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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42화 (242/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42화

케이는 꿈속에서 그 어린 여자애였다.

케이가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삶. 귀족으로 태어나 귀족으로 살아가며 귀족으로 죽을 것으로 예상되는 드넓은 쉐필드 평야 안 공녀님의 삶.

케이는 어렴풋이 엘리자베스의 어린 시절을 생각할 때면 언제나 호화로운 저택과 부드러운 침구, 따뜻한 고기와 친절하고 예의바른 하녀들 따위를 떠올렸다.

하지만 케이가 실제로 본 엘리자베스의 기억 속 어린 공녀님은 그런 삶과는 사뭇 다른 삶을 살았다.

호화롭지만 낡은 저택은 엘리자베스가 걸어 다닐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어린 소녀는 그 끔찍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두려움에 떨었다.

소녀의 가정교사는 그녀가 머무는 층에서 자며 그녀를 감시했다. 엘리자베스가 맘대로 밖을 돌아다니기라도 하면 정숙하지 못하다고 클레몬트 공작 부부에게 이르기 일쑤였다.

어린 엘리자베스는 새벽이 되면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밖을 돌아다니길 좋아했다.

동이 터오기 전 하늘이 사파이어 빛깔처럼 새파랄 때면 그녀의 마음속은 이상하게 싱숭생숭해졌다.

아무도 깨어 있지 않은 밤, 어린 소녀는 엄마의 방 앞을 서성여보기도 하고 제 머리를 빗어주는 농노의 딸아이를 찾아 돌아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기분을 터놓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녀는 대부분의 외로움을 아버지 서재에서 몰래 역사책과 철학책, 아니면 과학사에 관련된 책들 따위를 읽으며 견뎠다.

그러나 새벽엔 그도 가능하지 않았다. 발뒤꿈치를 떼면 자꾸만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저택 뒤편에서는 돼지나 닭, 오리 따위가 죽어가는 소리가 넘어왔다. 엘리자베스는 귀를 틀어막고 1층 복도에 있는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 덤불숲에 착지했다.

그때부터는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해가 뜨기 전에 지평선을 볼 수 있도록.

이 지긋지긋한 저택 따위,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갈 수 있도록.

엘리자베스의 숨이 꼴깍꼴깍 넘어가기 직전이 되면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는 지점이 눈에 들어왔다. 엘리자베스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 즈음엔 해가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또 아침이었다.

새로운 날.

새로운 시작.

다시 일상이 시작되면 엘리자베스는 가정교사에게 손등을 얻어맞아가면서 여자들의 걸음걸이, 표정, 차를 우리는 법 따위를 배워야 했다. 점심에는 농노의 어린 딸아이가 와서 엘리자베스 앞에서 바들바들 떨면서 그녀의 발을 씻기거나 옷을 갈아입힐 테고, 오후에는 어머니와 둘이서 그림처럼 앉아서 오전 동안 배운 것들에 대해 검사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하지만 아직은 그 일상이 시작되기 전의 순간.

동이 터오고 저 지평선 너머가 타오르면 엘리자베스의 가슴 속에도 불꽃이 일었다.

어쩌면 이 순간은 뭔가가 바뀌려는 순간인지도 몰라.

그 어린 아이는 그렇게 생각한다.

저 지평선을 밝히며 다가오는 커다란 해와 함께 저 지평선 너머에서 대단하고 요란스러운 무언가가 등장할지도 몰라.

마치 쉐필드를 가로지르는 석탄을 나르는 시끄러운 기차처럼.

그 요란스러운 녀석은 내 손을 잡고 이 지긋지긋하고 평화로운 곳을 떠나자고 말할지도 몰라. 이 저택도, 내 말 따윈 들어주지 않는 가정교사와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어제까지의 슬픔도 모두 이 곳에 두고 우리 둘이서만 도망가는 거라고…….

은밀하게 속삭일지도 몰라.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한다.

엘리자베스는 그 자리에 오랫동안 앉아서 동이 터오고, 그러다 못해 온 천지가 환해질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저 멀리서 올 자신이 기다리는 그 누군가 때문에.

혹시나 이 지리멸렬한 세계가 변해버릴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에.

케이는 눈을 떴다.

* * *

“허억……. 헉……. 헉…….”

케이는 눈을 뜨자마자 갈증을 느끼며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바닥을 발바닥으로 느끼니 가슴에 몰아치던 폭풍이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씨발…….”

케이는 중얼거리며 문을 열기 전에 제 침대를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가 머물던 방, 머물던 침대에서 잠에 들었기 때문일까. 밤새 엘리자베스의 꿈을 꿨다. 케이는 문을 열고 복도에 섰다.

케이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복도에 있는 위스키 병과 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잠시 멈췄다.

그간 잘 끊어왔었는데, 오늘은 술을 참기가 힘들었다.

케이는 잔을 가만히 든 채로 창가로 걸어갔다. 창문을 열자 사파이어 빛깔로 물이 든 하늘이 보였다. 시간을 보자 10분 내외로 해가 떠오를 것 같았다.

사파이어 빛깔로 물이 든 하늘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어린 엘리자베스의 외로움이 케이의 가슴 속 깊이 들어온 것 같았다.

케이는 어두운 창가에 기대어 그나마 동이 터오는 것을 볼 수 있는 곳을 찾았다.

하지만 리오든에는 지평선 같은 것은 없었다. 케이가 발견한 것은 정원 앞을 어슬렁거리는 남자들 서너 명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정원으로 나가기 위해 나이트가운을 대충 걸치고 계단 난간으로 다가갔다. 그때 2층으로 내려오던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쳤다.

엘리자베스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밖에 보비들인 것 같아. 그렇지?”

엘리자베스가 바들바들 떠는 게 보였다.

보비가 아닐까 봐 두려운 것이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가락이 떨리는 걸 보는 순간 참을 수 없이 자신에게 화가 났다. 저 여자 하나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는데, 왜 자신에게는 아무런 힘도 없을까.

케이는 이 전쟁의 승패 따윈 관심도 없었다. 이 세계가 결국 국왕과 귀족들에게 먹힌다고 한들, 그게 중요한가? 그 세계에서 엘리자베스만이 살아남으면 그뿐이 아닌가?

케이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아니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귀족들과 국왕이 지배하는 세계. 엘리자베스에게는 지리멸렬한 외로움의 세계. 그녀를 그런 곳에 혼자 두고 케이 혼자 죽어야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견딜 수 없다.

“……왜 그래? 술 마시려고 나왔어? 나도 한 모금…….”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걸어오자 케이가 술을 내려놓고 엘리자베스를 와락 껴안았다.

“……!”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뜨거운 체온을 느끼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케이의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두려움에 떤다는 것을 깨달아 놀랐다. 왜? 이 커다란 남자를 두렵게 만드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케이가 두려워하는 것이 다른 무엇도 아닌 엘리자베스의 외로움이라는 것은 몰랐다. 다만 케이의 목덜미로 힘겹게 제 얼굴을 들어올리고 그에게 중얼거렸다.

“어제부터 무슨 일이야……? 치료제 때문에? 치료제 때문이라면 그냥 하지 않겠다고 말해도 돼. 응? 그러니까—”

“날 사랑해줘.”

“뭐?”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널 사랑하라고?

난 이미 널 사랑하고 있어.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어서 케이를 밀어냈다. 하지만 케이는 조금도 밀려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날 사랑해봐. 내가 널 무척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는다는 건 정말 엄청난 기분이니까. 네가 날 사랑하면 나는 그것보다 더 많이 사랑할 테니까. 그러면 외로움 같은 거 느낄 새도 없을 테니까. 외로움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들을 사랑하면 느껴지는 감정이야.”

나를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너.

나를 사랑하지 않는…….

나의 세계.

케이는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함으로써 외로워졌고 엘리자베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를 꽁꽁 가두고 있던 외로움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꽉 안고 어린 아이처럼 투정을 부렸다.

“그러니까 나를 사랑하라고. 내가 널 외롭지 않게 해줄 테니까.”

케이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품에서 빠져나와 케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창문 밖에서 조금씩 해가 떠오르는 게 보였다. 케이의 시선이 그리로 옮겨갔다. 엘리자베스의 시선도 케이의 시선을 따라갔다.

아침이었다.

케이가 중얼거렸다.

“해가 뜨잖아……. 또 아침이 오잖아. 이 지루한 세계가 시작되려고 해.”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쉐필드에서 지평선 너머에서 해가 뜰 때마다 다가오는 지루한 하루를 또 예감하며 대단하고 야단스러운 녀석이 자신을 이 세계에서 구원해주길 바랐던 날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뺨을 잡았다. 엘리자베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내 세상은 별로 지루하지 않아. 이제. 이제는…….”

이제는 네가 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케이가 말했다.

“널 외롭게 만든 내가 싫어. 여전히 널 외롭게 만들 수도 있는 나를 나는 견딜 수가 없어. 외롭지 마. 슬퍼하지 마. 네가 불행하면 나는 지옥에 살아.”

그 말에 엘리자베스가 다시 한번 망설이고 있을 때 케이가 말을 이었다.

“사랑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갈색 눈을 바라보며 깊은 슬픔을 느꼈다. 그녀는 케이의 표정에서 제 얼굴을 읽었다. 어린 날의 제 얼굴을.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사랑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다가 그대로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붙잡았다. 엘리자베스의 몸이 허공으로 들렸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입술을 정신없이 삼키기 시작했다. 그의 거친 숨결이 엘리자베스의 코와 입술, 귓가를 괴롭히기 시작하자 엘리자베스의 입술이 벌어졌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도 사랑해.”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의 몸을 돌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과 함께 케이의 등 뒤로 떠오르는 해를 보았다. 지평선 너머 붉게 빛나는 태양과 뭔가가 변하려는 이 세계.

그리고 나를 구하러온 야단스럽고 대단한 녀석.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꽉 껴안았다.

케이는 쉴 새 없이 엘리자베스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엘리자베스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몸에 매달려 신음을 내뱉다가 어느 순간엔 울기도 했다.

별궁에서의 밤이 내가 너를 갖고, 네가 나를 갖는 밤이었다면 이 아침은 서로가 서로를 채워주는 행위였다.

엘리자베스는 보비들인지 폭도들인지 알 수 없는 남자들에 대한 불안함 같은 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가뿐하게 들어올렸다. 그는 엘리자베스와 함께 엘리자베스가 머물렀던, 케이의 흔적이 남은 침대로 갔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먼저 눕히고 엘리자베스의 얼굴 위에 붉게 흩어지는 햇빛을 보았다. 엘리자베스의 사파이어 색 눈을 바라보다 그 눈이 깜빡거리는 순간에 눈꺼풀 위에 입을 맞췄다.

“사랑해.”

“케이.”

“사랑해.”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정성스럽게 자신을 만질 뿐인 케이에게 손을 뻗었다. 엘리자베스가 입을 열어 말했다.

“사랑해. 이리로 와.”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몸 위에 제 몸을 겹쳤다. 엘리자베스의 허리가 반달처럼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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