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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29화 (229/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29화

엘우드가 마차에 타고 그걸 지켜본 엘리자베스가 뒤에 마차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마차 안에는 케이가 있었다. 눈이 동그래진 엘리자베스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엘리자베스가 가만히 서 있자 그가 말했다.

“오늘 안에 움직일 생각이 있어?”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그는 엘리자베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가 그것을 잡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 문이 닫히고 마차 안에 두 사람만 남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돌렸다. 케이는 건너편에 앉은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쪽으로 와.”

케이가 손을 뻗었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그가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감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중얼거렸다.

“……아침에 일어나서 네가 사라졌길래 놀랐어.”

엘리자베스는 텅빈 침실의 시트를 매만지며 그 차가움에 놀랐던 것을 기억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엘리자베스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로킨트에 갔다왔어. 미리엄이 네 안부를 묻더라. 너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고……. 또 노동자 협회원들을 만나서 오늘 회동에 불참하겠다는 사람들을 설득했어. 내내…….”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푸른 엘리자베스의 눈을 바라보며 욕망 앞에 제 정신이 부서져가는 것을 느꼈다.

“……너를 생각했어. 네 머리카락. 네 냄새. 네 손가락. 네 눈…….”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의 냄새를 맡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눈꺼풀 위에 입을 맞췄다. 엘리자베스의 온몸을 뜯어먹고도 허기가 져 미칠 것 같다는 듯이.

엘리자베스 역시 케이의 얼굴 여기저기를 만지고 또 입술로 훑다가 마차가 크게 덜컹이자 그에게서 몸을 뗐다. 그녀는 마차 창문을 열었다.

한산한 노스리오든의 거리가 보였다. 블록마다 보비와 군인들이 서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마차 창틀에서 손을 짚은 채로 리오든 거리를 눈에 담았다. 행인은 거의 없었고 가게는 텅 비어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피켓을 단 남자들이 걸어 다녔지만 곧 보비가 그들에게 소리를 치자 도망갔고 어떤 거리에는 불탄 가게 유리창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반역자 귀족 놈들.

이틀 사이에 평민과 귀족들의 분위기가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귀족이면서 평민이었다. 이런 엘리자베스를 평민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케이는 불안에 떠는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감아 뒤에서 안았다. 그의 손이 엘리자베스의 아랫배 위를 돌아다녔다. 엘리자베스는 거칠어지려는 숨을 참으며 그에게로 돌아앉았다. 엘리자베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말해봐.”

“뭘?”

“그거…….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그거…….”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고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웃었다.

네가 그런 고민을 한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케이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엘리자베스는 터무니없는 일을 쉽게 해내곤 했다. 하지만 또 이럴 땐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르는 어린 소녀처럼 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녀가 한 일이 그저 미래에서 왔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치부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녀가 한 일을 전부 본 사람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모두의 세상을 바꿨다. 이 세상 누구에게 그런 기회를 준다고 한들 해낼 수 없는 일들이었다. 엘리자베스가 퀴닌을 만들고 여자 과학자가 되어 스스로를 드러내고 수많은 사람들을 고쳐낸 것은 엘리자베스가 아니라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 그 사실을 어떻게 믿게 할 수 있는지 그래서 어떻게 이 눈빛에서 우수를 걷어낼 수 있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는 여자에겐 특히 말주변이 없는 편이었고 사실 이 모든 말을 축약하면 겨우 이런 말 몇 마디만이 남았다.

“너는 뭐든지 할 수 있어. 할 수 없대도 괜찮아. 어차피 네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 없어.”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케이에게 매달려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데리고 도망가달라고. 네 말대로 400만의 사람들을 다 버리고 우리 둘만. 도망가자고.

“……윌슨을 설득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닐 거야.”

그러나 다음 순간 이어진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뭐? 누구?”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케이가 덤덤한 표정으로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았다.

“대머리 윌슨.”

그녀는 머리가 벗겨진 초로의 노인을 떠올렸다. 아들을 잃었다던 윌슨.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 만나러 가는 사람은 노동자 협회 로킨트 지부장이라고 했어. 분명히 조지가…….”

“맞아. 로킨트 지부장. 그게 윌슨이야.”

“나는 당연히 앰버 모건일 줄 알았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앰버 모건은 여자야. 공장에서 일하는 시커먼 사내놈들이 앰버의 정체를 알면 노동자 협회를 엎어버릴 걸.”

“나도 여자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케이가 말했다.

“그건 조금 달라. 넌 여자지만 공녀고, 과학자고, 또 넌 지금 조지의 편으로 왔잖아. 우리 편이 아니라.”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선을 긋는 듯한 케이의 말에 어두워졌다. 하지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석연치 않은 기분을 이겨내려 노력했다.

“노동자 지부는 점조직이야. 노동자 협회를 누가 지원하고 이끄는지 협회원들은 대부분 몰라. 제 지역의 지부장만 알고 있을 뿐이야. 그리고 윌슨은 로킨트 아이들 대부분의 대부야. 로킨트 지부장만큼 노동자 협회원들의 지지를 받는 이는 없어. 윌슨을 설득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협회원들도 따라온다고 생각하면 돼. 노동자 협회는 다수결로 협회의 결정을 정하니까. 여론을 움직여야지. 당분간 원활하게 임금도 받기 힘들 테지만 그건 남부에 내려가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이어지는 설명에 공장에 모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윌슨을 설득하는 제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잔뜩 주눅이 들어서 벌벌 떨며 말도 제대로 못 할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박람회에서처럼 열과 성을 다해 소리 질러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거나.

엘리자베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내가 설득하지 못하면 어떡해……? 그래서 다들 조지의 편도 들지 않겠다고 하고, 남부 고향으로 내려가서 파업을 결의하겠다거나…….”

“그럼 도망쳐야지.”

케이는 그렇게 말하더니 웃었다. 그는 품 안에 손을 넣어 통행증 하나를 꺼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내미는 통행증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켈토에 있는 멜니아 중앙은행 수표야. 네가 원한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켈토로 가는 배편을 준비하지. 거기에서 배를 갈아타고 동쪽으로 가서 사라져도 좋고 켈토에서 다른 이민자들처럼 떵떵거리면서 살아도 좋아. 그건 네 선택이야. 하지만 파혼은…… 내 선택이 되겠지.’

바실리 스트리트에서 케이가 멜니아 중앙은행 수표와 함께 주었던 배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때 케이는 엘리자베스 혼자 가라고 말했었다.

“너…… 또…….”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노려보았다.

또 나보고 혼자서 살라고.

너 없는 세상에서 나 혼자.

“내가 분명히 말했지만…….”

엘리자베스는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로 케이를 설득하려고 했다.

“켈토로 가는 배편을 준비했어.”

하지만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엘리자베스가 대답했다.

“그랬겠지.”

“일이 틀어지면 혼자서 가.”

“……헛소리 하지 마.”

“대신에 이름도 성도 바꿔.”

케이는 통행증을 받아들지 않는 엘리자베스에게 친절하게도 통행증을 열어보였다. 그 통행증에는 켈리 애니스턴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통행증의 이름을 보며 어이가 없어서 소리쳤다.

“나보고 지금 너도 버리고 리오든도 버리고 결국은 또 내 이름까지 버리라는 거야? 겨우 되찾은 내 이름까지?”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분노로 떨려왔다. 엘리자베스는 주먹으로 케이의 가슴을 때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넌 모두 다 지키면서. 넌 나도 지키고 리오든도 지키고 네 이름도 지키면서……! 어떻게 나한테만 그런 걸 자꾸 시킬 수 있어? 나를 사랑한다며. 나를 사랑해서 살고 싶다며. 너 분명히…… 분명히 나한테 그래놓고…….”

‘같이 가자고는 안 해?’

‘넌 혼자 가야 돼. 멜니아는 신분에서 자유로운 곳이라지만 네가 공녀로서 망명가는 것과 레본의 평민 사생아의 아내로서 망명가는 건 전혀 다른 삶이 될 거야.’

엘리자베스는 바실리 스트리트 뒤에서 다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는 자신을 기껏 배웅해놓고, 또 그녀를 기다려놓고, 결국은 또 그녀를 멜니아로 보내버리려던 케이를 떠올렸다.

지난 생에서 두 장이었던 배편은 그렇게 엘리자베스에게 한 장으로 돌아왔고, 엘리자베스는 또다시 케이의 마음을 알 수 없는 상태로 돌아갔다.

그때도, 이번에도.

너는 나한테서 도망치기만 하지.

엘리자베스는 분했다. 이렇게 돌고 돌아 케이를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저 건방진 자식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케이는 또다시 엘리자베스의 손아귀에서 미끄러져 나가려고 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가슴을 때리던 손으로 케이의 멱살을 쥐었다.

“개 같은 자식, 너는…….”

아니, 쥐려고 했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기 전까지는. 케이는 몸부림치는 엘리자베스를 품 안에 안고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래. 이렇게 말하면 네가 날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날 줄 알았어.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기분 좋아? 왜 웃는 거야? 날 우습게 여기고 희롱하고. 감히……!”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안지 않은 자유로운 한 손을 자신의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케이는 주머니 속을 뒤져 이번에는 또 다른 통행증과 배편 두 장을 꺼냈다. 엘리자베스는 소리를 지르려다가 케이의 손에 들린 통행증과 배편을 보고 얼굴이 굳어졌다.

“……뭐야?”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케이는 통행증을 열어서 그 안에 있는 이름을 보여주었다.

앨버트 로니.

“너한테만 네 이름을 버리라고 하지 않아. 나도 버릴 거야. 오늘 로킨트에 가서 변호사한테 이걸 받아왔어. 너랑 내 통행증. 일이 틀어지면 혼자 가. 하지만 일이 틀어지지 않으면…….”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엘리자베스와 케이의 몸이 빈틈없이 달라붙었다. 케이는 옷 아래로 엘리자베스의 굴곡을 느끼며 지난밤의 기억을 떠올렸다.

나는 너를 가졌고 또 너는 나를 가졌던 기억.

케이는 그 기억을 먹고 자라난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넌 정말 몰라,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내가 널 얼마나 갖고 싶어 하는지.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같이 가자. 같이……. 같이 켈토에서 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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