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43화
엘리자베스는 문 밖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꿈을 꾸지 않은 밤. 엘리자베스는 허전함을 느꼈다. 오랜 시간 시달려온 악몽에 익숙해진 것은 절대 아니었다. 케이는 악몽을 꿨을 거라는 것이, 몰록이 되는 꿈을 꿨을 것이라는 사실이 사무쳤다.
엘리자베스가 슬픈 표정으로 침대 맡을 보니 케이가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벌떡 일어났다. 문을 열자 마침 케이가 커피를 들고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서둘러 창문을 보았다. 동이 트다 못해 해가 중천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낭패라는 얼굴로 케이에게 말했다.
“메리가 3층 침실을 봤을 거야. 프란시스도!”
케이는 무감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거긴 비어 있잖아.”
“비어 있으니까 문제지!”
이 자식은 뭐가 문젤까?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멱살을 쥐고 싶은 것을 참으며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차피 안다고 해도 너한텐 내색 안 할 거야. 하면 잘라버리면 되지.”
“메리를? 프란시스는 어떡하고?”
케이는 시끄럽다는 듯이 방으로 들어가며 테이블 위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케이는 크림을 덕지덕지 올린 커피잔을 엘리자베스에게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다가 케이가 내미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과 커피를 거절하지 못하고 일단 받아들었다. 엘리자베스는 빵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그럼 이건 다 메리가 준비했어?”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해왔어. 여자들은…….”
케이는 어쩐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여자들은 달달한 걸 좋아한다고 하길래.”
엘리자베스는 빵을 우물거리던 것을 멈추고 눈을 치켜떴다.
“누가 그래? 앰버가?”
“아니. 비앙카가.”
엘리자베스는 씹고 있던 빵을 던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꾹 참았다. 대신 슈미즈 자락을 무릎 아래로 끌어내려 종아리를 덮고 소파 위에 웅크리고 앉아 달달한 크림을 떠먹었다.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느낌이었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다가 엘리자베스의 입술에 묻은 크림을 닦아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엘리자베스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하는 거야, 더럽게.”
“더러워?”
“그래. 내 침도 들어 있잖아.”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어서 말했다. 케이가 오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어차피 많이 먹었잖아. 이미.”
“하지만 사람의 타액에는 수많은 세균이 있어. 너 침을 배양하면 실제로 사람의 입안에 얼마나 많은 세균이 사는지 볼 수 있어. 네가 한 번이라도 침을 배양한 배지 키트를 현미경으로 봤다면 할 수 없는…….”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뭘?”
“아니 가끔, 네가 무척이나 눈치가 없는 것 같기도 해.”
“네가 할 말이 아니거든?”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쏴붙였다. 그러자 케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케빈 퍼킨이 널 좋아하는 걸 몰랐다는 것부터가 이상하지 않나?”
“그, 그건……!”
얼굴이 빨갛게 달궈진 엘리자베스는 빵을 커피에 적셔서 얼른 우적우적 씹었다. 케이는 그 모습을 보다가 소파 손잡이에 기댄 팔에 턱을 괴고 말했다.
“얼굴이 빨개지는 걸 보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나 보네.”
“나, 나쁘진 않지 당연히! 케빈은 좋은 아이야.”
“아이들은 그렇게 크지 않아.”
“케빈은 스무 살도 안 됐어.”
케이는 콧방귀를 뀌었다.
“우린 내가 열아홉일 때 약혼했어. 그리고 내가 열아홉일 때 나는 밤마다 네 옷을 벗기는 상상을 했지.”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입을 떡 벌리고 케이에게 빵을 내던졌다. 케이는 빵을 손쉽게 손으로 낚아채곤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엘리자베스는 얄미운 케이의 행동을 바라보다가 무릎 위에 손을 얹고는 뜨거워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건 그냥 욕정에 불과하잖아.”
“글쎄.”
케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대답에 케이를 빤히 보았다.
그건 무슨 뜻일까? 아니라는 대답을 원하는 제 마음을 느끼며 엘리자베스는 속이 탔다.
열아홉의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어떤 존재였길래 내 편지를 불태웠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걸 또 달달 외우고 다녔을까?
왜 그랬을까?
엘리자베스는 속이 쓰려서 빵을 한 조각 다시 집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문득 오늘 강의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벌떡 일어났다.
“아, 맞아! 지금 몇 시야?!”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11시.”
엘리자베스는 조금 안도했다. 강의 시간은 3시였고 강의 준비를 안 해놓은 게 아니니 지금 빵을 조금 먹고 출발하면 2시간은 책을 조금 더 살펴보고 강의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얼른 빵을 입안에 쑤셔 넣고 말했다.
“이제 나가.”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말했다.
“학술원에 갈 생각이라면 그만둬.”
“뭐?”
“메리는 지금 경찰청에 갔어. 토비가 그러는데 레트니 애비뉴의 하녀가 애비뉴에서 변을 당했대. 메리가 그걸 발견한 사람 중 하나고.”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어깨가 굳어졌다.
“변을 당해? 죽었다는 뜻이야?”
케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이라도 다 먹게 하고 말하고 싶었어. 앉아.”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씹던 빵을 내려놓았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메리한테 참 안 된 일이야. 하지만 그거랑 내가 학술원에 가는 게 무슨 상관이야?”
“변을 당했다는 건 살해당했다는 뜻이야.”
케이가 담담하게 말했다. 엘리자베스가 움찔했다.
“여기 애비뉴에서? 하지만 요새는 어디서든 보비들이 지키고 있잖아.”
“나도 알아. 그런데 보비들이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니 레트니 애비뉴 사람일 확률이 높겠지.”
이웃에 살인자가 산다니. 엘리자베스는 섬뜩해지는 기분에 몸을 떨었다. 그때, 뭔가 뒤통수를 치고 가는 서늘함이 느껴졌다.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언제 있었던 일이야?”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잡아당겨왔다. 엘리자베스를 품에 안고 케이가 말했다.
“널 겁줄 생각이 아니었어.”
“겁을 먹지 않을 도리가 없잖아. 응?”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야.”
케이의 대답에 엘리자베스는 창문 밖에서 보았던 남자들을 떠올렸다. 그들이 정말 보비였을까? 엘리자베스는 무서운 생각으로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대체 왜 그런 건데……?”
“그건 몰라. 하지만 토비의 말로는 며칠 전에도 바실리 스트리트 근처에서 이런 일이 있었대. 역시나 귀족을 모시는 하녀였고…… 범행수법도 비슷하다더군.”
“그 말은 귀족을 모시는 하녀들만 죽이고 다니는 살인범이 있다는 거야?”
“그게 아니면 감히 귀족들 돈으로 먹고 사는 주제에 귀족들에게서 권리를 강탈해가려는 파렴치한 평민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고 싶은 귀족들이 많거나.”
케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케이의 눈에 살기가 일어났다. 엘리자베스는 불안한 표정으로 케이를 보았다.
“과대망상일지도 몰라.”
“글쎄. 어쨌거나 놈들이 원하는 건 평민 여자야. 자신들보다 약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니까.”
“난 평민이 아니야. 이제.”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고개를 저었다.
“밖은 너무 위험해. 학술원에 있는 신사들이 널 어떻게 보겠어? 너무 이목을 끄는 일은 안 하는 게 좋아.”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마음이 흔들렸다.
케이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엘리자베스는 엘리자베스를 마녀라고 욕하고 위에서 화분을 던지던 신사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그들이 가졌던 악의는 지금 그들이 가질 악의에 비하면 장난스러운 수준일지도 몰랐다. 적어도 그들은 그때 엘리자베스를 학술원 밖으로 내쫓을 궁리만 했을 뿐, 이 세상에서 추방시켜버리고 싶은 느낌을 주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오늘 벌어진 짓은…….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눈을 보았다. 케이의 눈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케이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도 칼이나 총이 무서웠고 죽고 싶지 않았다. 케이의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또 이 세상이 바뀔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새로운 아침이 왔는데—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두려워서 숨으면 다른 여자들은? 다른 평민들은? 난 엘리자베스 클레몬트야. 왕의 사촌이라고. 어느 귀족도 감히 나를 건드릴 순 없어. 그런데 그런 나조차 숨으면 정말 큰일이잖아. 세상이 무서워졌다고 다들 조용히 있으면 더 무서워지는 거잖아.”
엘리자베스가 말하자 케이가 거친 숨을 토해냈다. 케이는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저었다.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는 견딜 수 없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슬퍼졌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걱정하고 있을 뿐인데, 우리는 둘 다 뭔가 잘 못한 사람이 없는데,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할까?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머리를 끌어안고 토닥거렸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거야. 걱정하지 마. 반드시 보비들과 다니고 절대로 다른 짓 하지 않을 거야. 퇴근하면 바로 레트니 애비뉴로 올 거고 네가 마차에서 나를 끌어내리기 전까진 심지어 마차에서 내리지도 않을 거야. 정말이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떨리는 눈동자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그렇게 오랫동안 들여다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네가 또 뒤에서 이상한 짓을 꾸미는 것보단 그런 약속을 받아내는 게 낫겠어.”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숨소리가 퍼질 때마다 가슴께가 찡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오늘 새벽, 케이의 눈에서 엘리자베스는 두려움을 읽었다. 엘리자베스는 이제 자신의 고통이 자신만의 고통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실이 주는 충만감과 두려움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었다.
* * *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함께 학술원에 가려고 했지만 준비를 끝내고 나가 보니 저택 앞에 케이를 데려가려는 왕이 보낸 마차가 도착해 있었다. 케이는 요령 있게 왕의 부름을 늦추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마차 안에서 내린 다니엘 빌리스는 조금도 양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토비와 보비들에게 부탁하고 다니엘 빌리스의 마차를 탔다. 엘리자베스는 불안한 눈으로 텅 빈 어수선한 레트니 애비뉴를 바라보았다.
여기에서 사람이 죽었다니. 그것도 아무 죄 없는 하녀가.
엘리자베스는 나오기 전에 프란시스의 뺨에 입을 맞추며 신신당부를 했다.
“아무에게도 문 열어주지 마세요.”
그 후 현관까지 걸어간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에겐 보이지 않게 콜린에게 몰래 총을 하나 건넸다. 그러자 콜린이 현관문 밖, 의자 옆을 가리고 있는 커다란 통을 치우더니 기다란 산탄총을 엘리자베스에게 보여주었다.
“이미 도련님이 주셨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콜린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쏠 일이 없길 바랄 뿐이에요, 콜린.”
“저도 그렇습니다. 아가씨.”
엘리자베스는 콜린을 가볍게 한 번 안은 후 마차까지 걸어갔다.
홧홧한 여름 날씨에도 겉옷을 벗기가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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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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