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38화
‘곧잘 피우네.’
‘그래.’
‘누구한테 배웠지?’
‘배웠다기보단 그냥 보고 따라한 거야. 몇 번.’
‘누굴?’
엘리자베스는 로킨트 펍에서 케이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녀는 그날 자신이 따라했던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전부 나잖아.”
케이가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담장에 담배를 비벼 끄고 담배 연기를 후 불어 재빨리 날리는 것을 보았다. 꽁초를 구겨서 내던진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내가 귀족들의 말투를 따라한 건, 사교계의 예의범절 따위를 흉내 낸 것도 전부 보고 따라한 거야.”
“누굴?”
엘리자베스는 대답을 알면서도 물었다.
“너.”
케이는 제 재킷에 흘러내린 재 가루를 털어내고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엘리자베스의 몸이 케이에게 기대었다.
“그러니까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도,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도, 거짓말이 아니야. 켈토에 함께 가고 싶다는 것도. 동시에……. 내가 없어도 넌 괜찮았으면 좋겠다는 것도 진심이지만.”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향해 오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이번에도 알 수 있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 * *
왕립학술원에 도착했을 때 엘리자베스는 그 고요함에 다소 놀랐다. 일반 가정집 같으면 이미 다들 잠들었을 시간이었지만 왕립학술원의 이 시간은 보통 기숙사며 연구실이며 할 것 없이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대낮 같은 시간이었다.
불이 꺼진 연구실과 기숙사 방의 창문을 보니 조금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엘리자베스는 불이 켜진 도서관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도서관 입구에 있는 천장 유리로부터 희미한 월광이 흘러들어왔다. 엘리자베스는 입구 문을 드르륵 소리가 나게 열었다. 그러자 텅 빈 도서관에서 유일하게 채워진 책상 하나에서 책에 빠진 엘우드 밀이 보였다.
엘우드 밀은 케이와 함께 들어오는 엘리자베스의 기척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 듯 책에만 빠져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 근처로 걸어가 그를 불렀다.
“선생님…… 선생님!”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의 부름에 퍼뜩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순간 엘우드 밀이 읽고 있던 갸흐통어로 된 홀램브로 학술지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시선을 느낀 엘우드 밀이 화들짝 학술지를 덮는 것을 보며 물었다.
“뭘 보는데 그렇게 집중하고 계세요?”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와 케이를 번갈아 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넌 왜 이렇게 기척 없이 들어오고 난리야! 게다가 이 술 냄새……! 루이 교수님이 계셨더라면 널 당장 학술원에서 제명시키자고 하셨을 거다!”
엘우드가 엘리자베스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등 뒤로 걸어와 엘우드 밀을 노려보았다. 엘우드 밀은 약간 기가 죽은 얼굴로 홀램브로 학술지를 품에 안았다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교수님들은 전부 퇴근하셨나 봐요? 불이 다 꺼져 있네요?”
“그래. 다들 퇴근하셨다. 자의는 아니지만?”
“네?”
“자정이 지나면 통행금지가 생겨서 자정 넘어서는 거리를 돌아다닐 수 없다는데? 이런저런 작당 모의들 하지 말고 집에나 들어가라, 그런 뜻이지. 그러니 나처럼 학술원을 집으로 여기는 이들만 학술원에 남아 있고 나머지 애들은 다 집으로 가더라. 통근 시간도 조금 조정되었으니 이 김에 집에 가서 쉬겠다는 거지. 그리고 학술원 놈들 대부분이 잘 나신 귀족 영식들 아니냐. 평민들과 같이 어울리지 말고 집으로 돌아오라는 식의 분위기가 있나 보더구나.”
엘우드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흥겨운 분위기로 앰버의 노래를 듣다보니 지금이 전쟁통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엘우드 밀이 케이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일은 다 잘 된 건가? 아픈 놈을 끌고 다니면서 해결해야 되는 그 대단한 일 말이야!”
엘우드 밀의 말에 케이가 불퉁하게 대답했다.
“뭐, 그렇습니다만, 엘 선생님.”
“근데 왜 자꾸 엘 선생님이야?”
엘우드 밀이 얼굴을 확 찌푸렸다가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얼굴이 펴졌다.
“아, 너 그러고 보니 엘리즈의 기억을 전부 가지고 있겠구나!”
케이는 그 말에 엘우드 밀이 앉아있는 책상을 쾅 내리치며 말했다.
“그래. 다 갖고 있어. 네놈이 엘리자베스를 얼마나 지독하게 다뤘는지도 알고 있지.”
“어? 아니, 어…… 그건…….”
엘우드 밀은 케이의 살기가 이글거리는 눈동자를 보더니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할 말을 찾아 헤매는 듯한 엘우드에게 케이가 다시 한번 세게 책상을 내리치며 말했다.
“다시 한 번 엘리자베스한테 소리치면…….”
“가만 두지 마.”
엘리자베스는 얼른 말을 이었다. 그러자 엘우드 밀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선생님 소리 지르시는 거 아주 안 좋은 습관이에요. 툭하면 물건을 던지거나 남에게 모욕을 주는 것도요. 이제는 정말 고치셔야죠. 다 선생님을 위해서…….”
“아, 시끄러워! 그게 다 네가 멍청하니까 내가 답답해서 소리 지르는 거 아니냐!”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의 말에 버럭 소리를 지르며 학술지를 내던지곤 엘리자베스를 모욕했다. 엘리자베스는 혀를 끌끌 차며 엘우드 밀이 내던진 학술지를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갸흐통의 여성 과학자가 발견한 라듐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집어 들려고 했다. 하지만 엘우드가 더 빨랐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이 재빠르게 학술지를 회수하는 걸 보며 놀란 눈으로 말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운동신경이 좋으셨어요?”
“허 참! 난 뭐 그럼 딱딱한 나무토막인 줄 알았냐?”
“……네. 당연하죠.”
엘리자베스의 말에 엘우드가 케이에게 쏘아붙였다.
“얘 데리고 돌아가라!”
“내가 분명히 방금 엘리자베스한테 소리 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엘 선생.”
케이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엘우드 밀의 멱살을 쥐려는 것을 가까스로 말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엘우드 밀을 멀찌감치 떨어뜨려놓고는 두 사람 사이에 들어가 말했다.
“왜 홀램브로 학술지를 갸흐통어로 다시 보고 있어요? 레본어로 된 거 보는 거 봤는데.”
엘우드 밀은 학술지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며 말했다.
“레본어로 된 거는 오역이 너무 많아서 못 보겠어. 나한테는 이제 갸흐통어가 더 편하다고. 그래서 이걸로 보는 거다. 왜?”
“아뇨. 그냥…….”
이상하게 라듐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엘우드 밀이 중얼거렸다.
“……아루쉬인지 뭔지가 한번 보라고 해서 봤는데……. 뭐 나름 도움이 되는 것도 있는 것 같고.”
엘리자베스는 엘우드의 말에 도서관 안을 둘러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아루쉬는요? 며칠간 약속을 못 지켰는데!”
“그래! 안 그래도 그 약속 때문에 내가 오늘 붙잡혀서 그 자식한테 레본어로 된 논문을 좀 가르쳐줬다. 그런데 아루쉬가 계속 이 논문을 보고 싶어 해서 고생 좀 했지. 대체 제대로 번역된 게 없더구나. 특히 이거 말이야. 방사능 물질의 안정성에 대한 부분이…….”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에게 답답했던 모든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들으며 대답을 해주었다.
엘리자베스 역시 그 홀램브로 논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라듐 같은 물질에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었고 논문을 실은 갸흐통 과학자가 여자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뒤에 서서 엘리자베스와 엘우드 사이에 오고 가는 어려운 과학 용어를 들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 이내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도서관에서 중정을 향해 난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때 창문 밖에서 뭔가가 휙 지나갔다.
케이가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러니까 내 말은 방사능이 체세포를 없애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이게 좀…… 이게 말이야…… 좀…….”
하지만 케이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엘우드 밀은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의아한 얼굴로 엘우드 밀을 보았다.
“그게 뭐요? 논문에 오류가 있다는 말씀이세요?”
“아니. 아닌데.”
“그럼요?”
“‘도움이 된다’를 레본어로는 ‘체세포를 없애는 위험성이 있다’고만 번역했잖아. 그런데 이 저자는 사실 ‘도움이 된다’라고 썼다고. 넌 이게 무슨 말인 것 같냐?”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엘우드 밀은 가끔 이렇게 그녀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곤 알아듣지 못한다고 화를 내곤 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래서 엘우드 밀이 곧 화를 낼 거라는 생각으로 고요하게 엘우드의 화를 기다렸다.
하지만 웬일로 그는 화를 내는 대신에 나지막이 말했다.
“……그건 없어져야 하는 체세포도 있다는 말이지. 우리 몸에. 이를테면 바이러스나 기생충…… 촌충…… 뭐 그런 거에 감염된…….”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엘우드의 말은 이 방사능이 일종의 ‘치료제’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건가? 아주 미량을 우리 몸에 필요가 없는 세포에 조사하면 치료제가 되기도 한다는……?
엘리자베스는 아주 천천히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하, 하지만……. 하지만……. 이 물질이 묻은 탄환은 몰록을 죽이는 데에 쓰였어요.”
케이는 몰록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엘우드 밀을 보았다. 엘우드 밀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주 극소량의 독이 오히려 몸에 좋은 경우도 있지. 유황 같은 거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런 추측을 확인할 방법이 없잖아요. 너무 위험한 일이에요.”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등 뒤에서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건드렸다.
“무슨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소리쳤다.
“케이를 죽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실험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어!”
“……디트리히 폰한테 한 것처럼 지금 케이 하커를 데려다가 생체 실험을 하겠다는 거예요?!”
엘리자베스가 소리치자 그 순간 엘우드 밀의 몸이 굳었다. 정작 그 말을 한 엘리자베스는 입을 틀어막았다.
잠시 그대로 멈춰 있던 엘리자베스가 다급하게 말했다.
“저…… 제 말은…… 제 말은요…….”
엘우드 밀은 굳은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가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던지길 바라며 그대로 서 있었다. 하지만 엘우드 밀은 곧 무너지듯 자리에 앉더니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아주 잠깐……. 잠깐 내가 위험한 꿈을 꿨다. 또 말이야. 또…….”
“저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전 선생님을 비난하려던 게…….”
엘리자베스가 다급하게 엘우드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엘우드는 짐을 챙기더니 도서관 문을 나갔다.
엘리자베스가 엘우드를 따라가려고 할 때였다.
중정에서 도서관으로 통하는 문이 벌컥 열렸다.
여름 바람이 시원하게 들어왔다. 엘리자베스는 그쪽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