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31화
“뭐가?”
“네 표정이 어두운 거 말이야.”
내 표정이 어두운 게 왜 아이 때문이야? 엘리자베스는 묻고 싶었다.
그녀는 주변에 있는 노동자들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아이 때문에 표정이 어두워질 일이 무엇이 있는지 되짚어봤다. 미리엄과 셜리의 아이 얘기인가? 엘리자베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케이가 말했다.
“넌 좋은 부모가 될 거야.”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걸음을 멈췄다.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케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아이는 부부를 이어주는 끈이라잖아.’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신음성을 흘렸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때는 정말 그런 말을 믿었던 걸까? 아이는 부부를 위한 것이 아닌데.
“……나랑은 달라.”
로버트의 장례식이 끝나고 케이가 저렇게 말했을 때 엘리자베스는 케이는 좋은 부모가 될 거라고, 그럴 거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아니야. 생각을 바꿨어. 내 생각에 우린 둘 다 좋은 부모는 못 될 것 같아.”
“왜?”
케이의 눈썹이 꿈틀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우린…… 사랑받는 걸 주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잖아. 그런데 아이는 부모를 사랑해주려고 태어나는 게 아니잖아. 아이는 우리가 살아보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잖아. 사람. 그러니까 우린 안 될 것 같아. 아이의 부모는 미리엄처럼 그 아이가 태어나 살아갈 세상까지 생각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제 손에 감겨오는 엘리자베스의 작은 손가락을 제 입술로 잡아당겼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등에 입을 맞춘 채 대답했다.
“그래서 한 말이야. 너는 그런 사람이니까. 네가 이미 그런 사람이니까 다들 널 저렇게들 보지 않나.”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뜻이야?”
“다들 너만 보잖아.”
엘리자베스는 주변 노동자들이 전부 엘리자베스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것을 힐끔 둘러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다들 내가 신기한가보지. 몰락한 왕족에 평민이랬다가 이제는 다시 귀족이라고 하면서 조지 국왕의 전령으로 왔으니.”
“아닐걸.”
케이의 말을 해석하기도 전에 케이의 등 뒤에서 익숙한 얼굴이 엘리자베스를 향해 걸어왔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에드워드와 대머리 윌슨이었다. 낡은 모자를 쓰고 케인을 든 윌슨이 나타나자 각자 공장 앞마당에서 흩어져 담배나 피우고 있던 노동자들이 하나둘 근처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반갑게 인사하면서도 예의를 갖췄다. 피우던 담배는 껐고 모자는 벗었으며 벗고 있던 윗도리를 입었다. 그건 분명한 존경의 표시였다.
엘리자베스는 윌슨이 로킨트 노동자들 대부분의 아이의 대부라는 케이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모두의 존경을 받으며 에드워드와 함께 걸어오는 윌슨을 향해 반갑게 인사하려고 했다. 하지만 윌슨은 정중하게 모자를 벗고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엘리자베스 경.”
엘리자베스는 윌슨의 부드럽고 다정한 것 같지만 사실은 친근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말투에 조금 놀란 눈으로 자신도 예의를 갖춰 인사하며 말했다.
“네. 오랜만이에요. 윌슨…… 씨. 에드워드 씨.”
엘리자베스는 에드워드를 보며 싱긋 웃었다. 하지만 에드워드도 윌슨과 다를 바 없이 살짝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갑자기 다시 긴장감이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의 인사에 윌슨이 공장 입구를 케인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제철 공장에 왔으니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봐야죠?”
“네? 아, 네…….”
엘리자베스는 어리바리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윌슨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제철 공장을 구경하고 그 안에서 이 여름에 고생하는 이들을 봐야 조지 국왕도 노동자들을 대우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겠지요. 안 그렇수, 경?”
윌슨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에드워드를 가만히 보다가 제가 해야 하는 말을 깨달았다.
“네. 제가 공장에서 본 걸 그대로 국왕 폐하께 전하겠습니다, 윌슨 씨.”
엘리자베스의 말에 윌슨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러니까 윌슨과의 협상은 이제부터 시작된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건조해진 입안을 느끼며 철가루가 날리는 공장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공장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작업자들이 엘리자베스와 윌슨, 에드워드, 그리고 케이에게 얼굴에 두를 수 있는 복면 같은 것을 나눠주었다. 케이는 제 것을 쉽게 얼굴에 두른 다음 엘리자베스의 것은 엘리자베스에게 둘러주었다.
“들어가죠?”
에드워드의 말과 동시에 엘리자베스가 한 발자국, 제철소 안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후끈한 열기가 엘리자베스의 온 피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가 뒤로 물러나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그러쥐고 속삭였다.
“공장 구경은 그냥 포기하지 그래?”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케이가 미리엄을 내쫓은 게 엘리자베스가 제철 공장 내부를 구경하기 힘들어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엘리자베스는 이를 바드득 갈며 케이를 노려보았다.
“포기 안 할 건데!”
엘리자베스의 외침이 너무 컸던 나머지 작업을 하던 인부들 몇이 엘리자베스 쪽을 돌아보았다. 엘리자베스가 놀란 눈으로 주변을 살피자 윌슨이 웃으며 엘리자베스에게 손짓했다.
“이쪽으로 오슈, 아가씨!”
“네!”
“아, 아니…… 경.”
윌슨은 머쓱하게 덧붙였다. 엘리자베스는 윌슨의 옆으로 붙었다.
* * *
엘리자베스는 윌슨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윌슨의 설명을 들었다. 윌슨은 용광로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도 조금도 지친 기색 없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엘리자베스에게 제철소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목탄은 더 이상 레본에서는 쓸데가 없습니다. 어차피 백 년 전쯤에 남부에 쓸 만한 숲이란 숲은 다 베어버린 지 오래고 목탄보다는 석탄이 들여오기가 더 좋으니까요.”
목탄. 석탄. 고로. 제연. 압연.
엘리자베스는 도무지 해석이 되지 않는 수많은 말들과 쇳물이 만들어내는 뜨거운 김 속에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눈빛에서 총기를 잃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쓸 뿐이었다.
그러나 더위가 점점 더 심해질수록 작업자들의 옷은 더 꽁꽁 동여 메졌다. 윌슨에게 물어보니 쇳물을 다루는 곳으로 갈수록 작업자들의 옷이 중요하게 여겨진다고 했다.
“다들…… 숨 막혀 죽지 않은 게 다행이네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에드워드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숨이요? 그런 것보다는 쇳물에 떨어져 죽지 않는 게 다행이죠.”
“쇳물이요?”
엘리자베스가 놀란 눈으로 에드워드를 보자 에드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슬래브(slab)를 만드는 과정에서 기계에 문제가 생겨서 가동 중지도 안 하고 잘못 건드렸다가 그대로 타죽은 일이 며칠 전에도 있었죠. 기계가 사람보다 비싸니까요, 제철소에서는.”
에드워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계단 저 아래에서 분사되어 나오는 쇳물을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보던 케이가 에드워드의 뒤통수를 때렸다.
“닥쳐, 에드.”
“왜?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닌데.”
“숙녀 앞에서 할 말이 아니잖아.”
케이의 말에 윌슨이 케인으로 난간을 툭툭 쳤다. 쇠의 경쾌한 타격음이 울려퍼졌다. 모두들 윌슨 쪽을 보았다. 윌슨이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며 담담하게 물었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아가씨를 만나기로 한 건 케이의 친구나, 대부로서가 아니라 로킨트 노동자 협회 지부장으로요. 맞소?”
윌슨의 목소리가 제철소에 울려퍼지자 작업에 집중하던 인부들이 고개를 들어 윌슨과 엘리자베스 쪽을 올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시선을 느끼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윌슨 씨.”
“그럼 아가씨는 뭘로 왔지? 폼이 나 잡는 왕족 출신 아가씨? 아니면…… 국왕의 충직한 신하이자 레본의 국민?”
케이는 윌슨의 말에 얼굴을 구겼다.
“이봐, 윌슨.”
“넌 가만히 있어, 이 자식아. 내가 네놈이 하는 모양을 보니 주인을 지키지 못해 안달이 난 개새끼 같구나.”
윌슨의 말에 에드워드가 작게 웃었다.
엘리자베스는 윌슨의 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모두가 엘리자베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국왕의 충직한 신하는 빼주세요. 저는 국왕의 제안을 받아들여 여기에 왔습니다. 여기 있는 그 누구에도 충직할 것을 바라기 위해 온 게 아닙니다. 국왕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야기하고 여러분이 원하시는 것을 들을 거예요. 그리고 그 합의를 이룰 거예요. 그 합의가 우리 모두의…….”
엘리자베스는 노동자들의 눈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들키지 않기 위해 단호하게 말했다.
“목숨줄이 될 겁니다.”
엘리자베스는 나름대로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음에도 윌슨은 엘리자베스의 떨리는 주먹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얼른 손을 뒤로 감췄다. 하지만 때는 늦은 것 같았다. 윌슨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말은 누구나 잘 하지! 누구나! 그럼 들어갑시다! 지금 철강제품을 가공하는 쪽에 협회원들이 잔뜩 모여 있으니까. 거기서 이야기를 하자고.”
“사람들 앞에서요?”
엘리자베스가 아연한 얼굴로 묻자 윌슨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우리 둘이 밀실에 들어가 협상을 하고 나오겠수? 그건 댁한테도 나한테도 좋지 않은 생각이우. 노동자 협회는 모든 일을 다수결로 결정한다고. 그리고 다수결의 원칙이 뭔지 아나?”
윌슨은 그렇게 말하며 계단을 거침없이 내려갔다. 엘리자베스는 땀으로 축축한 옷을 잡아당기며 조심스레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케이가 곧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그녀를 지하까지 에스코트했다.
밑으로 내려가자 갑자기 시원해지는 통로가 하나 나왔다. 그 통로를 지나자 거대한 철문 앞에 서 있는 쇳가루가 묻은 남자들이 윌슨을 향해 킬킬거리며 대머리 윌슨이라며 윌슨을 놀렸다.
윌슨은 귀찮다는 듯이 손짓했고 그러자 남자들이 그 커다란 문을 열었다. 그러자 컬로든 궁만 한 크기의 거대한 가공 공장이 나타났다. 엘리자베스의 입이 벌어졌다.
거기엔 쇳가루를 묻힌 얼굴에 더러워진 하얀 내의만 입은 남자 수백 명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었다. 그 남자들은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동시에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윌슨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엘리자베스를 보며 마스크를 벗고 입술을 삐죽였다.
“그건 바로 정보의 공유라우. 투명한 정보의 공유! 자, 이제 협상을 시작해봅시다! 비켜, 올리! 당장 이 아가씨한테 의자를 내오란 말이야! 지나갈 길은 터줘야지! 이 미친놈들아! 내 머리 만지지 마! 머리카락도 몇 개 안 남았는데!”
엘리자베스는 거침없이 그 남자들의 틈바구니를 헤치고 들어가는 윌슨을 보고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도망가고 싶으면 말하라고 했어.”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케이를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도망가고 싶어.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참느라 제 허벅지를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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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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