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28화
엘리자베스는 진에 취해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침대 위에 앉아서 케이에게 머리를 맡겼다.
“머리 말려줘.”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이 뒤로 넘겨졌다. 수건을 받아들은 케이의 손이 떨렸다. 비에 젖어 축 처진 머리카락에서는 첫날밤 같은 향기로운 향유 냄새나 지독한 향수냄새 따위가 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에서는 비 냄새가 났다.
이 시기의 리오든에는 사흘 걸러 하루는 비가 왔다.
케이는 비가 싫었다. 포목은 비에 젖으면 엄청나게 무거워지고 질이 떨어지게 되었다. 비가 오면 땅은 질어지고 옷에는 흙탕물이 튀었으며 원래도 케이에게 불친절했던 상인들은 특히나 더 야비해졌다. 어디서 더러워진 옷감을 처분하려 들어. 망가진 것은 옷감인데 상인들은 케이를 망가진 것처럼 취급했다.
지저분한 것. 더러운 것. 천한 것.
케이가 애써 방수용 천을 덮어 곱게 가지고 온 천에 괜히 꼬투리를 잡아 시비를 걸기도 했다. 케이에게 비 냄새란 그런 상인들의 가게 앞에서 버티고 서서 공장에 가져갈 돈을 받아가기 위해 버텼던 굴욕적인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에서, 아니, 온몸에서 비 냄새가 났다.
케이는 수건을 넓게 펼치고 엘리자베스의 등 뒤에 앉았다. 엘리자베스는 머리카락을 그저 탈탈 털어주면 된다고 말했지만 케이는 부드러운 금발을 어떻게 감히 만지질 못해 윤기 나는 머리카락에 코를 묻었다.
케이의 눈빛에 욕망이 서렸다. 케이가 ‘이번에는 나를 가져’라고 말했을 때의 엘리자베스의 눈빛에 서렸던 강한 소유욕 또는 애정과 같은 종류의 감정이었다.
케이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힘겹게 고개를 들어 엘리자베스의 머리를 꾹꾹 짜냈다. 손에서는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향해 돌아앉았다. 살짝 젖은 머리카락에서 엘리자베스의 셔츠 위로 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케이의 손에서 수건을 빼앗아 들고 케이의 머리를 수건으로 덮었다.
“이렇게 하라고.”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었다. 빗물이 튀고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려서 케이는 눈을 감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건 괴롭히는 거잖아.”
“아니라니까. 넌 누가 머리 말려준 적 없어?”
“없는데.”
“아기 때도?”
“어.”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쏴아아— 두 사람의 공기 사이로 빗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케이는 주눅이 든 눈동자로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또다시 케이와의 사이가 벌어지는 것 같아서 두려웠다. 엘리자베스는 빗소리를 들으며 케이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갰다.
쪽—
짧은 마찰음과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엘리자베스는 번들거리는 입술로 케이에게 말했다.
“내가 해줄게. 머리 말리는 것도. 또…….”
엘리자베스의 말이 끝나기 전에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서 수건을 빼앗았다. 케이의 커다란 손이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을 헝클이며 물기를 닦아냈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뺨에 묻은 물기도 닦아냈다.
“네 부모님이 이렇게 해주셨나? 어렸을 때?”
케이의 손이 뒷목과 귓가를 오갔다. 케이의 손이 닿는 곳마다 엘리자베스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니. 농노 중에 어린 여자애들이 해주었지. 내 침실에서 내 심부름을 하던 아이들.”
케이의 갈색 눈이 엘리자베스를 고요히 응시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아득히 멀어지는 것 같은 기분으로 말했다.
“내 눈도 못 마주치던 어린 여자애들. 벌벌 떨면서 도망 다니기에 바빴던.”
케이가 뭐라고 말할까.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자신을 보며 경멸을 할까, 두려워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케이는 이렇게 말했다.
“외로웠겠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케이는 수건을 내려놓았다. 케이의 손이 수건이 있을 때와 똑같이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고 귓불과 뒷목으로 향했다. 엘리자베스의 굳어 있던 몸은 거친 케이의 손바닥 아래에서 조금씩 풀어졌다.
케이의 손은 아까 뜨거운 증기를 내뿜던 물만큼이나 뜨거웠다. 그 뜨거운 감촉이 엘리자베스의 속에도 불씨를 지폈다. 케이의 손이 엘리자베스의 셔츠 단추에 닿았을 때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뒷목을 껴안고 누웠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입술에 제 입술을 포개고 허락을 갈구하듯이 오래 망설였다. 엘리자베스가 애타는 마음에 입술을 벌렸을 때, 케이의 숨결이 엘리자베스의 잇새 사이로 파고들었다. 엘리자베스의 연약한 살이 케이를 맞이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셔츠를 벗겨냈다. 부드러운 가슴이 맨살에 닿아왔다. 몸이 달아올랐다. 케이는 신음소리를 내며 제 옷을 벗었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손이 허겁지겁 서로를 찾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거칠고 단단하며 뜨거운 몸을,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부드럽고 탄력 있으며 차가운 몸을 어루만졌다.
케이의 입술이 엘리자베스의 귓불을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열감을 잇새로 토해냈다.
빗소리는 끊임없이 두 사람을 괴롭혀 댔다. 빗소리. 천둥소리. 번개의 번쩍임.
그것은 다가오는 비극의 서곡과도 같았다. 엘린크 성에서는 누군가가 죽고 또 누군가가 살아남고 있을 것이다.
우리처럼.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서로의 몸을 느끼고 맛보며 기억하려는 시도가 모든 비극적인 예감을 지워 냈다.
케이의 애무에 엘리자베스의 몸이 반응해 두 무릎이 열렸다. 작고 연한 움직임에도 케이의 이마에는 격한 운동을 하고 난 것처럼 땀방울이 맺혔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무릎 사이에 자리하고 자신을 밀어 넣었다. 몰려오는 쾌감이 온몸의 감각을 지배했다. 두 남녀는 어미를 찾는 새끼처럼 서로의 몸을 파고들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등을 붙잡았고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아랫배를 매만졌다.
“나를, 나를 가져.”
케이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엘리자베스의 허리가 휘어지고 아랫배가 조여들었다. 케이는 그 모습을 보며 새빨개진 귀를 한 채 제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몰려오는 허기와 갈증이 케이의 뱃속을 가득 채웠기 때문에.
그러나 케이는 별 수 없이 곧 엘리자베스의 종아리와 발등을 핥고 깨물었다. 너를 마시고, 너를 먹고 싶다.
케이는 이 순간 모든 욕망이 정염으로 수렴되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의 속눈썹에 매달린 눈물을 보는 순간 케이의 안에 있는 불씨가 케이의 모든 것을 태웠다. 엘리자베스의 몸도 바들바들 떨렸다.
“이리…… 이리 와.”
엘리자베스는 온몸이 새빨개진 채로 케이에게 손을 뻗었다.
케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리 오라고. 얼른.”
케이는 울먹거리는 엘리자베스가 애원하는 동안 다시 부피를 키웠다. 엘리자베스가 숨을 들이마셨다. 엘리자베스의 예민해진 살이 떨리는 것이 케이에게 전부 전달되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엘리자베스의 몸에 제 몸을 붙였다. 엘리자베스는 신음소리를 흘리며 케이의 입술에 정신없이 입을 맞췄다. 단단하고 커다란 케이의 몸은 엘리자베스에게 알 수 없는 불안을 안겨줬지만 케이의 부드러운 입술은 그 불안을 순식간에 욕망으로 바꾸어놓았다.
엘리자베스는 시야가 뒤틀리고 세계가 뱅뱅 도는 그 순간에도 케이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사랑한다고.
나를 사랑해달라고.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살고 싶다는 말로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눈을 감았다. 케이의 살 냄새를 아무리 맡아도 제 몸 안에서는 괴물 같은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공포가 다시 엘리자베스의 몸을 잠식하려고 할 때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몸을 들어올렸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몸에 매달렸다.
거친 숨이 공기 중에서 섞여들었다. 엘리자베스는 공포나 불안이 끼어들 틈 없이 케이의 몸에 매달리는 데에 집중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싫어하는 케이의 갈색 눈동자 위의 눈꺼풀에 혀를 가져다대고, 케이의 삐뚜름한 콧대를 잘근잘근 물기도 하고 케이의 탁한 갈색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어 휘젓기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어깨에 얼굴을 얹고 거울 안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부끄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거울 속의 스스로의 얼굴을 보며 아까 자신이 훑었던 케이의 얼굴과 비교했다. 푸른 눈동자에 하얀 피부, 금색의 머리카락. 곧은 눈, 코, 입……
너와 나는 얼마나 다른가.
그러나 또…… 얼마나 닮았나.
엘리자베스는 케이와 동시에 몸을 떨었다. 두 번의 절정이 몸을 관통했다. 그 순간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는 같은 감정을, 같은 감각을 공유하고 있다.
엘리자베스는 침대 기둥에 기대어 케이를 보며 거친 숨을 뱉어냈다. 엘리자베스가 갈라지는 입술을 혀로 적시는 것을 본 케이가 몸의 떨림을 멈추곤 다시 또 엘리자베스의 입술에 맺힌 그녀의 타액을 맛보았다.
“아무리…… 아무리 보고……. 아무리 느껴도…….”
케이의 문장은 끝맺어지지 않았다.
* * *
조지의 말대로 엘린크가 수성에 성공했다는 소식은 다음 날 리오든 전역에 퍼졌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장병이 죽었는지는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또 얼마나 죽어갈 것인지…….
엘리자베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별궁 입구에 서 있었다. 엘우드 밀이 엘리자베스의 옆에 중얼거렸다.
“손등의 상처는 어쩌다가 그렇게 벌어진 거야?”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상처를 봐준 엘우드 밀의 질문에 얼굴을 빨갛게 달구며 헛기침을 했다.
“그냥…… 어…….”
“아, 알고 싶지 않다! 어제 밤에 케이가 마차를 타고 돌아가던데.”
엘우드 밀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손을 허공에서 휘저었다.
“어쨌든간에 당분간 조심해라. 넌 이제 전과 다르니까.”
엘우드 밀은 주변을 살펴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엘우드 밀은 그런 엘리자베스를 보다가 혀를 찼다.
“이봐. 표정 좀 펴. 어쨌거나 치료제를 찾았고, 나도 치료제를 잘 확인했다. 어떤 식으로든…… 5개월 동안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에 애쓸 거야. 그러니까…….”
엘우드 밀은 눈알을 또르르 굴리며 망설이다가 입술을 물었다.
“용서해라. 내가 너한테 거짓말한 거. 케빈 퍼킨도 좀 용서하고. 걔는 진짜…… 좀 용서해라. 걔 되게 속상해 하고 있어.”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말에 땅을 바라보았다.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말을 받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오늘 외출을 허락 받은 김에 왕립학술원에도 들를 거예요. 먼저 가 계시면……. 저도 갈게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엘우드 밀이 약간 화색이 도는 얼굴로 말했다.
“그게 대충…… 그니까…… 용서한다는 말이지?”
“몰라요.”
엘리자베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엘우드 밀은 배실배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엘우드 밀이 타고 갈 마차가 도착했다. 그 뒤에는 엘리자베스가 탈 마차도 있었다.
조지가 말한 대로 노동자 협회원들을 만나야 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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