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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37화 (237/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37화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눈을 보며 로킨트 저택에서 케이를 기다리던 순간을 떠올렸다.

길고 널찍한 로킨트 스트리트를 바라보며 쉐필드의 지평선을 떠올렸던 아침. 점심. 저녁. 매일매일.

너를 지루하고 평화로운 내 인생에서 나를 꺼내주기 위해 나타난 야단스럽고 대단한 녀석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날도 있었는데.

엘리자베스는 초라한 케이의 마음을 지키고 서서 케이의 뺨을 잡아당겼다. 한때는 너를 이 세상에서 가장 멀게 느꼈는데. 엘리자베스는 지금의 케이가 느끼는 두려움을 심장으로 똑같이 느꼈다. 이 작고 어린 마음을.

엘리자베스 역시 느껴봤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며 내뱉는 말들을 들었다.

“내가 널 망칠 거야. 내가 널 다치게 만들 거고 너는 나를 떠나겠지. 전부 괜찮아. 네가 떠나고 혼자 남겨지는 것도, 외롭게 죽는 것도 상관없어. 하지만…….”

홀 무대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이제 네가 나갈 차례다! 가라! 조심히 나가라! 나가라! 와!1)

박수와 환호성 소리가 앰버의 목소리에 반주를 맞춰주어 밴드의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앰버는 남자 음역대를 소화하다가 후렴에서는 갑자기 음을 높여 불렀다. 엄청난 고음이 홀을 가득 메웠다.

엘리자베스는 이제 그 누구도 앰버를 비웃을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화려한 무대 위에 서 있을 앰버가 아니라 어두운 그늘 아래 서 있는 케이를 보았다.

케이는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네가 날 생각하면 끔찍할 거라는 게. 나를 악몽쯤으로 생각할 거라는 게. 그게 그냥 너무 견디기가 힘들 뿐이야.”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아 끌어내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비 맞은 강아지처럼 떠는 케이를 보니 차마 그럴 수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사랑이 너를 두렵게 하나.

네 사랑은 언제나 나를 용기 내게 했는데.

그랬는데.

왜 나는…….

왜 너에게 나는…….

엘리자베스는 불쑥 화가 났다.

그녀는 케이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피를 닦지 않은 채 그대로 케이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댔다. 피가 두 사람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케이가 힘을 주어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떼어냈다.

“뭐 하는 짓이야!”

케이가 화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어지러운 듯 뒤로 물러나 기둥을 짚는 걸 보다가 케이의 몸을 더 기둥으로 몰아붙였다.

“이렇게…… 이렇게 키스해도……. 너는 절대로 나를 망칠 수 없어. 두고 봐. 두고 보란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거친 숨을 뱉으며 케이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케이는 자신을 덮쳐오는 커다란 욕망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어떻게……. 어떻게 알아.”

“난 알아……. 나도 해봤으니까, 나도 알아…….”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케이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그러자 케이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엘리자베스를 들어올렸다. 엘리자베스는 순식간에 케이의 몸에 기댄 채로 등을 기둥에 기대게 되었다.

그녀는 기둥에 기대어서 케이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케이의 입술 사이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케이가 고통스러운 얼굴로 엘리자베스의 허벅지를 지탱하며 말했다.

“젠장……. 젠장할…… 너 돌았어……?”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케이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앰버의 노래가 끝나가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목에 손을 두르고 쉴 새 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네가 나를 먹을 수는 없어.

내가 너를 먹을 수 없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케이에게로 파고들었다.

내가 너를 생각하면 끔찍해질 일도 없어.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 때문에 나도 살고 싶었으니까.

살아 있다는 건 언제나 좋은 일이니까.

이것은 용기의 축제니까! 용기 있는 자들의 축제니까!

앰버의 목소리가 홀을 가득 채웠다. 남자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무대 위로 모자가 날아들었다. 꽃과 동전이 아닌, 경의의 표시였다.

케이의 몸이 자신을 짓누르는 무게감을 느끼며 케이의 입술에서 제 입술을 뗀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케이와 자신의 타액이 묻어나오는 손가락을 바라보던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말했다.

“봐. 너는 내 피를 다 마셨고 그래도 넌 날 먹지 않았지. 이건 네가 날 먹을 수 없다는 뜻이야. 넌 내 것이고, 나 역시 네 것이라는 뜻이야. 다신…… 다신 떠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마. 다신 그런 말은 입에 올리지 마.”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눈에 고인 눈물을 핥아 마시면서 대답했다. 케이는 여전히 고뇌로 일그러진 얼굴이었지만 대답만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래. 나는 네 것이야.”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입술을 삼켰다.

그리고 케이의 말은 진심이었다. 우리가 함께 할 수 없다고 해도, 나는…….

나는 네 것이니까.

* * *

노스리오든은 밤늦게까지 거리를 지키는 보비들 덕분에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함께 밤거리를 걸으며 저 멀리서 티 나게 쫓아오는 사복을 입은 보비들을 바라보았다. 케이는 술에 취한 엘리자베스가 투우사의 노래를 부르며 앞장서서 걸어가면 얼른 잡아다가 자신 쪽을 당겼다.

“내 옆에서 걸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팔을 뿌리치며 말했다.

“나 혼자 걸을 수 있어.”

케이는 그렇게 말하곤 또 ‘당신들의 건배를 위하여 이 잔을 돌려주겠소……’라는 첫 소절을 시작하는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3층에서는 케이를 잔뜩 괴롭히던 엘리자베스는 얼른 1층으로 내려갔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뒤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고 케이는 그녀의 기분을 나쁘게 만든 원흉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이 사람, 저 사람이 내미는 술을 모두 사양하지 않고 받아마셨다. 그러고는 앰버에게 모자를 씌워주며 노래를 불러달라고 진상을 부렸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 술을 권하는 남자들을 노려보았지만 남자들은 케이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술에 취한 건지 앰버의 노래에 취한 건지, 모두들 광대가 벌겋게 달아올라있었던 것이다.

“당신들의 건배를 위하여 이 잔을 돌려주겠소……!”

그리고 계속해서 끝난 노래를 부르며 소리쳤다.

“우리가 전쟁에서 이길 거야! 레트니? 그까짓 새끼들이 남부에서 몰려와봤자라고. 리오든에는 우리들이 지키는 공장이 있어!”

“나는 공장 입구까지 남부군이 몰려오면 쇳물을 그쪽으로 부어버릴 거야!”

“크크큭…… 그럼 내가 그 쇳물 가지고 배를 만들지. 일명 적군의 피로 만든 함선!”

엘리자베스는 그런 남자들 사이에 껴서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눈은 어린 수달처럼 동그랗게 빛나고 팔다리는 버둥거리는 꼴이란.

케이는 그 귀여운 모습을 보며 남자들이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는 것이 상당히 맘에 들지 않았다.

그는 엘리자베스가 술에 취해가는 모습을 한참 참았으나 결국 엘리자베스가 무대 위로 올라가 춤을 추겠다고 자원하는 순간 엘리자베스를 어깨에 들쳐 메고 홀에서 나왔다.

어깨에 들쳐 메진 채 입구로 나온 엘리자베스는 계속해서 다시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학술원에 가야 하지 않냐는 말에 승복했다. 하지만 속이 안 좋아서 마차는 탈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기에 케이는 마차만 학술원으로 보낸 후 노스리오든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당신들의 건배를 위하여 이 잔을 돌려주겠소!”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투우사의 노래의 딱 한 소절만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걷기 시작한지 5분 만에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가 노래에 소질이 없다는 것도.

엘리자베스는 엎어질 뻔하거나 또는 토할 뻔하면서 한참을 걷다가 학술원 바로 앞 담장에서 멈춰 섰다.

그녀는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어 물고 한 모금 길게 빨아들인 다음 케이에게 내밀었다.

“안 피워.”

“왜? 술은 마셨잖아.”

혀가 꼬이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케이는 학술원을 들르겠다는 계획을 취소하는 것이 옳았음을 직감했다.

“그건 냄새가…….”

네 냄새가 너무 강해서 마셨을 뿐이야.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작은 입술이 오물거리며 담배를 찾는 것을 보며 다음 말을 삼켰다. 몇 걸음 뒤에 사복 보비들이 있었다. 승냥이 같은 저놈들은 조지 국왕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테니 큰 문제는 일으키지 않을 테였지만 작은 단서라도 쥐어주면 바로 국왕에게 가서 나불거릴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얼굴에 대고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케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넌 나를 믿지 않아. 그렇지?”

엘리자베스는 담장에 기대어 서서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입을 굳건히 닫고 모자챙을 만지작거렸다.

“……같이 켈토로 가자는 말도 거짓말, 내가 널 사랑한다는 말을 믿는다는 것도 거짓말, 우리가 서로의 것이라는 것도 거짓말이야. 난 네가 거짓말을 할 때 표정을 알아.”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휘청거리는 시야 속에서도 케이를 주시했다. 케이는 짝다리를 짚고 삐뚤빼뚤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거짓말 아니야.”

거짓말.

공개 재판에서 나와 공작부부를 배은망덕하다고 말할 때도 너는 그런 얼굴을 했지.

삐뚤빼뚤하고 오만한 미소.

너는 거짓말엔 소질이 없어.

엘리자베스는 담배를 빨아들였다. 머릿속이 개운해지기는커녕 어질어질해지기만 하는데도.

중독이라는 건 이런 걸까?

엘리자베스가 어지러운 이마를 쥐고 살짝 비틀거리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손가락에서 담배를 빼앗아 들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의 가슴을 때렸다.

“내놔.”

“싫어.”

“개새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가슴을 또 더 세게 때렸다.

“넌 내 말대로 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 넌 네 맘대로만 해. 내가 사랑한다는 말도 믿지 않고, 담배도 막 뺏어가고, 날…… 날 맘대로 살렸잖아.”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나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그따위로 말해도 나는 살아남았으니 다 괜찮을 거라고? 아까 한 말 전부 취소해. 외롭게 죽는다느니…… 그딴 말을 감히 내 앞에서…….”

“취소해.”

“진심을 담아서 얘기해야지.”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다가 자신의 손가락 끝에서 타는 담배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그것을 길게 빨아들였다. 지난 몇 개월 동안 한 번도 몸에 받아들이지 않았던 담배의 매운 향이 케이의 폐부 속으로 밀려들었다.

케이가 그것을 길게 내뱉었다.

“내가 왜 담배를 안 폈는지 알아?”

“……아니.”

“네가 생각나니까. 로킨트에서 네가 피우던 담배가…… 그게 생각이 나니까.”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엘리자베스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그때, 담배를 배운 사람이 있다고 했지. 노동자의 어투를 배운 사람도, 맥주를 먹는 법, 노동자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운 사람도 전부 그 사람이지.”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며 담배를 또 다시 한 모금 빨았다. 케이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붉은 입술을 열어 말을 이었다.

“난 이제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

1) 이제 네가 나갈 차례다! 가라! 조심히 나가라! 나가라! 와! : 조르주 비제, 오페라 《카르멘》 중 「투우사의 노래」—“여러분의 건배에 삼가 잔을 돌려드리겠소(Votre toast, je peux vous le rendre)”, 1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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