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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35화 (235/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35화

신사와 무희들이 점령하고 있던 켄터베리 홀에는 노동자들이 가득했다. 엘리자베스는 제 어깨에 손을 두른 앰버를 놀란 눈으로 보았다.

홀 내부에는 와인과 샴페인 대신에 독한 진과 위스키, 그리고 맥주가 돌아다녔다. 무대 위에서는 무희들이 춤을 추는 대신에 노동자들이 신기한 소리가 나는 신발을 신고 춤을 추었다. 악기 소리는 사람들의 박수소리, 환호성 소리에 묻혔다. 엘리자베스가 앰버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여기서 이렇게 놀아도 되는 거예요?”

앰버가 푸스스 웃으며 대답했다.

“뭐 어때요? 어차피 얼마 전부터 평민들한테도 홀을 개방했잖아요. 지금 이런 상황에 귀족들이 홀에 올 것도 아니고. 내가 솔라티오를 설득했죠.”

앰버가 그렇게 말하며 홀 구석에 앉아서 술에 잔뜩 취한 얼굴로 시가를 뻑뻑 피우는 남자를 가리켰다. 솔라티오였다. 그는 허락은 했지만 홀에 노동자들이 잔뜩 모여 있는 이 상황이 별로 달갑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요?”

“그럼요. 솔라티오는 홀에서 무희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딸깍거리는 신발을 신고 춤추는 게 기분 더럽대요.”

“그거 잘 됐네요.”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고 단호하게 말했다. 앰버는 그 말에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더니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이번 파티에 돈은 케이가 냈어요.”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뒤를 따라오는 케이를 가리켰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어깨에 얹은 앰버의 손을 노려보며 말했다.

“엘리자베스한테 술 먹이지 마. 나 또 여우 사냥하러 다니고 싶지 않아. 그것도 이렇게 커다란 홀에서. 엘리자베스는 학술원도 들러야 하고…….”

케이는 입구 쪽에 서 있는 남자들 몇을 가리키며 앰버와 엘리자베스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보비들도 깔렸어. 괜한 짓거리는 안 하는 게 좋아.”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로버트의 장례식에서 보았던 듯 낯익은 사복을 입은 보비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옷은 노동자의 것이었지만 이상하게 입성이 깔끔했다. 그들은 홀의 분위기에 조금도 스며들지 못하고 있었다.

앰버 역시 그들 쪽을 보며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토닥이곤 말했다.

“걱정 마요. 어차피 이 리오든 땅에 보비가 깔리지 않은 곳은 없으니까. 뭘로 마실래요? 위스키? 진? 아니면……. 아! 미리엄이 신기한 걸 가져왔더라구요? 비앙카! 이쪽에도 그것 좀 줘!”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멀리 있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에게 휘파람을 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비앙카가 바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바 아래쪽에서 뭔가 커다란 잔을 꺼내들고 엘리자베스와 케이에게 걸어왔다. 잔에는 얼음이 들어 있고 기포가 올라오는 음료가 가득 차 있었다.

“또 보네요, 아가씨! 오늘 한 건 했다면서요?”

비앙카의 밝은 목소리에 엘리자베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케이는 비앙카가 내민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손을 내저었다.

“난 술은 안 마셔.”

그걸 본 앰버가 얼굴을 찡그리며 잔을 대신 집어 들곤 말했다.

“이거 그냥 술 아니야. 진 토닉이라고.”

토닉이라고?

앰버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엘리자베스의 눈이 초롱초롱해지는 것을 보더니 앰버가 얼른 잔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진 토닉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 철가루로 텁텁했던 목 안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바로 이 맛이에요!”

엘리자베스는 지난 생에서 먹어봤던 바로 그 진 토닉 맛을 느끼곤 기뻐서 소리쳤다. 그런데 그런 엘리자베스를 보는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바로 이 맛? 언제 먹어봤어요? 미리엄 말로는 이건 미리엄이 처음 만들어보는 거라던데. 미리엄은 아가씨가 감히 토닉워터에 술을 섞는 걸 알면 좋아하지 않을 거랬는데.”

비앙카가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보며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비앙카의 말에 정곡을 찔려서 헛기침을 했다.

“네? 아니…… 어, 그게…….”

“이리 내봐.”

그때, 케이가 엘리자베스가 들고 있던 잔을 빼앗아 벌컥벌컥 마셨다. 그걸 본 앰버가 놀란 얼굴을 했다.

“뭐야? 술 끊었잖아.”

케이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다 비운 잔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오늘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케이의 말에 비앙카가 신난 얼굴로 케이의 뒷목을 주물렀다.

“그래. 좋은 생각이야. 케이. 역시 골칫덩이 이복형제를 해치우고 나니까 술이 들어갈 맛이 나지?”

“이복형제요?”

엘리자베스는 비앙카의 말에 되물으며 케이의 뒷목에 올라간 비앙카의 손을 주시했다. 엘리자베스가 그 손을 주시하는데도 비앙카의 손은 케이의 뒷목을 타고 등으로 갈 뿐 떨어지진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입이 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얼른 비앙카가 들고 있던 다른 잔을 들이켰다. 비앙카는 그 모습을 보며 대답했다.

“네. 켄드릭 하커요. 그 자식 신탁 계좌를 동결시키는 걸 내가 도와줬거든요. 솔라티오한테 이야기해서 다신 도박 빚도 못 지게 만들었고.”

비앙카는 그렇게 말하며 저 뒤쪽에 앉은 솔라티오에게 손 키스를 날렸다. 그러자 솔라티오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눈을 찡긋해 보였다. 비앙카가 케이의 귓가에 중얼거렸다.

“저 호구 같은 새끼.”

엘리자베스는 비앙카의 붉은 입술이 케이의 귓가에서 노는 것을 보는 순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케이를 잡아당겼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작은 힘에는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엘리자베스가 불퉁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것을 보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자베스는 헛기침을 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는 술을 더 가져올게요! 제철소에 있다 왔더니 목이 타서!”

엘리자베스의 목소리에 주변에 있는 남자들이 전부 네 사람 쪽을 보았다. 앰버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따라 가며 말했다.

“같이 가요!”

앰버는 혼자서 씩씩거리며 바 쪽으로 걸어가는 엘리자베스를 힐끔 보곤 케이에게 말했다.

“멍청이.”

“뭐가?”

“몰라. 넌 멍청이야.”

케이는 앰버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케이는 자신이 들고 있는 잔을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에 술을 마시니 술 냄새가 진하게 올라왔다. 케이는 비앙카가 자신의 등을 토닥거리는 것을 뿌리쳤다.

“가만히 둬.”

그때 비앙카가 뒤로 물러나다가 아, 소리를 내며 제 손가락을 보았다. 비앙카의 손가락에서 빨간 피가 흘러나왔다.

“옷핀에 집혔네.”

비앙카의 붉은 피를 보는 순간 케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혈향이 진하게 퍼졌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사람들의 땀 냄새, 침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프던 케이의 이성을 혈향이 흐트러뜨려놓았다.

“너 안색이 안 좋아.”

비앙카는 갑자기 하얘지는 케이의 얼굴을 보더니 걱정스레 물었다.

케이는 심장께를 움켜쥐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었다. 속이 울렁거리면서 홀을 가득 메운 이들의 살 냄새가 케이의 코를 찔러왔다

케이는 이를 악물었다. 그때 저 멀리 바에 앉아서 케이를 주시하는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쳤다. 케이는 별 수 없이 웃는 모습으로 비앙카에게 대답했다.

“아니. 그냥 꺼져.”

* * *

엘리자베스는 비앙카와 웃으며 대화하는 케이 쪽을 보다가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쾅! 소리가 나자 저 편에 앉아 있던 미리엄이 쭈뼛거리며 걸어왔다.

“화났어요?”

“예?”

엘리자베스는 케이 쪽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다가 미리엄을 보며 되물었다. 그러자 미리엄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나는 그냥 토닉워터가 많이 안 팔려서, 남은 물량이 좀 있길래 한 번 가져와 본 거예요. 전부 시음용이라 어차피 어디다 팔지도 못해요.”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아까 비앙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미리엄이 엘리자베스가 토닉워터에 감히 술을 섞은 것 때문에 화가 났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얘기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혀요. 화 안 났어요. 진 토닉이라니. 완전히 좋은 생각이에요. 여기 앉은 사람들 전부 토닉워터가 뭐냐고 물어보고 있던데요.”

엘리자베스는 괜히 부끄러워서 목소리를 낮춰서 미리엄에게 말했다. 그러자 미리엄도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다니까요. 내가 참 잘했지. 아까 솔라티오도 홀에 이것 좀 팔면 안 되냐고…….”

미리엄은 그제야 얼굴이 밝아져서는 엘리자베스에게 마구 자랑을 했다.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의 말을 들으며 힐끔 다시 케이가 있던 곳을 보았다. 그러나 케이는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앙카도 없었다.

엘리자베스가 자꾸만 주변을 돌아보자 앰버가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툭 쳤다.

“왜요? 공장 사내들이 다 너무 우악스럽죠?”

엘리자베스는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좀 그렇죠. 어찌어찌 노동조합 얘기는 마무리 지었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다가 앰버의 눈치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 보니 앰버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사실 앰버야말로 노동자 협회에 공이 많잖아요.”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더니 제 입술에 검지를 대었다.

“쉿.”

“비밀이에요?”

엘리자베스는 당황해서 물었다.

앰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사내들이란 과학자나 귀족뿐 아니라 노동자들도 다 여자들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니까. 특히나…… 노래하고 춤을 추던 여자라면?”

엘리자베스는 앰버의 말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앰버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너무 심각할 것 없어요. 지금 이 나라는 내가 알던 중에는 가장 진보적이니까. 나는 믿고 있거든요.”

“진보가 아니라 진보를 위한 노력을.”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할 말을 자신이 미리 했다. 앰버가 이미 벨룬타 공원에서 했던 말이었다. 앰버는 엘리자베스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우리 그럼, 진보를 위해 또 한 잔할까요?”

엘리자베스는 앰버가 들어 올리는 잔을 보며 자신의 잔에 생긴 성에를 만지작거리다가 잔의 주둥이를 들고 살짝 잔을 부딪쳤다. 엘리자베스가 그것을 마시려고 할 때였다.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구, 이거 앰버 모건 양 아니신가? 켄터베리 홀의 최고 인기 여가수! 여가수가 돌아왔어!”

엘리자베스는 술 냄새가 폴폴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거기엔 잔뜩 취한 에릭이 서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에릭을 노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다른 데에 가서…….”

엘리자베스가 앰버에게 말할 때였다. 에릭이 바에 팔을 기대곤 앰버의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노래 한 곡 해야지? 왜? 안 해? 이제는 멜니아의 대단한 영애님이 되셔서 이런 노동자들 앞에선 노래하기 면이 안 사시나?”

저건 너무 무례하잖아.

엘리자베스가 한 마디를 하기 위해서 입을 열었을 때였다. 그보다 빨리 미리엄이 에릭의 손등을 쳐냈다.

“그냥 조용히 먹고 가. 여긴 누가 누구를 위해서 노래하는 자리가 아니잖아.”

미리엄의 말에 에릭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얼굴을 구겼다.

“이봐. 너 아내가 임신했다고 너무 점잔빼는 거 아니야? 아니면 케이 덕분에 너는 이런 홀에 자주 와봤다 이거야? 엉? 홀이라는 데가 원래 돈 내고 여자가 노래하는 걸 듣는 곳 아니야!”

“이봐요!”

엘리자베스가 소리쳤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말이 이어지기 전에 앰버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뒤로 보내며 말했다.

“괜찮아요. 뭐. 에릭의 말대로 홀에 처음 와보는 사람들을 위해 노래 한 곡 정도는 괜찮겠죠.”

앰버가 다정하게 웃으며 에릭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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