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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39화 (239/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39화

거기엔 초췌한 얼굴의 케빈이 서 있었다. 케빈은 쭈뼛거리며 문 앞에 서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며 케이에게 말했다.

“선생님을…… 쫓아가봐.”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다.

“넌 따라와.”

그러고는 케빈의 팔을 잡아 중정으로 이끌었다.

* * *

중정의 벤치에 앉은 엘리자베스는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는 케빈을 보았다.

엘리자베스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라듐 얘기, 너도 들은 거야?”

그녀는 케빈이 괜히 도서관 근처를 서성거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케빈은 아마도 아까까지 엘우드와 함께 도서관에서 라듐에 관한 논문을 연구하고 있었을 것이고 엘리자베스와 케이가 오는 것을 보고 중정으로 나와 숨은 것일 테다.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뭐……. 아루쉬가 그 논문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선생님한테 논문도 찾아드리고 라듐을 조사 가능한 형태로 바꾸는 방법도…….”

“방법이 있어?”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희망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목소리를 듣고는 얼른 엘리자베스의 옆에 와서 앉았다.

“방법이 있다고 하면, 해볼 거예요?”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말에 망설였다.

“잘못 되면?”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빈이 자신없게 말했다.

“……그건…….”

“너도 확신하지 못하잖아.”

“하지만 케이 생각은 다를 수도 있잖아요.”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고는 발끈해서 말했다.

“또 나한테 상의 없이 세 사람이 작당모의라도 할 생각이라면 그만 두는 게 좋겠어.”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노려보았다.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눈빛을 바라보더니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 그땐…… 그땐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치료제는 하나 남았고 케이는 물렸고 엘리즈는 보비들한테 조사를 받고 있었고 나는 그냥 케이한테…… 그니까…….”

“조금 있다가 얘기하자고 했다?”

“그래요. 그랬죠. 그런데…… 케이가 절대 엘리즈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말하면 가만 두지 않는다고. 물론 그 말을 따른 건…… 그건 잘못이지만…….”

케빈은 눈물이 고인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쳐다보았다.

“엘리즈라면 어떡하겠어요. 나는…… 나는…….”

케빈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조금 놀랐다. 케빈의 얼굴이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년 티를 조금이나마 벗었다고 여겨졌던 케빈은 어린 아이처럼 볼이 팅팅 부어서는 코를 벌름거렸다.

케빈은 빨개진 얼굴을 제 손으로 가려보았지만 이미 엘리자베스가 그의 얼굴을 다 본 뒤였다.

케빈이 말했다.

“나는 엘리즈를 좋아한다구요. ……흐흑……. 엘리즈가 죽으면 나는…… 어떻게 해요……. 진짜 너무 하잖아요. 엘리즈는 케이를 위해서 죽겠다고 하면서 나보고는 엘리즈를 살리지 못하게 하면……. 나는 엘리즈를 미워할 거야. 평생 영원히. 엘리즈만 미워하면서 평생 혼자 살 거야…… 흐흑…… 흑…… 평생이요…… 내가 그러길 바라는 거예요? 네?”

케빈이 훌쩍거리는 걸 들으며 엘리자베스가 입을 벌렸다.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얼얼했다. 내가 이 어린 아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빨개진 얼굴을 보려고 고개를 숙였다.

“케, 케빈…….”

하지만 케빈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케빈은 그저 귀까지 얼굴이 빨개져서는 얼굴에서 손을 살짝 떼서 눈만 내밀고 엘리자베스를 힐끔 보았다. 그러곤 훌쩍거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난 후회 같은 건 안 해요. 절대! 난 다시 돌아가도 엘리즈를 구할 거라고요! 비겁하다고 해도 소용없어요! 그딴 걸로 사과는 절대 안 할 거예요!”

그때였다.

“으악!”

커다란 인영이 불쑥 케빈의 뒤에서 나타나더니 그의 몸을 휙 낚아채들었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케빈의 뒷덜미를 말 그대로 낚아채서 던져버린 케이를 보았다.

“케이 하커!”

“내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 어린 소년들이 얼마나 지저분한 생각을 하며 사는지.”

졸지에 바닥에 내팽개쳐진 케빈은 시뻘게진 눈으로 케이를 노려보았다.

“이봐요! 왜 나, 나, 나, 남의 말을 엿듣고 그래요?!”

시뻘겋게 달아오른 케빈의 얼굴은 곧 터질 것 같아 보였다. 케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엿들어? 누가? 어떤 애새끼가 징징거리는 소리가 창문을 뚫고 다 들리길래 와본 것뿐이야.”

“케이! 닥쳐. 그만하란 말이야! 그리고 케빈 옷 놔줘! 너 지금 힘이 너무 세잖아!”

엘리자베스는 다시 케빈을 들어올리려는 케이에게 소리쳤다. 케이는 주저앉은 케빈에게 손을 뻗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몸에 묻은 흙을 털어주며 말했다.

“왜 사람을 던지고 그래! 케빈, 괜찮아?”

“괜찮겠어요?! 진짜 어떻게 괜찮겠냐구요! 내 몸에 손대지 마요!”

케빈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엘리자베스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엘리자베스는 놀라서 뒤로 움찔 물러나다가 마찬가지로 버럭 소리를 지르며 반격했다.

“나, 나한테 소리 좀 지르지 마! 이 성격 나쁜 과학자 놈들아!”

“아니…… 나, 난…….”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분노한 눈을 보더니 더듬거리며 제 몸에 묻은 흙을 털었다.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케빈에게 손을 뻗었다.

“잡아! 일어나라고!”

케빈은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며 머뭇거리다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그 꼴을 더 보고 있기 힘들다는 듯 케이가 고개를 돌렸다. 케빈이 훌쩍거리며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일어나자 엘리자베스는 케빈을 힐끔 보며 말했다.

“나한테 거짓말한 거…… 정말 안 미안해?”

케빈은 엘리자베스의 시선을 피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미안해요.”

“……그래도 괜찮아.”

“네?”

“내가…… 내가 너 용서해줄 거야. 너도 용서해줬잖아. 여러 번. 내가 너한테 거짓말하고…… 퀴닌도 훔치고…… 날 죽여달라고…….”

엘리자베스는 이곳에서 지금처럼 눈이 시뻘게진 채 눈물을 뚝뚝 흘리던 케빈을 떠올렸다.

그때의 케빈은 비를 잔뜩 맞아서 지금보다 더 축 처져 있었다. 당시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그녀를 좋아하는 줄 몰랐지만, 만일 알았다고 해도 케빈이 아니라면 그런 부탁을 할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죽여달라는 말을 들은 기분이란.

‘네 부모의 원수. 나를 죽일 기회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떠올리며 얼굴을 구겼다. 그때를 생각하니 케빈의 마음이 마치 제 마음처럼 이해가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에게 말했다.

“근데 너는 다 용서해줬으니까. 그랬으니까. 나도 너 용서해줄게. 한 번쯤은 더 용서해줄 수 있어. 두 번은 안 돼.”

엘리자베스는 왜인지 모르게 눈물이 차올라서 눈을 마구 비볐다. 그런 엘리자베스를 보며 케빈이 중얼거렸다.

“엘리즈…….”

케빈이 저도 모르게 엘리자베스에게 가까이 걸어가자 케이가 케빈을 잡아당겼다. 케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며 훌쩍거리다가 이내 울기 시작하는 것은 막지 못했다.

“미안해요…… 용서해줘요!”

“……용서했다니까!”

엘리자베스와 케빈은 한참이나 그런 실랑이를 하며 거기에 서 있었다. 케이는 그 둘 사이에서 맘에 안 드는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 * *

케이는 엘 선생은 방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케이가 몇 번이나 방문을 두드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이것뿐이었다고.

‘그냥 둬라. 자살하거나 자해하진 않으니까. 생각이 정리되면 엘리즈에게 얘기할 거야.’

별 수 없이 엘 선생이 빠진 채로 엘리자베스와 케이, 그리고 케빈은 중정에 둘러앉아서 치료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네 생각은 어떤데?”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사실 두 사람이 설명하는 라듐이 어쩌고저쩌고 그런 말은 이해 못하겠어. 그냥 단순하게 이해한 건 라듐이 나에게 독이기도 하고 약이기도 하다는 거지.”

마치 너처럼.

케이는 뒤에 말은 하지 않고 눈이 벌게진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뭐 어쨌든. 밑져야 본전이긴 하겠지. 가만히 앉아서 죽는 걸 기다리는 것보다야 망하더라도 실험체가 돼서 망하는 게 나으니까.”

“하지만 실패하면 그냥 망하는 게 아니라 죽어!”

엘리자베스가 소리 지르자 케이가 오만하게 웃으며 엘리자베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엘리자베스는 불안한 눈으로 케이를 내려다보았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꼭 잡았다. 케빈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돌렸다.

케이가 말했다.

“실패보다 경계해야 하는 건 실패조차 하지 않는 거라고, 오늘 누가 말했지?”

“그건…… 그건…….”

엘리자베스는 속상한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엘리자베스의 손이 가늘게 떨려왔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떨리는 손을 잡고 생각했다.

내가 죽고 안 죽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네가 말했지.

너는 언제나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쪽을 고른다고.

그런데 내가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죽으면 넌 반드시 후회할 거고, 나는 네가 후회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죽어서도 목이 졸리는 기분이 들 거니까.

적어도…….

적어도 그건 하지 말아야겠지.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공포에 질린 눈동자를, 그 파랗고 예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케이는 욕심 같은 게 들었다. 더 살아보고 싶다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살고 싶다.’

그 말이 그저 엘리자베스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어느새 케이는 그 말이 자신의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둥지를 틀어버린 것을 느꼈다.

나는 나를 사랑할 수가 없어서 언제나 죽고 싶었는데, 내 안에 비워져 있는 나에 대한 사랑의 자리를 너에 대한 사랑이 채웠다.

이럴 수도 있는 건가. 남을 향한 마음이 나에게 이렇게 돌아올 수도 있는 건가.

로버트 하커를 향한 미움이 결국 케이에게 돌아왔듯이 엘리자베스를 향한 사랑도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거라는 걸, 케이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는 엘리자베스의 떨리는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우고 말했다.

“가만히 앉아…… 이렇게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을 견딜 수 있겠어? 너라면. 그럴 수 있겠어? 너를 내 곁에 두고 무기력하게 죽음이나 기다리라고 하면 내 기분이 어떨지, 너는 알고 있잖아.”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갈색 눈동자를 보며 처음으로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했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살고 싶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케이의 갈색 눈동자 속에 담긴 그 모든 문장들이 엘리자베스의 안에도 있는 것들이었으므로.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손을 꽉 쥐고 말했다.

“좋아. 그럼.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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