들 거야. 사람 고기 맛을 봐서 사람 피 냄새는 귀신 같이 알고 모이거든, 그 녀석들이.”
“이봐요! 이봐, 여기 좀 말려봐!”
보비가 소리치자 다른 보비가 케이의 손에서 조셉을 내려놓으려고 했다. 케이의 눈빛에 조셉은 바들바들 떨다가 어느새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보비가 케이의 손을 잡으려고 하자 케이가 한 손으로 손쉽게 보비의 가슴팍을 떠밀어버렸다. 보비가 쉬이 날아가는 것을 본 신사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케이가 말했다.
“그럼 넌 순식간에 조각조각 나서 네 팔 하나는 한 놈 배 속에, 네 다리 하나는 또 다른 놈 배 속에, 그리고 네 코랑 입술은 그 옆에 모여든 작고 귀여운 물고기들의 배 속에 들어가겠지. 응? 어때? 기분이 어떠냐고!”
쓰러졌던 보비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총검을 빼들었다. 케이는 코앞에 겨눠진 칼날을 보며 조셉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비릿하게 웃으며 보비의 총구멍을 잡았다.
“이거 왜 이래? 난 그냥 장난을 좀 친 거야. 원래 젠트리끼리는 장난을 이따위로 친다고. 사내들끼리 이런 장난에 졸아서 되겠어? 엉? 조셉. 일어나서 말을 좀 해봐…….”
케이는 그렇게 말하더니 구둣발로 엎어져 있는 조셉을 찼다. 조셉은 끽 소리도 하지 못하고 몸을 웅크렸다.
당황한 얼굴의 보비는 그저 케이를 보았다. 케이와 눈이 마주친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며 고개를 저었다. 케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보비가 쥔 총구를 자신의 심장께에 가져다댔다.
“저, 저기…… 무, 물러나세요!”
“왜? 쏘게? 네까짓 게 어떻게 나를 쏠 수 있나? 설마 내가 지금 조셉을 살해협박이라도 했다고? 장난이라니까. 왜 이래, 경사. 정신 차려.”
케이는 총구 앞에서도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눈으로 경사의 뺨을 툭툭 건드렸다. 경사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때였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가슴을 떠다밀었다. 놀란 보비가 총구를 내리며 뒤로 물러났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살짝 매달려 있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복도를 걸었다.
* * *
1층 회랑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손을 뿌리치곤 케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쁜 자식……!”
“나한테 하는 말이야?”
“그래! 너한테 하는 말이야!”
“미쳤어?”
케이가 버럭 소리 질렀다. 엘리자베스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케이에게 원망스레 말했다.
“그때도 너였지?”
케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언제?”
“가면무도회에서 네가 조셉을 반쯤 죽여놨다는 얘기 들었어. 조셉은 하커 가문에 따질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생각해보니까 그때도 너였던 거야. 그때 난 그게 전부 앰버 모건을 위해 한 일인 줄 알았는데…….”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그런 순간에만 나타날 수가 있어?!”
케이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순간에 내가 없으면 어떻게 할 건데?”
“어떻게 하다니? 너 지금……. 내가 저런 무뢰배 하나 해결할 수 없는 약골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찮은 사람이라고…….”
케이는 이를 아드득 갈았다.
“감히 널 그렇게 말하지 마.”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엘리자베스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들었다.
“하지만 넌 언제나 내가 창피할 때만 나타나잖아……. 가면무도회에서도…… 지금도…… 나도 잘 할 수 있었다고. 나름대로…… 조셉을 혼내줄 수 있었어. 그땐 나한테도 몰록의 힘이 있었고…….”
“하지만 너는 그런 힘 같은 거 사용하지 않았겠지. 나 같은 개자식이 아니니까, 너는.”
케이가 비꼬았다.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나도…… 나도 보비한테 따질 수 있었단 말이야…….”
엘리자베스의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너무 창피해.
왜 나는 나한테 일어난 일들을 혼자 해결할 수 없을까? 한 시간 반 전만 해도 나도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에 휩싸여 있었는데—
케이가 하는 말에는 왜 다들 벌벌 떨고 엘리자베스가 하는 말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까.
가슴이 너무 답답해져왔다. 엘리자베스는 자리에 주저앉으려고 했다. 그러자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잡아당겼다.
“주저앉지 마. 차라리 안겨.”
“뭐?”
“주저앉으면 다들 우습게 봐. 안기라고.”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제 품에 안았다.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어서 거친 숨을 토해내며 케이의 어깨를 때렸다.
“너 못 봤어? 저 사람들 전부…… 전부…… 나를 미워해……. 나를 미워한다고. 세상이 변하는 게 저 사람들한텐 전부 내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케이는 고개를 저었다.
“저들은 세상이 변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세상이 망해간다고 생각하지.”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꽉 쥐고 엘리자베스를 살짝 밀었다. 엘리자베스가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단 말이야……. 너는 나한테 학술원에 가지 말라고 했지만…… 내가 우겨서 왔으니까 나는 꼭 너한테 멋있는 모습만 보여주려고…….”
케이는 헛웃음을 지으며 엘리자베스의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충분히 멋있었어. 넌 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몰라. 어떻게…….”
케이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떻게 이렇게 몰라.”
케이는 그렇게 말하곤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엘리자베스는 훌쩍거리며 케이를 노려보았다.
“나한테는 기회도 안 줘. 내 수업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케이는 위층 복도에서 이쪽을 내려다보는 남자 둘을 가리켰다.
“글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돌렸다. 엘리자베스는 창문 너머에서 엘리자베스를 보고 있는 패트릭과 아루쉬를 보았다. 케이가 말했다.
“저 둘은 적어도 네 수업을 들으려고 왔잖아.”
“그럼 뭐해.”
엘리자베스는 이마를 거칠게 쓸어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 봤어? 그 칠판에 낙서 말이야…….”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을 끊으며 엘리자베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낙서가 뭐? 그게 그 평민 하녀를 죽인 놈이 한 짓일 거라고? 그건 아니야.”
케이는 품 안에서 신문을 꺼내보였다. 거기엔 이런 헤드라인이 박혀 있었다.
[레트니 애비뉴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다.]
엘리자베스는 신문에 적힌 내용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엘리자베스가 보았던 칠판 속 그림과 비슷한 방식의 살인 사건 현장의 묘사가 적혀 있었다. 엘리자베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오늘자 석간신문이야. 특종을 놓치기 싫었는지 미리 발행했더군. 점심시간에 이미 온 노스리오든에 이 신문이 잔뜩 퍼졌어. 바실리 스트리트와 레트니 애비뉴에서의 살인사건의 범인이 동일인일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저 칠판의 그림은 범인이 한 일이 아니야.”
“네가 어떻게 알아?”
엘리자베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꽉 잡았다.
“어떻게 알긴. 퇴궁할 때 메리와 마주쳤어. 별궁 근처에서. 메리가 그러는데 살인사건의 시체는 교살 당한 게 아니고 경동맥을 찔려서 죽었대. 칠판의 그림과는 아예 달라. 그런데 신문에는 목이 매달렸다고 잘못 났더군. 시체가 높은 곳에 달려 있었다는 말을 기자가 급히 쓰다가 잘못 쓴 모양이야.”
케이는 ‘목을 매다’라는 단어를 가리켰다. 엘리자베스는 그걸 보고 흐느꼈다.
한동안 흐느끼던 엘리자베스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기둥을 붙잡았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까? 용기를 줄까, 아니면 네 용기를 거둬가고 널 데리고 갈까.”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걸 말이라고 해? 용기를 줘. 나를 안아달란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품 안을 파고들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을 헝클이며 웃었다. 케이가 웃을 때마다 케이의 가슴팍이 크게 울렸다. 엘리자베스는 그 울림이 좋았다. 케이의 품 안에서는 온전히 안전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가슴팍을 꽉 안고 말했다.
“다시 말해줘.”
“……뭘?”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 말이야. 다시 해줘. 또 들어야겠어.”
케이는 그 말에 또 한 번 웃고는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넌 뭐든지 할 수 있어. 뭐든지.”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대고 쉼 없이 그 말을 속삭여주었다.
엘리자베스의 떨리던 두 손이 떠는 것을 멈출 때까지.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혈색이 돌고 다시 초롱초롱한 눈이 자신을 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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