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41화
“약혼은…….”
케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케이는 머리를 헝클이며 프란시스를 보았다. 프란시스는 물러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케이가 엘리자베스 쪽을 힐끔 보며 말했다.
“……전쟁이 끝나면 생각해보죠.”
프란시스는 케이의 말에 혀를 찼다. 그녀는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가볍게 쥐고 케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 넌 엘리자베스와 같은 층을 쓸 수 없겠구나. 넌 2층 방을 써. 엘리자베스는 3층에 머물고.”
말을 마친 프란시스가 엘리자베스의 등을 밀었다. 엘리자베스는 놀란 눈으로 3층으로 밀려갔다.
엘리자베스는 케이 쪽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저, 정어리 파이는…….”
“그건 올려다주마!”
“아니…… 잠깐…….”
케이와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이 불안한 마음이 케이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조금 사라질 텐데. 케이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것도 왜인지 알고 싶은데.
엘리자베스는 슬픈 눈으로 3층으로 올라갔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떠밀리듯이 올라가는 것을 보며 프란시스에게 물었다.
“……엘리자베스에게 나 같은 짝이 맞다고 보세요?”
“무슨 뜻이야?”
“엘리자베스를 좋아하시잖아요. 딱 봐도 보여요.”
프란시스는 엘리자베스가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를 들으며 난간에 기대어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는 케이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난 너도 좋아해. 멍청한 자식.”
말을 마친 프란시스가 케이를 돌아보았다. 케이의 일그러진 표정을 본 그녀는 케이를 다그쳤다.
“넌 뭐가 문제야? 왜 너를 불행하게 할 길로 자꾸만 가는 거니? 누가 봐도 너를 행복하게 할 사람은 하나뿐이야. 너도 알고 있잖아. 엘리자베스를 놓치고 너는 어떻게 살 거야? 나보고 죽지 못해 살아가는 널, 늙어가면서 더 많이 불행해지는 널 보라는 거야? 남은 생 내내 나보고 그러라고?”
프란시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케이를 노려보았다.
주먹을 꽉 쥔 채 케이가 말했다.
“내가 불행해지는 일을 보실 일은 없어요.”
“뭐?”
“엘리자베스와 결혼하지 않으면 아무와도 하지 않을 거고 전쟁이 끝나면 다시 배를 탈 지도 모르니까요.”
케이의 말에 프란시스가 휘청거렸다. 1층 응접실에 남아 창문을 열던 콜린이 놀란 눈으로 달려와 프란시스를 부축했다. 그러나 프란시스는 콜린에게 손을 휘저었다.
그녀는 케이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케이에게 가까이 걸어와 그의 손을 잡았다.
“너…… 뭐야.”
“뭐가요.”
케이는 프란시스의 눈을 피했다. 그런 그의 턱을 쥐어 자신을 보게 한 프란시스가 소리쳤다.
“뭐냐고! 왜 배를 타는데! 조지 왕자니? 그 자식이 겉으로는 평민을 위하는 척, 사회 개혁에 앞서는 척하면서 결국 뒤로는 이상한 제안을 했어? 말 해!”
프란시스는 케이의 생각처럼 순순히 속아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렇다고 내가 괴물이 될 거라고, 당신이 살린 내가 괴물이 될 거라고, 당신이 당신을 죽여가면서까지 살린 내가…….
어쩌면 이렇게 죽는지도 모른다고 말할 순 없잖아.
케이는 프란시스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조지 왕자라니, 입 조심해. 지금 이 나라에 국왕은 조지고, 그분 한 분뿐이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프란시스가 오해하게 하는 게 나았다.
프란시스는 허탈하다는 듯이 뒤로 물러났다.
“……감히. 감히 내 아들을 협박하다니.”
아들이라는 말에 케이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프란시스는 난간을 붙잡고는 소리쳤다.
“순순히 져줄 생각이냐? 대답해라. 다른 대안 같은 건 없어?”
케이는 프란시스의 눈에 오른 독기를 보며 제 얼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여태까지 살아오며 프란시스에게선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기분이었다.
케이는 언제나 자신이 로버트를 닮았다고, 그렇게 생각해왔다. 오만하고 건방진 태도. 자존심은 세고 굴종을 죽음보다 치욕스러워하는 성정. 계급의식에서 나오는 우월감과 열등감을 동시에 가져 이중적이고 꼬인 성격.
케이는 로버트를 닮았다.
그렇게 생각해왔다.
프란시스가 말했다.
“넌 내 아들이야. 케이. 너의 이름은 하커이지만 너는 적어도 굽히느니 죽겠다는 대쪽 같은 목소리, 어떤 상황에서도 끌려다니기보다는 실낱같은 희망에 판돈을 다 거는 무모한 결단력, 그리고 현실을 파악할 줄 아는 냉철한 눈을 가졌어. 그건 나와 똑같지. 나도 나한테 그런 점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단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데에 오래 걸렸지. 왜인지 아니? 내가 나를 사랑하면…… 용기를 내야 하니까. 이 처절한 나를 끌고 살아가야 하는 용기. 난 정말……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이제 알아. 나는 나름대로 괜찮은 사람이고, 너도 그래.”
프란시스가 케이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대쪽 같은 목소리. 무모한 결단력. 냉철한 눈.
케이는 로버트의 기질을 말만 바꾼 것 같은 묘사들에 휘둘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케이는 그렇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면 몰라도 그건 케이가 아니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고 지금 케이가 내고 있는 건 아주 간이 부은 욕심이었다.
엘리자베스와 또다시 약혼. 결혼이라니.
케이는 순간 자신의 머릿속에 엘리자베스의 앞에 무릎 꿇고 청혼하는 자신을 떠올렸다.
그건 지난 청혼과는 다를 것이다. 그전이나 지금이나 케이는 푸른 눈의 엘리자베스를 보기만 해도 제 모든 게 창피해져서 견딜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 순간에는 엘리자베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것이다.
무릎을 꿇은 채 엘리자베스의 가는 손을 잡을 거고, 그녀가 허락한다면 그 손등에 입을 맞출 것이다.
그곳에서 케이는 괴물이 아니라 사람일 거고 엘리자베스에게 어울리는 남자일지도 몰랐다. 본래 상상이란 제멋대로가 아닌가.
그 케이는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평민이라는 계급의식을 가지고, 그 중에서도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뉘어 사람의 대접이 달라지고, 어린 여자들은 사장에게 추행당하고 사생아를 낳은 어미는 핏덩이를 대문 밖에 버리고 가는 그런 세상이 아닌 곳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케이의 콧대도 반듯하고 옷에는 구김이 없으며 마음에도 구김이 없는 그런 곳 말이다.
그 케이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결핍이나 프란시스에 대한 죄책감, 부채감 따위를 마음 한 구석에 담고 살지도 않고 그래서 사랑이 뭔지 알고 엘리자베스에게 줄 사랑을 마음에 깊이 가지고 있는 진짜 신사 같은 남자일 것이다. 그래서 무릎을 구부리면 옆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은 케이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엘리자베스의 눈은 반짝반짝 빛날 지도 모른다.
그래. 그런 세상에서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세상이……. 그런 세상이 우리의 미래일지도 몰랐다.
살아만 있다면.
살아만 있다면 가냘픈 희망은 언제나 살아 있는 게 아닌가.
케이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프란시스를 보았다. 프란시스가 케이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방법이 있을 거야. 그렇지 않니? 언제나 방법은 있어. 조지가 뭐라고 했니? 나한테 말해봐. 내가 너보다 두 배는 더 많이 살았어. 난 너보다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케이!”
프란시스의 말에 케이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오래 살아요. 담배나 술 같은 것 좀 하지 말라고. 살아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거니까. 세상은…… 어쨌든 이만큼 바뀌었지 않습니까?”
케이는 고개를 들었다.
프란시스는 케이의 표정을 가만히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프란시스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메리가 내려왔다.
“마님! 방을 치워뒀는데 엘리자베스 양께서 3층을 쓰신다고 하더라구요?”
“맞아. 내가 2층 방을 쓸 거야. 프란시스…… 아니, 마님 방의 짐을 옮겨놔.”
케이가 얼굴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메리는 케이의 얼굴에서 이상한 기색을 발견하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케이는 고개를 돌렸다. 메리가 대답했다.
“네. 이미 그렇게 해뒀어요.”
“고맙네.”
케이는 그렇게 말하곤 계단을 올랐다.
프란시스는 케이가 올라가자 소파로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콜린이 프란시스를 걱정스럽게 보자 메리가 콜린에게 입모양으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콜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 *
케이는 메리가 치워놓은 것으로 보이는 2층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과거 엘리자베스가 쓰던 방이었다. 레트니 애비뉴 2번가. 케이는 넘볼 수도 없는 대단한 공작 부부의 타운하우스 침실.
케이는 이 저택에 손님으로 왔던 날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에게 청혼한 후 약혼자의 자격으로 그녀를 찾아왔던 날. 공작 부부는 케이에게서 냄새가 난다는 듯이 가까이 다가오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응접실에 케이를 들였다. 그저 비싸고 반짝거리는 것들로 가득 찬 하커 저택과는 달리 전부 유서 깊은 도자기, 그림, 장식품으로 가득했던 이 저택.
그 저택의 계단을 내려오던 너.
케이는 그때 알아봤다.
이 저택에서 가장 값비싸고 아름답고 귀한 건 너야.
너를 데리고 도망친다면 이 고풍스러운 저택의 모든 것들은 색과 빛을 잃고 시시해지겠지.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그랬던 케이가 이 저택을 사들이고 멜니아에서 돌아와 이 방 침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는 감히 이 침대에 눕지도 못했다. 소파에서 웅크리고 잠이 들거나 아니면 답답한 마음에 술에 진탕 취해서 3층에 있는 간이침대에서 뻗어버리는 게 전부였다.
엘리자베스를 생각하면 자꾸만 모든 걸 그만두고 싶어졌으니까.
참정권 운동 같은 것, 네가 사랑하는 남자 같은 것, 전부 무시하고 너한테 가고 싶어. 너를 처음 본 순간 네가 이 저택에서 가장 값비싸고 아름답고 귀한 것임을 알아본 순간 그랬던 것처럼 너를 데리고 망치고 싶어.
케이는 그렇게 생각했던 날을 떠올리며 방문을 만졌다. 부서진 방 문고리를 보며 주저앉아 있던 엘리자베스를 보았을 때는 또 어땠나.
그때는 이 세상을 조각내고 싶었다.
엘리자베스가 이 안에서 공작 부부에게, 그리고 개 같은 사용인들에게 몸과 마음이 다쳤을 생각을 하면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이런 세상에 한 시도 둘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 모든 상처 같은 건 기억하지도 못할 세상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시간여행기.
그런 게 나한테 주어진다면 나는 과거로 가서 어린 너를 쉐필드에서 데리고 나왔을 거야. 인형처럼 작고 귀여운 소녀를 데리고 먼 미래로 가든지, 아니면 증기기관도 기차도 열기구도 없는 세계로 가서 네가 맛있는 걸 배터지게 먹고 그저 행복하기만 하게 해주든지.
넌 그곳에서 내가 아닌 멋있는 소년을 만나도 좋아.
그런 건 다 상관없어.
혼자 남겨지는 건 괜찮아.
내가 두려운 건 네가 나처럼 어두운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야. 사랑받고 싶은 사람들한테 사랑받지 못하는 기억.
어쩌면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들을 사랑한 기억.
그런 기억은 사람에게 깊은 흉터를 남기니까.
다시는 나 자신을 끌고 살아갈 수 없게 만드니까.
케이는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쉐필드의 드넓은 평야를 바라보며 구원자를 기다리던 어린 소녀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