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44화
엘리자베스가 학술원에 도착하자마자 만난 것은 엘우드 밀이었다. 엘우드 밀은 뭔가를 고심하는 듯 커다란 노트를 들고 복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반갑게 엘우드를 불렀다가 막상 엘우드가 돌아보자 어색하게 손을 내렸다.
“……왔냐?”
엘우드 밀은 혀를 차며 고개를 숙였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도 자신을 어색하게 생각한다는 자각 때문에 괜히 더 어색해져서 고개만 끄덕였다.
“예…… 왔어요…….”
“오늘 수업이 있다지?”
“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을 힐끔 보았다. 곁눈질이지만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이 연구하고 있는 듯한 저 복잡한 의료기기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케이의 치료제죠?”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엘우드 밀이 얼른 노트를 뒤로 숨겼다.
“그건…… 아니…… 뭐 꼭 케이한테 쓰려는 건 아니야. 완성될지 안 될지도 모르고 일단은…….”
“케이가 해보겠다고 했어요.”
엘리자베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엘우드 밀의 눈이 동그래졌다. 엘우드 밀은 아기처럼 기뻐하며 말했다.
“정말이냐? 응? 정말이야?”
엘리자베스는 환하게 웃는 엘우드 밀을 보며 조금 놀라 뒤로 물러나며 대답했다.
“네, 뭐…….”
“잘 생각했다. 정말이지 잘 생각했어. 가만히 앉아 죽는 건 할 짓이 아니지. 안 그래? 죽을 날을 받아놓고 사느니 사내라면 배짱 한 번 부려야지!”
엘우드 밀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내가 아니더라도 그건 배짱이 맞아요…….”
엘리자베스의 말이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엘우드 밀이 갑자기 엘리자베스를 붙잡고 노트를 보여주며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어제 갸흐통어로 된 논문을 다시 제대로 레본어로 번역했거든? 그러니까 그 논문에 보면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일장연설이 시작되기가 무섭게 손을 휘저었다.
“아아! 잠깐만요! 저 지금 수업 준비하러 가야 되거든요! 선생님 말씀은 수업이 끝나면 들을게요. 아무리 미리 준비를 해놨다고 해도 어쨌거나 수업은 수업이에요!”
엘리자베스의 외침에 엘우드 밀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뭐 그런 개론 강의 같은 걸 그렇게 열심히 준비해? 그거 다 아는 내용이잖아? 그런 걸 설명해줘야 되는 멍청한 놈들을 모아놓고 수업을 한단 말이야?”
엘우드 밀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거거든요!”
“아, 왜 소리를 질러! 나는…….”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를 따라 소리를 버럭 질렀다가 얼른 제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나는…… 소리를 안 지르려고 하는구만, 이제.”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말에 조금 놀란 눈으로 말했다.
“왜요? 제가 소리 지르지 말라고 해서요?”
“그래. 네가 아니면 내가 왜…….”
엘우드 밀은 뒷짐을 지고는 괜히 하늘을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엘우드 밀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는 제가 죄송했어요. 말이 너무…… 심했어요.”
엘리자베스의 사과에 엘우드 밀이 그녀를 힐끔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사과하지 마라. 결국 너와 케이를 위험에 처하게 한 건 나야. 그런데 또다시 케이가 위험해질 수 있다니. 내가 너라면 날 죽이고 싶었을 거야. 그런데 넌…….”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 쪽으로 돌아섰다.
“넌 날 죽이진 않았잖냐. 그거면 훌륭하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말에 슬며시 웃었다.
“훌륭한 거예요? 비꼬는 거죠?”
“아니야. 난 비꼬는 거 같은 거 몰라.”
엘우드 밀이 칫, 소리를 내며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래도 어제 했던 말은 취소예요. 생체 실험이라는 거…… 그거 선생님이 원해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니잖아요.”
엘리자베스는 친형제 이상이었던 두 사람의 관계를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엘우드 밀의 눈빛은 흐려졌다. 엘우드 밀이 말했다.
“정말 그럴까…….”
“네?”
“아니,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어두운 얼굴을 보며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엘우드 밀의 노트를 가리켰다.
“그런데 미래의 기억이 있다면 치료제에 대한 기억도 있으신 거 아니에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엘우드 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기억이라는 게 정말 듬성듬성해. 특히나 이런 세세한 부분은…… 하지만 치료기기를 분명히 봤으니까 그걸 따라서 만드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라듐의 가공 부분인데…….”
“으아아아! 그런 어려운 얘기는 제발 이따가요. 저 지금 머리 터질 것 같아요, 선생님.”
엘리자베스의 말에 엘우드 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어쨌든 수업에 들어가서 재수 없는 남자새끼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버려.”
엘우드 밀이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손을 툭 치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 * *
루이 교수님은 연구실로 온 엘리자베스에게 강의 자료 몇 개를 건네주었다. 엘리자베스에겐 큰 도움이 되는 자료들이었다. 그 후에는 케빈과 함께 엘리자베스의 수업 시연도 도와주었다.
여전히 학술원 내부는 썰렁했다. 꽤 많은 수의 학생이 빠져나갔다고 루이 교수님이 말했다. 그러면서 엘리자베스에게 출석부를 내밀며 이런 말도 덧붙였다.
“네 수업을 수강하겠다고 한 학생 중 3분의 1이 줄었어. 아마 전쟁 때문이겠지.”
루이 교수님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출석부를 받아들었다. 이건 기초 강의라 듣지 못하면 졸업을 못할 수 있는데도 수강신청을 한 학생이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전쟁이 아니라…… 전쟁 때문에 저 같은 귀족도 평민도 아닌 여자에게 수업을 듣기가 더 싫어진 거겠죠.”
엘리자베스의 말에 루이 교수님이 헛기침을 하며 뒤를 돌았다. 케빈은 어색하게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애써 밝게 말했다.
“괜찮아요. 첫 수업인데요, 뭐. 열 명 남짓이면 오히려 해보고 싶었던 다양한 실험 같은 것도 할 수 있을지 몰라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빈이 얼른 동조했다.
“맞아요! 그럼요, 엘리즈!”
엘리자베스는 시계를 힐끔 보았다. 시간이 20분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얼른 짐을 챙기며 루이 교수님과 케빈에게 말했다.
“행운을 빌어줘요! 두 분 다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루이 교수님과 케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복도로 나오자마자 보비들을 발견했다. 엘리자베스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보비 중 하나가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뻗었다.
“케이 하커 씨께서 엘리자베스 양을 충실히 지킬 것을 부탁하셨습니다.”
“부탁이요?”
“네. 개인적인 호의를 담아 부탁을 들어드리기로 했죠.”
보비가 능글맞게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어떻게 이 남자의 호의를 샀는지 알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보비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하지만 강의실 안에서도 이렇게 학생들의 위화감을 조성하는 건 곤란해요!”
엘리자베스는 보비들이 멘 총검을 힐끗거리며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았다. 그는 걱정 말라는 듯이 대답했다.
“강의실 안까지 들어가진 않을 겁니다. 교실 안에 테러범이 있지 않는 한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엘리자베스는 이를 바드득 갈며 복도를 씩씩하게 걸었다. 하지만 발걸음과 달리 마음은 점점 느려지고 둔해졌다.
조지는 왜 케이를 불렀을까? 혹시 오늘 있었던 살인사건과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정말로 귀족들이 죄 없는 하녀를 ‘본보기’나 ‘화풀이 대상’으로 죽일 만큼 평민들에게 원한을 가졌을까?
……그렇다면 저 수많은 귀족 남자들 중에도 엘리자베스를 죽이고 싶어 하는 자들이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복도 창을 걸어가며 순간순간 마주치는 남자들과 눈인사를 하며 생각했다. 분명 일전에도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이들 중 대부분이 귀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귀족가의 차남은 장남처럼 의무를 질 일이 없으며 가주가 되지 않기 때문에 과학이나 철학 따위에 종사하는 일이 잦았다.
그녀는 평소와 똑같이 눈인사 정도를 하면서도 전과 달리 몸이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특히나 남자들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다가 인사를 하며 손을 주머니에서 뺄 때면 등에 식은땀이 흘러갔다. 혹시라도 저 손에 뭔가를 들고 있지는 않은지. 그땐 보비들도 너무 늦은 건 아닌지.
강의실 안에서도 이런 기분으로 내내 서 있을 생각을 하니 오싹해졌다. 강의실 강단에 서면 모두의 이목이 엘리자베스에게 집중될 테고 누구나 엘리자베스에게 총을 겨눌 수 있는 자리에 앉을 텐데—
게다가 엘리자베스는 안 그래도 마녀라고 그 남자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대상인데, 그 앞에서 벌벌 떨다가 나온다면—
그녀는 자신이 레본의 ‘첫’ 여성 과학자인 것이 다른 레본 과학자들에게 오히려 좋지 않은 본보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그때였다. 복도 끝에서 엘리자베스는 눈에 익숙한 남자 하나와 처음 보는 남자 하나를 보았다. 익숙한 남자는 아루쉬였고 다른 하나는 신사 정장을 입은 낯선 남자였다.
엘리자베스가 아루쉬를 향해 손을 흔들자 두 사람이 다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아루쉬는 엘리자베스에게 인사를 하곤 옆에 서 있던 남자에게 말했다.
“아, 이쪽이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입니다. 아이고, 제가 실수를 했군요. 엘리자베스 양에게 패트릭 씨를 소개하는 게 먼저인데요.”
엘리자베스는 이 남자의 이름이 패트릭이고 패트릭이 귀족이 아닌 평민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편하게 해요, 아루쉬. 여긴 사교모임이 아니고 학술원이에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패트릭이 밝아지는 얼굴로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저는 저번 달에 처음으로 학술원에 들어온 패트릭 다시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정말 이렇게 뵙게 되어서 영광이에요!”
패트릭은 갑자기 허리를 90도로 꺾어서 인사했다. 엘리자베스는 놀란 눈으로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패트릭이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손을 막 저었다.
“아, 아니……. 전 교수님을 놀래켜드리려는 게 아니고…….”
교수님……?
엘리자베스는 생전 처음 듣는 호칭에 잠시 넋이 나갔다. 하지만 패트릭은 횡설수설 변명을 하는 데에 바빠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읽지 못한 것 같았다.
“사실 제가 다시라는…… 보잘것없는 젠트리 가문입니다만 어쨌든 다시 가문의 차남인데요. 제 동생이 오랫동안 학질을 앓았습니다. 사립병원에서도 다 가망이 없다고 했는데 한 달 전에 왕립병원에서 치료제를 써주셔서 싹 나았지 뭡니까. 그 뒤로 교수님을 보고 꿈을 키웠습니다. 의사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하는 걸 싫어하고 제약회사들은 돈이 되지 않을 만한 약은 만들지 않잖아요. 이상한 약이나 만들어 팔고……. 그런데 교수님은…… 교수님? 저…… 교수님……?”
엘리자베스는 패트릭의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대답했다.
“아, 네.”
“괜찮으세요?”
엘리자베스는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나를 보고 꿈을 키운 학생이라니!
‘교수님’이라니!
엘리자베스는 온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기분으로 패트릭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그렇군요. 나도 만나서 영광이에요. 패트릭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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