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33화
하지만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 걸어가기 전, 엘리자베스가 먼저 말했다.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레본 전역에 기차가 생겼을 때고, 역에만 가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들 평민원이 생겨났다고 좋아했어요. 저도, 저도…… 세상이 변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죠. 모두들 그걸 기억하고 있을 겁니다. 그건 우리 모두에게 있는 실패의 기억이니까.”
엘리자베스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케이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저 여자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이 공장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친구들을 그때 잃었는지, 그 기억이 이 사람들에게 뭘 남겼는지 몰랐다.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감히 그때의 일을, 지금 리오든의 승리를 자신해도 모자라는 판에 그때의 일을 꺼낼 수 있단 말인가.
케이의 생각대로 에릭이 손을 들고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또 그렇게 개죽음을 당할 거라는 겁니까? 이번에는 심지어 조지 국왕의 편을 들어주다가?”
이번에 에릭의 질문은 정당했고 윌슨조차 그 질문을 막을 수 없었다.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엘리자베스가 에릭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건 모르는 거라는 겁니다.”
“그 말이…….”
“나는 지금 실패보다 더 나쁜 게 뭔지 말해주려고 하는 겁니다. 실패보다 더 나쁜 건 실패의 기억입니다. 수많은 시위대가 죽고 리오든이 레트니의 군대에 점령되었던 그때가 아니라, 그때의 기억이 사람들을 어떻게 지배했는지 말하는 겁니다. 굴욕이 사람들의 가슴을 틀어쥐고 조금도 놓지 않던 순간들…… 내가 리오든에 왔을 때 리오든은 실패한 경험에 잠겨 있었어요. 세상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고 귀족들은 가진 게 없이도 평민들 앞에 군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고 레트니는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조종할 수 있었죠. 아무도…… 아무도 부조리 앞에서 또 그렇게 죽어가기 싫어했으니까. 아동 노동 금지법은 결의되지 못했고 의회주의는 사라졌고 가혹한 노동현장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나는 농노보다 더한 대우를 받는 노동자들을 보았어요.”
엘리자베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실패보다 나쁜 건, 실패하지도 않는 거예요. 모두들 알고 있잖아요. 레트니가 돌아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으면서 실패할까 봐 두려우니까 피하는 거죠. 도망가는 거잖아요. 도망가면 또 얼마나 더 나쁜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면서, 적어도 실패는 안 했으니까 위안하려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요. 나는…….”
엘리자베스는 사람들을 보다가 그 사이에 있는 미리엄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를 낳는 게 두렵다는 미리엄. 엘리자베스는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울컥해서 말했다.
“……나한테는 반드시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가게 해줘야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내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라고 했으니까 말하는 거예요. 나는 내가 포로로 끌려가거나 죽게 된다고 해도…… 나는 절대로 도망칠 수가 없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에릭이 코웃음을 쳤다.
“그야 아가씨는 왕족이니까, 포로로 끌려가더라도 호화스럽게 살게 되겠죠. 포로 생활이 뭔지도 모르면서…….”
“내가 모를 거라고요?”
엘리자베스가 에릭을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에릭이 어버버 했다. 엘리자베스가 의회 청사 안에서 포로 생활을 했다는 것은 이 자리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에릭이 중얼거렸다.
“아니, 내 말은…….”
“내가 모른다고 한들, 모르는 사람은 나서면 안 되는 건가요? 실패해봤다면 실패를 두려워해야 마땅한 건가요? 왜죠? 왜 그래야 되는데요? 누구에게나 한 번뿐인 인생인데…… 왜 경험해보지 않은 자의 용기는 만용이고 경험해본 자의 회피는 지혜가 되나요?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당신들 모두…… 두려워하는 건 뭐라고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두려움을, 불안을, 그로 인한 포기를 절대로 지혜나 현명함으로 포장하지 마세요. 그건, 그건 싸우기로 한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엘리자베스의 말이 끝나자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 중 에릭에게 마음속으로든 겉으로든 동조했던 사람들이 헛기침을 하거나 먼 곳을 보았다.
그들이 민망해하는 사이에 에릭의 뒤쪽에 있던 한 남자가 손을 들었다.
윌슨이 말했다.
“말해라. 빌리.”
빌리라고 칭해진 남자는 멜빵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리오든이 이긴다고 한들 조지 국왕이 정말로 우리를 이용만 하고 버릴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결국 조지도 레트니처럼 될지 누가 알겠어요? 최악의 경우 임금도 떼어먹히고 노동자 처우는 더 나빠지고 우리는 바보 천치 취급을 받을 수도 있는 거고…….”
엘리자베스는 빌리의 말에 사람들이 동조하는 것을 보며 그제야 기회가 왔음을 알았다. 지금이 바로 사람들의 용기에 힘을 불어넣어줄 시간이었다.
윌슨이 빌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유감스럽지만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수. 의회민주주의를 도입할 거라고 큰 소리는 쳤지만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는 건 국왕이 아닌가. 국왕이 그걸 시민에게 나눠줄 거라고 기대하는 건 순진한 생각이 될지도 모르지.”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으니 조지 국왕이 주었던 칙서가 잡혔다. 그건 엘리자베스에게 ‘경 칭호’를 내린다는 내용의 칙서와는 다른 것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높이 들고 말했다.
“임금, 그것보다 더 확실한 약속이 있다면요?”
“확실한 약속……?”
윌슨이 엘리자베스가 들고 있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실한 약속이요. 나는 여러분한테 애국심을 강요하거나 충성 맹세를 받으러 온 게 아니에요. 나는 당신들에게 인터내셔널 조합의 조합원이 되어주길 바라고 왔어요.”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종이를 펼쳐 보였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인터내셔널 조합원 등록 신청서]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걸어갔다.
“마부를 불러와. 마차에 종이가 한 상자 있을 거야. 그걸 가져오라고 해.”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말에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분부대로 합죠.”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본 뒤 에릭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이걸 순서대로 읽어보세요. 이 종이를 읽고 맘에 들면 서명하면 돼요.”
엘리자베스는 마차에서 귀족에게 혐오와 경멸을 토로하는 수많은 피켓과 마주하면서 내내 속으로만 읊조리던 문장들을 떠올렸다. 이 순간 엘리자베스는 그 문장들 중 무엇도 고르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머릿속으로 떠올리지 않은 문장들이 입안에서 맴도는 것을 경험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노동자가 언제 한 번이라도 자신이 일하는 공장의 주인이 된 적이 있나요?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된 적은요? 그러니 이번에는 주인이 되는 거예요. 이 조합원의 혜택은 분명해요. 조합원이 되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한 공장의 지분을 가질 수 있어요. 주식회사.”
입구 근처로 걸어가던 케이의 걸음이 멈춰 섰다.
케이가 뒤를 돌아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 서 있는 금발 머리 여자를 말이다.
푸른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잔머리가 돋아난 뒷목은 쉽게 휘어져도 꺾이지 않았으며 그녀의 등은 작았지만 꼿꼿하게 펴져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바보였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몰랐으니까.
그녀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너는 이미 내 세상을 바꿨어.’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 속으로 그렇게 말하며 다시 걸어 나갔다.
공장에 남은 엘리자베스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주식회사가 뭔지 다들 알고 있나요? 그건 말 그대로 회사의 주인 된 권리를 나눠 갖는 거예요. 주주들이 많이 모이면 회사의 중요한 결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당신들이 많이 일하면 일할수록, 더 많은 권리를 가져갈 수 있죠. 조합은 하나로 움직이고 지금처럼 다수결로 결정해서 조합원들의 권리를 지킬 겁니다. 조합장은 당신들이 선출하면 돼요. 이보다…… 이보다 더 민주적인 약속이 어디에 있어요?”
엘리자베스가 사람들을 보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보는 순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로킨트의 컬로든이 엘리자베스를 환영하고 있었다.
* * *
엘리자베스는 마차로 돌아와 수많은 조합원 등록 신청서를 차곡차곡 정리했다. 에드워드는 그걸 보며 엘리자베스에게 주접을 떨었다.
“진짜 멋있었어요. 아니, 대체 뭘 먹고 크면 그렇게 말을 잘 해요? 네?”
엘리자베스는 아까처럼 얼굴을 빨갛게 달구더니 조용하게 대답했다.
“……병아리 콩이요.”
엘리자베스의 대답에 에드워드와 미리엄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몇백 장이 넘는 신청서를 정리하다가 잠시 멈췄다. 신청서 중 하나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에릭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게 보였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웃으며 미리엄에게 그 신청서를 내밀었다. 그러자 미리엄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에릭이 어디 가서 손해는 절대 안 보는 새끼거든요.”
“어디 봐봐.”
에드워드는 신청서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러다 저 멀리서 담배를 피우던 에릭을 눈으로 쫓았다. 에드워드는 에릭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에릭에게 손가락으로 욕을 해 보였다. 에릭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같은 손가락 욕을 해보였다.
“노동조합이라. 그러면 노동조합 소유로 공장 같은 것도 설립할 수 있겠네요?”
미리엄이 신난 얼굴로 물었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뭐 돈이 생긴다면?”
“그럼 그때는 퀴닌 같은 꼭 필요한 약 같은 건 노동조합이 운영하면 좋겠네. 자본가들 말고.”
미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무 좋은 생각인데요?”
“뭐 먼 미래의 얘기지만요.”
미리엄이 뒷머리를 긁적거리자 그걸 보고 있던 에드워드가 두 사람 사이에서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어허이. 둘이 사이좋지 않도록 합시다. 케이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니까. 그것보다 나머지 노동조합원 등록 신청서를 노스리오든 지부들에도 전달할 겸해서 우린 다 같이 켄터베리 홀을 빌려서 술을 먹을 거예요. 케이가 쏘는 거지만. 같이 갈 거죠?”
에드워드의 말에 미리엄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신청서는 핑계고 술이 먹고 싶은 거잖냐.”
“당연하지.”
에드워드가 당당한 얼굴로 대답했다. 엘리자베스는 망설이며 대답했다.
“저녁때는 학술원에 들르기로 했어요. 만날 사람도 있고……. 정해진 시간까지 컬로든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마부가 곤란할 거예요.”
“정해진 시간까지 돌아가면 되죠!”
에드워드는 그 말에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톡톡 치며 웃었다.
쿠당탕!
그리고 에드워드가 공장 마당에 엎어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케이가 에드워드의 등짝을 발로 밀어버린 것이다. 에드워드는 엎어진 채로 케이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케이가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발이 잘못 움직였다.”
“아닌 거 같은데?”
“맞아. 그러게 왜 거기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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