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45화
엘리자베스가 삐걱거리며 손을 내미는 것을 본 아루쉬가 입을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웃음을 참기가 힘들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아루쉬를 한 번 노려보고는 패트릭에게 고개를 돌렸다.
패트릭은 엘리자베스에게 쭈뼛거리며 말을 건넸다.
“저…… 그런데…… 교수님의 세계화학사 강의 말입니다. 그거 제가 신청을 하지 못했는데 청강 신청을 해도 될까요? 들어보니 여기 계신 아루쉬 씨도 청강 신청이 받아들여졌다고 해서요.”
패트릭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리자베스는 방정맞지 않게 대답하기 위해 가슴께를 누르며 말했다.
“아, 네. 뭐…… 청강은 제 재량으로 받아줄 수 있어요. 마침 수강 인원이 많지도 않으니까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패트릭 씨.”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서둘러 패트릭을 지나쳤다. 뒤에서 패트릭이 기뻐하며 아루쉬와 대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괜히 뒤를 돌았다가 또 삐거덕거릴까 봐 두려워서 얼른 계단을 내려갔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가면서 어쩔 수 없이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가슴에 희망 같은 게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퀴닌을 개발하고 최초의 여자 과학자가 되어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사람이 되었다니.
엘리자베스는 오늘 수업을 반드시 잘 해내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사들이 그녀를 아무리 마녀라고 욕해도, 그리고 평민들을 향한 귀족들의 분노가 아무리 강렬해도— 결국 엘리자베스가 강단에 서기 때문에 이 세상은 또 조금씩 변할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하며 강의실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아루쉬가 재빨리 걸어와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엘리자베스는 놀라서 아루쉬를 보았다. 아루쉬의 표정이 무척이나 어두웠다. 아루쉬가 엘리자베스는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이국어로 추정되는 그 말을 들으며 물었다.
“왜 그래요?”
“악의예요. 악의가 가득해요.”
“무슨 뜻…….”
아루쉬가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뒤쪽으로 당기더니 강의실 문을 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순간 바닥에 흘러 있는 피와 칠판에 가득 채워진 낙서를 보았다.
강의실은 텅 비어 있었다.
아루쉬는 엘리자베스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손짓을 하곤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마치 강의실 안에서 악취가 난다는 듯이 얼굴을 가렸다. 얼굴을 손에 파묻은 아루쉬가 중얼거렸다.
“이거…… 그때 봤던 그 신사들의 짓일까요?”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엘리자베스는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문틀에 기대었다. 뒤에서 패트릭이 무지한 눈으로 걸어왔다가 온갖 기괴한 그림이 가득한 칠판과 피 칠갑이 된 바닥을 보곤 놀라서 엘리자베스를 부축했다. 엘리자베스는 굳은 얼굴로 부축을 거절했다.
“이건 그 신사들만의 짓이 아니에요.”
“저건…….”
아루쉬가 칠판을 가리켰다. 엘리자베스는 그 칠판 자리로 걸어갔다. 뒤에서 보비들이 외쳤다.
“뭐야! 여기 왜 이래?”
“주변을 살펴! 저 낙서……!”
엘리자베스는 칠판 속에 그려진 목이 매달린 여자를 보았다. 여자의 손은 옆으로 넓게 벌어져 있었다. 그 여자의 동공은 힘이 풀려 있고 혀는 길게 빼어 나와 있으며 콧구멍은 과장되게 벌어져 있어 우스꽝스럽게 그려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는 그림의 여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옆에 쓰여 있는 커다란 글씨가 그 여자가 누군지 말해줬다.
“……마녀.”
엘리자베스는 그 글씨를 읽었다. 그 글씨에는 붉은 피가 칠해져 있고 그림의 여자의 다리 아래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
저 여자는 엘리자베스였다.
엘리자베스가 뒤를 돌았다. 그러자 보비들이 긴장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자신들의 쪽으로 끌어왔다.
“피에 손대지 마쇼!”
“……뭐요?”
엘리자베스는 보비들에게 힘없이 끌려가면서 물었다. 뒷문에는 어느새 신사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저들이 서로 하는 말 중에 무슨 말이 들어 있을지 몰라 두려웠다. 패트릭이 뒤에 있는 신사들에게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신성한 학술원에서!”
패트릭의 분노에 찬 목소리에도 신사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보비들만이 패트릭의 말에 이렇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닥쳐요! 당신! 당신부터 조사를 해야겠군!”
“누굴 조사해요? 패트릭은 나랑 같이 이 강의실에 왔어요. 그런데 어떻게…….”
엘리자베스가 다급하게 패트릭을 잡아가려는 보비를 막자 보비가 코웃음을 쳤다.
“그건 모르는 거지. 일부러 강의실에 이런 짓을 꾸며놓고 복도에 나와 있었는지도. 특히 저 피부가 어두운 남자는 이교도인이 아니오? 마녀 처형이라니. 일부러 교회를 비꼬기 위해 한 짓인지도 모르오. 그러니 둘 다 이리 와!”
보비가 신사들이 보는 앞에서 아루쉬와 패트릭을 우악스럽게 끌고 갔다. 그걸 보던 신사들이 피식 거리며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교탁에 기대어 서서 가까스로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 엘리자베스는 신사들을 노려보다가 아루쉬와 패트릭을 붙잡은 보비에게로 걸어가 보비의 멱살을 쥐었다. 하지만 보비가 몸을 살짝 흔들자 몸이 튕겨져 나왔다.
절망적이었다. 몰록이었을 때 엘리자베스의 몸을 지배했던 엄청난 체력과 근력은 이미 휘발된 뒤였다. 엘리자베스는 이제 레트니 애비뉴에서 손쉽게 사냥감이 되었던 하녀와 다를 바 없는 연약한 여성에 불과했다. 엘리자베스는 흐트러진 얼굴로 보비에게 물었다.
“그 하녀…… 레트니 애비뉴에서 오늘 아침 죽임을 당했다는 그 하녀……. 혹시 그 하녀도 저렇게 목이 매달렸나요? 팔을 벌린 채로 말뚝이 박혀서?”
엘리자베스의 말에 보비의 얼굴이 흠칫 일그러졌다.
맞다는 뜻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등골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게 아니면 감히 귀족들 돈으로 먹고 사는 주제에 귀족들에게서 권리를 강탈해가려는 파렴치한 평민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고 싶은 귀족들이 많거나.’
케이의 말이 엘리자베스의 뇌리를 스쳐갔다. 그러니까 오늘 아침의 살인은 그냥 갑자기 튀어나온 잭 더 리퍼 같은 살인마의 소행이 아니다. 케이의 말대로 파렴치한 평민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려는 귀족 남자들의 조직적인 소행이었다.
엘리자베스는 뒤쪽에 모여 있는 신사들을 노려보았다. 아까까지 엘리자베스를 사로잡았던 두려움은 분노로 바뀐 지 오래였다. 엘리자베스는 그들 중 누구에게라고도 할 것 없이 들고 있던 노트를 내던졌다.
노트가 피에 젖어갔다.
엘리자베스는 신사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이제부터 수업을 시작할 거예요. 감히 내 수업을 방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내 수업에는 단 한 번의 결석만 해도 낙제를 시킬 거고 당신들은 영원히 졸업할 수 없을 거야. 그러니까 다들 앉아요. 구경꾼들은 꺼지고.”
“이봐요,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
뒤에서 보비가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잡았다. 엘리자베스는 보비의 눈앞에 삿대질을 하면서 말했다.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나는 ‘경’이고 이 학술원 내에서는 교수예요. 아까 했던 말을 지키는 게 좋을 거예요, 경사. 감히 내 수업의 학생을 잡아가는 건 가만히 두지 않겠어요. 저 두 학생은 내 수업의 청강생이에요. 당장 놓아주고 여기서 나가…….”
엘리자베스는 거칠어지는 숨을 잇새로 흘리며 보비들을 노려보았다.
“……꺼지란 말이야, 이 새끼들아.”
보비가 분노한 얼굴로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이봐요. 우린 당신을 위해 여기에 있는 거요. 당신이 이런 테러 위기에 처했을 때 당신 목숨을 구하려고…….”
“감히 왕족의 말에…… 감히…… 건방지게…… 말대꾸를 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닐 텐데, 경사.”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고 보비에게 대답했다. 그 순간 그 뒤에 있던 다른 보비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보비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모자를 벗어서 엘리자베스에게 경례를 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엘리자베스 경.”
보비는 아루쉬와 패트릭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이따가 나와서 봅시다. 둘 다.”
두 보비가 나가고 강의실 안에는 냉기만이 감돌았다. 강의실 뒤쪽에 모여 있던 신사들은 엘리자베스가 그들을 노려보자 하나 둘 흩어졌다. 강의실 안에는 곧 엘리자베스와 패트릭, 아루쉬만이 남았다. 패트릭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오지 않을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대답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들이 왔잖아요. 아루쉬, 그리고 패트릭 씨.”
엘리자베스는 피에 젖어가는 노트를 바라보며 비참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교재는 가지고 왔나요?”
* * *
엘리자베스는 준비했던 90분의 강의를 전부 채웠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하던 아루쉬와 패트릭 모두 나중에는 집중해서 엘리자베스의 강의를 들었다. 뒷문에서 어설프게 서성거리던 신사들 중 한 명은 도중부터 수업에 참여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를 제외한 수강생 모두를 낙제로 점수 매겨 사무실에 제출할 예정이었다.
엘리자베스가 강의실 문을 나오자 보비들이 패트릭과 아루쉬에게 걸어왔다. 이제는 정말로 막을 명분이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패트릭과 아루쉬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의외로 보비들은 패트릭과 아루쉬를 잡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입맛을 다시며 엘리자베스에게 와서는 웬 이름을 하나 보여주었다.
조셉. 윌리스.
“이런 이름의 사내들을 알고 계십니까?”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이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셉은 엘리자베스를 집요하게 괴롭히던 패거리들이었다. 보비가 복도 끝을 턱짓했다.
그러자 복도 끝에는 보비의 앞에서 연신 고개를 숙이는 조셉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우리가 근처를 검문하고 다녔더니 자발적으로 자기들이 그랬다고 하더군요. 뭐…… 미안하다고 싹싹 빌었습니다. 신입으로 들어온 사람이 자기들보다 먼저 교수 자리를 꿰찬 게 샘이 나서 그랬다고 하니…… 사실 체포하기도 좀 민망하고…….”
엘리자베스는 보비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그를 노려보며 강의실 칠판을 가리켰다.
“저 그림. 분명히 오늘 죽은 하녀와 똑같다면서요.”
“그거야 레트니 애비뉴에 소문이 쫙 퍼졌으니까 저들도 그걸 알고 그랬겠죠. 조금 놀려먹고 싶은 마음도 있고…….”
“……감히 왕족을 모독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그때, 누군가의 싸늘한 목소리가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들려왔다. 엘리자베스는 놀란 눈으로 짝다리를 짚고 서서 보비를 노려보는 케이를 보았다.
언제 여기에……?
엘리자베스는 놀란 눈으로 강의실 문을 닫으려고 했다. 강의실 안에는 여전히 제대로 치우지 못한 피가 흩뿌려져 있었다. 수업 시작을 위해 아루쉬와 패트릭이 조금 치워주긴 했지만…….
그러나 엘리자베스가 문을 닫기도 전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옆으로 와서 그녀의 손을 문손잡이에서 떼어냈다. 케이는 칠판에 그려진 낙서와 핏자국을 보더니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빠득.
손잡이가 케이의 손에서 단숨에 부서졌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조셉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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