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30화
“조지가 이기지 못하면 둘이 같이 가는 거야. 둘이서 가짜 통행증을 가지고. 같이 사는 거야. 이름도 버리고, 돈이나 리오든도 버려. 조지가 이겨도 같이 가자. 콧바람이라도 쐬자. 켈토에 멋진 저택이 많다던데. 삐까번쩍한 번화가 상점도 많다고.”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경찰청에서 돌아오면 같이 콧바람이라도 쐬자. 앰버가 그러는데 켈토에 멋진 저택이 많다던데. 삐까번쩍한 번화가 상점도 많다더군.’
케이의 말은 지난 생에서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 했던 말과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멱살을 쥐려고 뻗었던 손에서 힘을 빼며 케이가 내민 통행증과 배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두 장이었다가 한 장이 되어 돌아왔던 그 배편이 다시 두 장이 되어 돌아왔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자신의 기억을 훔쳐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요컨대 이 배편은 케이 역시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때 못 준 배편이야. 켈토로 같이 가자. 이번에는.”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그러고는 빨개진 코를 케이의 어깨에 비볐다.
“미친놈…….”
“대답해.”
“대답? 대답 안 해줄 거야…….”
엘리자베스는 훌쩍거리며 케이의 어깨에 입과 코를 묻고 웅얼거렸다. 그러니까 이 배편은 이런 뜻이었다. 전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나는 너와 살고 싶었다고.
“켈토에는 수영장도 있고 오페라하우스도 있다는데도?”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중얼거렸다. 마치 꼬시기라도 하듯이. 엘리자베스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수영장에는 홀딱 벗은 여자들도 있다던데.”
“괜찮아. 다 내쫓을 거니까.”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렸다. 그는 엘리자베스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대고 살짝 얼굴을 뗀 채로 물었다.
“대신에 일이 틀어지면……. 혼자라도 꼭 가는 거야. 알겠어?”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말들이 투레질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차가 멈춰 섰다. 마부가 땅에 착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대답을 종용하며 엘리자베스의 입술에 제 입을 조심스레 맞췄다.
“제발……. 대답해…….”
엘리자베스는 거칠거칠한 통행증의 표면을 만지며 원망스러운 얼굴로 케이를 보았다.
“그냥 같이 가. 같이, 같이 살아.”
마차 문이 열렸다.
윌리엄 조쉬가 말했던 수영장 물처럼 새파란 하늘이 엘리자베스 앞에 펼쳐졌다. 그녀는 케이에게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런 대답 같은 거 나한테 강요하지 마. 죽지 말란 말이야. 죽으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멱살을 쥐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당겨왔다. 케이는 마차 문을 잡고 순순히 엘리자베스 쪽으로 끌려가 주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널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엘리자베스는 켈리 애니스턴이라는 이름이 적힌 통행증을 케이의 가슴팍에 거세게 안겼다.
“이건 네가 갖고 있어. 나 혼자는 안 가니까.”
* * *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엘리자베스가 마주한 것은 기다랗고 넓은 로킨트 스트리트였다. 노스리오든의 타운하우스 같은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공장 거리.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의 시선은 귀족 아가씨인 엘리자베스가 지나가기만 해도 엘리자베스에게 쏠리곤 했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보닛을 쓴 엘리자베스를 향한 그들의 시선 속에는 의아함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네가 여기 왜…….
넌 여기에 속한 사람이 아니야.
그들의 시선은 엘리자베스에게 늘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시선 속에서 로킨트 거리를 걸을 때마다 외로움을 느꼈다. 두려움에 떠는 농노 여자아이의 시중을 받을 때, 어머니의 명령으로 방이나 옷장에 갇힐 때, 아버지에게 매질을 당하고 가정교사에게 폭언을 들었을 때보다 더 직접적인 외로움이었다.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아.
그건 슬픔이나 절망, 공포나 고통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직관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때를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케이의 팔을 꽉 쥐고 로킨트를 걸어갔다. 그때 엘리자베스와 노동협회원들의 회동 장소인 넓은 공장부지 저 멀리서 제약공장 작업복을 입은 익숙한 얼굴이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흔들었다.
“엘리자베스!”
미리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 뒤로 작업복을 입은 사내들이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팔을 놓고 그 쪽으로 뛰어갔다.
“미리엄!”
“아이고, 부공장장님!”
미리엄의 뒤에 있던 익숙한 얼굴의 노동자가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벅찬 기분에 울먹거리며 말했다.
“어떡해요. 다들 열심히 토닉워터를 만들어줬는데……. 내가 망쳤어요…….”
엘리자베스가 울먹거리며 뺨을 감싸쥐자 그걸 바라보던 노동자들의 얼굴이 묘해졌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얼굴을 보며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말했다.
“박람회에서 성적이 형편없었다구요…….”
엘리자베스가 어린 강아지처럼 떠는 모습을 보더니 남자들이 다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노동자들은 다들 빨개진 얼굴로 한참 말이 없다가 더듬거리며 엘리자베스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아, 아니! 아니에요! 박람회에서 성적이 중요한가요! 이번 일이 잘 되면 퀴닌이 전 대륙으로 수출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대륙으로 수출되면 공장도 호황이지, 호황!”
“하, 하지만…….”
엘리자베스를 둘러싸고 안절부절 못하는 사내들을 바라보던 케이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케이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미리엄에게 말했다.
“이봐. 나한테 먼저 인사를 해야 되는 거 아니야? 미쳤냐?”
케이의 시비조에 미리엄이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인사까지 해야 돼? 너한테?”
미리엄은 그러더니 다시 엘리자베스를 위로하는 데에 정신이 팔렸다. 분명 로킨트 제약 공장에는 케이가 얼굴을 아는 이들이 가득했는데 아무도 케이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울먹거리고 있었고 공장 사람들은 그런 엘리자베스에게 응원이 될 만한 말을 하며 그녀의 기운을 북돋아주는 데에 온 정신을 쏟았다.
노동자들은 엘리자베스의 곁에 모여들어서 엘리자베스에 관해 신문에 난 소식 같은 것을 이야기하느라 바빴고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얼굴을 붉혔다. 자꾸만 사람들이 엘리자베스를 ‘경’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엘리자베스 경이라니. 다시 의회가 개회되면 우리 부공장장님이 분명히 국회의원이 될 거라니까?”
“나는 부공장장님을 뽑을 거야. 진짜로.”
“그럼! 부공장장님처럼 성실한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그런 말…….”
엘리자베스는 사람들의 칭찬에 정신을 못 차리겠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 말아요. 진짜 너무 창피해…….”
엘리자베스의 부끄러움에 노동자들이 다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들은 엘리자베스가 귀엽다는 듯이 계속 칭찬을 하며 엘리자베스를 놀렸다. 엘리자베스가 참다못해 소리를 질렀다.
“그, 그만하라니까요! 지금 나 놀리는 거죠? 나도 다 알아요! 미리엄! 이쪽으로 와요!”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미리엄에게 제철 공장을 구경시켜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미리엄은 킥킥 웃으며 엘리자베스에게 끌려갔다. 케이는 그걸 가만히 보고 있다가 미리엄에게 가서 미리엄의 종아리를 툭 쳤다.
“비켜.”
케이의 말에 미리엄이 휘청거리다가 철퍼덕 넘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노동자들이 다 웃어댔다. 케이가 말했다.
“다리에 힘이 없어서 어떻게 가장 노릇은 해? 셜리가 임신했다던데?”
“셜리가 임신이요?”
엘리자베스가 놀라서 미리엄을 보자 다들 휘파람을 불며 미리엄의 어깨를 주물렀다.
“이 새끼가 다리에 힘이 없을 만도 했네. 응?”
엘리자베스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미리엄에게 말했다.
“진짜 임신이에요? 네?”
“예, 뭐……. 이틀 전에는 비상사태라서 이야기 못했지만……. 그래도 너무 기대하지 말아야죠.”
“왜요?”
“셜리는 작년에도 임신한 적이 있었수. 금방 유산했지만.”
미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미리엄은 엘리자베스의 기색을 살피곤 손을 휘저었다.
“아니, 뭐. 나는 애를 그렇게 원하지 않으니까. 셜리가 좋다니까 일단은 낳으면 키우겠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인생, 그걸 물려줄 필요는 없잖수.”
미리엄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미리엄의 손을 꽉 쥐었다.
“그건 모르는 거잖아요. 레본이 어떻게 변할지. 리오든에서 그 아이가 얼마나 많은 것을 하며 살 수 있을지.”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말하며 번뜩 생각났다는 듯이 아루쉬가 가르쳐준 몇 가지 약초를 미리엄에게 불러주었다.
“에테르가 약한 사람은 쉽게 아이를 잃을 수도 있대요. 그러니까 약초를 꼭 먹이고 약초 값은 내 앞으로 달아놔요. 벨룬타 근처 약초상은 대부분 내 이름을 알고 있을 거예요. 내 이름을 모르면 왕립학술원 사람이라고 해도 돼요.”
“저, 정말요? 아니……. 이렇게 신세만 져서는……! 고마워요, 엘리자베스 경!”
“그, 그 호칭!”
엘리자베스가 다시 얼굴이 빨개져서 소리쳤지만 미리엄은 킥킥 웃으면서 엘리자베스의 손등에 입술을 가볍게 맞췄다. 그걸 본 케이가 미리엄을 발로 차는 시늉을 했다. 미리엄은 히익 소리를 내며 케이에게 항변했다.
“존경의 의미야! 존경의 의미! 나 이제 애 아빠라고!”
“시끄러워. 다들 썩 꺼져.”
“하지만 제철 공장 구경은…….”
“꺼지라고. 내 말 안 들려?”
케이가 눈에서 살기를 뿜어내며 말하자 미리엄을 포함한 노동자들이 다 몸을 바들바들 떨며 엘리자베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엘리자베스는 그걸 보곤 케이의 어깨를 세게 때렸다.
그러자 케이가 말했다.
“그렇게 때려선 안 죽어.”
케이는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아다가 다시 제 팔을 잡게 하고 에스코트했다. 제약 공장의 사람들이 사라지자 엘리자베스는 다시 낯선 노동자들 사이에 놓였다. 그들은 다들 엘리자베스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저들끼리 떠들었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저들은 무슨 얘기를 주고받을까?
경 칭호를 받은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왕족이자 귀족.
엘리자베스는 노동자들이 제일 싫어할 만한 구석만 갖춘 여자였다. 엘리자베스는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걸 본 케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생각을 해?”
“그냥.”
내가 이곳에 속하지 않는다는 생각.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로킨트를 걸으며 나는 나의 구원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졌는데, 지금은 수세에 몰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말을 이곳에서 차마 입 밖에 내기가 어려워 망설였다. 케이가 말했다.
“아이…… 때문인가?”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고개를 들어 케이의 표정을 보았다. 케이의 얼굴은 어두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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