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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40화 (240/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40화

전쟁 물자가 공급되기 시작했다는 소식은 바로 신문을 통해 퍼져나갔다. 노동자 조합의 설립 얘기 역시 신문에 배포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조지가 자신이 노동자들에게 내준 이 크나큰 권리를 널리 알리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비록 강력한 왕은 아닐지라도 영악한 지도자였다.

다음 날 아침 바로 찾아온 다니엘 빌리스는 조지가 엘리자베스의 거처를 옮기는 것을 허락했음을 알렸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별궁을 나가서 지내는 것에 대해 반신반의했지만 엘리자베스는 당장 내일부터 수업을 시작해달라는 루이 교수님의 기별을 받은 터였다.

“어차피 강단에 서면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될 텐데, 별궁에 있으나 레트니 애비뉴에 있으나 크게 차이가 없어.”

“강단에 선다고? 학술원에서 수업이 진행되긴 해?”

케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진행하기로 했어. 이런 상황에서도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있는 한은 학술원 수업은 계속 열고 싶다는 게 교수님 생각이고, 학술원도 그렇게 하자고 했어. 그리고…….”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텅 빈 별궁 회랑을 둘러보며 소리를 죽여 말했다.

“치료제를 개발하려면 어쨌든 학술원에 자주 들르는 게 나아.”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내가 널 걱정시키나?”

“언제나?”

엘리자베스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케이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케이는 굳은 얼굴로 엘리자베스와 마차에 올랐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아주 가깝게 느꼈는데 오늘은 또 멀어진 느낌이 들었다.

케이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을 때 엘리자베스는 서늘한 기분을 느꼈다. 레트니 애비뉴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엘리자베스의 호위를 위해 보내진 세 명의 보비들과 엘리자베스, 그리고 케이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다.

“왜 사람이 없어?”

엘리자베스가 흠칫 떨며 묻자 케이가 텅 빈 거리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여긴 레트니 애비뉴잖아. 귀족이 사는 거리고, 귀족들의 마차를 털어가는 레지스탕스들이 있다는 얘기가 돌았던 모양이야. 뭐 사실인진 모르겠지만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귀족들에게 중요하지 않겠지. 정치적인 보복이든, 물리적인 보복이든, 귀족들은 평민들에게 자신들이 보복을 당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귀족들에겐 노동조합도 일종의 보복이고.”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케이의 팔을 잡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떨리는 손을 쥐고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거봐. 돌아가는 게 좋겠지?”

“아니. 그러니까 돌아가지 않는 게 좋겠지.”

엘리자베스는 떨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케이가 눈썹을 꿈틀했다.

“왜?”

“이런 곳에 프란시스가 혼자 있는 거잖아. 앰버도 요새는 모건의 관저에서 지낸다고 했고.”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프란시스 하나도 지키지 못할까 봐? 사람을 심어놨어.”

케이는 보비들을 힐끔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리고 사람을 심어놓은 게 아니더라도 레트니 애비뉴에 도는 긴장감은 정확히 말하면 과대망상에 가까워. 귀족들은 그냥 두려운 거야. 가진 걸 내려놓는 게.”

“하지만 우리 로킨트로 가는 길에 창문이 깨진 가게들을 봤잖아.”

엘리자베스가 반론을 제기하자 케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레트니 애비뉴가 아니지. 그런 곳에서 일어난 테러들이 진짜로 전부 평민들의 짓거리라고 생각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뒷목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가짜 테러.

엘리자베스는 그걸 눈앞에서 본 적이 있었다.

경찰청을 테러한 바로 그자 말이다. 그자는 마치 평민들을 위해 그런 짓을 한 것처럼 일을 꾸몄지만 사실은 국왕과 내통한 자였다. 물론 레트니가 경찰청 방화를 사주한 데에는 클레몬트 공작 부부를 죽이려는 1차적인 목표가 있었겠지만 나아가 평민들의 폭력적인 행동을 부각시켜 계급 사회를 강화시키고자 하는 목표도 분명히 존재했을 것이다.

레트니가 사라진다고 해서 진짜로 레트니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성벽 밖의 왕이 성벽 안에서 여전히 건재함을 느꼈다.

‘왕이 돌아왔다!’

니콜슨 공작의 그 말이 귀족들에게는 이미 레트니가 돌아온 것처럼 느끼게 했을 것이다. 레트니의 망령은 지금 귀족들 사이에 돌아다니며 평민들에 대한 분노를 부추기고 ‘자신의 것이어야 했던 것들’을 빼앗긴 듯이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멀리서 걸어오는 토비와, 토비의 얼굴에 길게 나 있는 흉터를 보며 어지러운 기분을 느꼈다.

“도련님! 아가씨!”

토비의 목소리를 들으며 씨익 웃던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힐끔 보며 말했다.

“그럼 역시 어쩔 수 없네.”

“뭐가?”

“뭐긴 뭐야. 네가 여기에 있겠다고 고집을 부리니까 나도 여기에 있어야겠지.”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같이 사는 거야. 괜찮지?”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보며 껄렁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어서 케이의 어깨를 주먹으로 때렸다. 하지만 케이는 재밌다는 듯이 토비에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프란시스는? 내가 할 얘기가 있다고 전해.”

* * *

오랜만에 만난 프란시스는 한결 몸이 가뿐해 보였다.

케이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책장이나 선반, 소파 아래 같은 곳을 살폈다. 프란시스는 그걸 보며 얼굴을 구겼다.

“내가 술이나 궐련을 숨겼을까 봐?”

“네.”

케이는 프란시스가 자신을 노려보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계속 집을 뒤졌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나중에는 토비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마님한테서 술 냄새나 궐련냄새가 나는지 맡아보고 와라.”

토비는 케이의 명령에 쭈뼛거리며 프란시스에게로 걸어갔다. 프란시스는 가까이 오는 토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케이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곤 손목을 불쑥 케이의 눈앞에 들이밀고 이렇게 말했다.

“직접 맡아봐도 좋다. 케이.”

“그럴 생각 없…….”

케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 프란시스가 갑자기 케이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케이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케이가 당장 프란시스를 떼놓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프란시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개 같은 자식. 절대로 다시는 켄드릭 같은 놈 때문에 인생을 망칠 생각 같은 거 하지 마라. 알았니?”

프란시스의 말에 케이는 머뭇거리다가 프란시스를 살짝 밀었다. 케이는 프란시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떨어져요.”

“흥. 너는 방금 내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아보라고 하지 않았니? 건방진 놈.”

프란시스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 쪽으로 돌았다. 프란시스는 엘리자베스를 품 안에 꽉 안았다. 엘리자베스도 어린 아이처럼 프란시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프란시스는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다가 엘리자베스의 몸을 살짝 떼어내곤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그러쥐었다.

“걱정했어. 쓰러졌다고?”

엘리자베스는 프란시스의 질문에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굳어진 얼굴로 물었다.

“큰 문제는 아니었어요. 것보다 제가 얘기를 안 해드렸던 것 같은데…….”

“쓰러지는 게 어떻게 큰 문제가 아니야? 충격을 받은 거지. 전쟁이라니. 모든 사람들이 다 충격에 빠졌어. 너도 많이 놀랐겠구나. 안 되겠어. 내가 정어리 파이를 좀 구웠으니까 먹고…….”

“정어리 파이요?”

케이는 얼굴을 구겼다.

“요리 같은 거, 해본 적은 있어요?”

케이의 질문에 프란시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어렸을 땐 내가 두 오빠들 식사를 준비했어. 넌 내가 하커 저택에서 그림처럼 걸려 있기만 하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구나. 난 레트니 애비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귀부인 따위가 아니야.”

“그런 말, 길거리에선 하지 않는 게…….”

“시끄럽고! 얼른 재킷을 벗고 앉아라.”

“할 말이 있어요.”

“그래. 그래. 알겠으니까—”

“……저 당분간 여기에서 지낼 거예요.”

케이의 말에 프란시스가 분주하게 식사실로 걸어가다가 멈춰 섰다. 프란시스뿐만 아니라 콜린과 토비, 메리도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자신에게 시선을 보내는 이들에게 뭐가 문제냐는 듯이 말했다.

“엘리자베스가 별궁이 아니라 여기서 지내겠다고 해서요. 그러니까 메리, 방을 두 개 준비 좀 해줘. 군식구가 늘어 번거롭겠지만 요새 어디서 새로운 하녀를 들일 수도 없으니까 당분간은 참아. 급료를 조정해주지.”

메리는 케이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방…… 두 개요?”

메리의 질문에 케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시 메리의 말을 곱씹으며 머뭇거리던 케이의 귀와 뺨이 금세 잔뜩 빨개졌다. 케이는 현관에 있는 부지깽이를 괜히 발로 차며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당장 방 두 개를 내놓으라고!”

메리는 키득거리며 얼른 위층으로 올라갔다.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참느라고 고생하는 콜린과 토비의 표정이 케이의 눈에 띄었다. 케이는 두 사람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두 사람 다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단 한 사람, 프란시스만큼은 웃지 않았다. 프란시스는 그런 케이를 가만히 보다가 엘리자베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곤 다시 케이를 보며 물었다.

“그럼 앰버는?”

케이는 프란시스의 말에 빨개졌던 얼굴이 다시 원래로 돌아왔다. 프란시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엘리자베스를 우습게 만들지 마라. 약혼녀가 있는 남자와 같이 사는 건 엘리자베스를 우습게 만드는 일이야.”

“저는 앰버한테 청혼하지 않았어요.”

케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프란시스에게 대답했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케이를 보았다.

“둘이 결혼할 거라고 했잖아. 앰버를 안전하게 지켜줄 거라고.”

엘리자베스는 솔치노 호텔에서 케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우린 약혼할 거야. 나는 앰버를 지켜주고, 앰버는 안전하게 멜니아에서 지낼 거야. 우린 네 말대로 본질이 비슷한 사람들이니까 아마도 평온하겠지.’

그런데 청혼도 하지 않았다고?

형식적으로라도 무릎을 꿇고 반지를 내밀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다 너랑 앰버가 결혼할 거라고 했어.”

엘리자베스가 혼란스러운 듯이 말하자 케이가 프란시스를 보며 말했다.

“사람들이 그렇게 떠들게 내버려뒀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그 이유만큼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프란시스는 케이를 노려보며 그대로 서 있었다. 프란시스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 이유가 뭔데?”

“…….”

케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프란시스에게는 대답할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을 엘리자베스는 잘 알고 있었다. 케이는 프란시스에게 참정권 운동가들에 대해 이야기해서 그녀가 그런 일들에 관여하게 만들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프란시스가 케이의 얼굴을 가만히 보며 말했다.

“것 봐. 넌 아무 말도 못 하잖니. 그러니까 넌 어쨌거나 엘리자베스를 저버린 거야. 네가 일방적으로 약혼을 깼고 또 앰버와 같이 도망갔어. 그건 변하지 않아.”

케이는 프란시스의 말에 또 대답하지 못했다. 케이의 얼굴은 어두워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손을 뻗고 싶었지만 프란시스가 곧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쪽으로 당겨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뭐야? 엘리자베스를 모욕하는 건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 지금이라도 두 사람이 다시 약혼한다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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