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27화
‘너는 과학자가 될 수 없다. 너는 의사도 될 수 없고, 말을 탈 수도 없고, 화살을 쏠 수도, 너는…….’
‘너는 엘리자베스 클레몬트야.’
‘왕가의 핏줄.’
‘너는 공녀고, 공작가의 미래이며, 너는 가문의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귓가에 그녀의 아버지가 했던 말이 맴도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녀 안에 용솟음쳤던 용기가 전부 꺼지는 것을 보았다. 용기의 불꽃이 꺼지고 남은 자리에는 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엘리자베스는 그 연기 속에서 처절하게 내팽개쳐지는 자신의 자존감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엘리자베스가 겨우 이런 모습으로 자빠져 있는 것을 보면 분명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겠지.
너는 왜 아직도 그 모양이냐고.
그 수많은 일을 겪고도 아직도 이렇게 나약하냐고.
미래에 있을 모든 일을 알고 과거로 돌아와 2번의 생을 사는 것이나 다름없는데도 너는 어떻게 아직도 과거에 붙잡혀 있냐고.
그런데 나는…….
엘리자베스가 저도 모르게 마른세수를 하자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눈물을 손으로 닦다가 입술로 핥다가 오만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여차하면 튀자고. 내가 얘기했잖아. 다 두고 도망가게 해준다고. 그러니까…….”
나는 아직도 그래.
나는 아직도 나약하고, 두려워.
엘리자베스는 도망가게 해준다는 케이의 말이 언제나 엘리자베스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음을 이 순간 알았다.
퀴닌을 개발할 때도, 의회 청사 앞에서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나약하고 두려움에 떠는 나를 일으켜 세우려고 하지 않는 너.
너 때문에 용기가 난다.
“그러니까 네 멋대로 해. 원래도 그랬지만.”
짝다리를 짚고 비스듬히 서서 한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케이의 그림자가 부엌 바닥에 길게 비쳤다.
멋대로인 게 누군데. 멋대로인 걸로는 레본에서 제일가는 남자면서.
엘리자베스는 훌쩍거리며 케이의 어깨를 세게 때렸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다시 아궁이로 돌아가서 따뜻한 물을 대야에 받아 바닥에 두었다. 엘리자베스는 바지 밑단을 접었다. 차가운 바람이 엘리자베스의 다리를 감쌌다. 그녀가 몸을 떨자 그걸 본 케이는 찬장을 능숙하게 뒤져 진을 하나 꺼내주었다.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렇게 막 궁의 음식을 축내도 되는 거야?”
“겨우 이런 걸로 별궁에 머무는 공녀를 혼낼까 봐?”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조금 놀란 눈으로 케이를 보았다.
“내가 오늘 식사 자리에서 클레몬트의 이름을 하사받은 거, 알고 있었어?”
“추측하고 있었어.”
케이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다니엘 빌리스는 케이에게 아직 국왕이 엘리자베스를 복권시키지도 않았으니 고분고분히 굴라고 협박했지만 사실 엘리자베스의 복권은 엘리자베스에게 내리는 상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족쇄이기도 했다. 조지 국왕이 교회를 압박해 엘리자베스를 엘리자베스 클레몬트로 만들면 엘리자베스는 빼도 박도 못하게 레트니의 적이 되는 것이다. 다니엘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았을 테지만 그저 모르는 척 케이를 압박한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역시 엘리자베스와 케이가 국외로 도망하거나 망명하는 것이 위험한 선택임을 더 정확하게 알리고 조지에게 충성토록 하기 위해서.
또는 그저 충신의 불안함 때문에.
다니엘 빌리스의 말대로 케이와 다니엘은 똑같은 개새끼였다. 스스로의 주인 아래 알아서 기는 개새끼들. 그러니 다니엘이 케이의 머릿속을 추측하기가 쉽듯 케이도 다니엘의 머릿속을 추측하기가 쉬웠다.
제 형도 가져다 버린 개새끼.
다니엘은 불안해하고 있겠지. 행여나 조지가 케이와 엘리자베스를 너무 믿거나 의지해 그릇된 쪽으로 발을 딛지는 않을까. 폭탄이 잔뜩 매설된 땅과 같은 이 상황에서. 혹시라도 제 주인이 위험에 빠지지는 않을까 하여.
케이 역시 같은 생각을 하며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조지 국왕을 너무 믿지 마.”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대답 없이 대야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에 손바닥을 쬐였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조지가 나에게서 퀴닌을 사겠대. 엄청난 물량이야. 그 물량이면 제약 공장은 전쟁 이후에 완전히 흑자로 전환될 거야.”
“조지 국왕은 대가 없이 너를 도울 사람이 아니야.”
케이는 다급하게 말했다.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똑바로 보았다.
“나도 알아. 조지는 나를 이용하고 싶은 거야. 나를 이용해 이오페아 국가들을 이용하고 레트니를 이기고 싶은 거야.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하며 클레몬트 공작을 다시 떠올렸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결국은 또 다시 그 이름으로 돌아왔다.
“이용당하고 또 이용하고, 지긋지긋하지만…… 조지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어. 나한테 노동자 협회원들을 만나래. 리오든의 공장들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설득하라고 했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너에게 클레몬트의 이름을 돌려준 거겠군.”
“맞아.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할 수 있을지…….”
엘리자베스는 키가 작은 의자에 쪼그려 앉아 축축하게 젖은 가죽신발을 벗었다. 폭삭 젖은 신발은 제대로 서지 못해 쭈글쭈글하게 오그라들었다. 그녀는 그런 신발을 보며 우울하게 말했다.
“할 수 있을까?”
케이는 불쏘시개 같은 꼬챙이를 찾아 신발을 꿰어 아궁이 옆에 세웠다. 엘리자베스는 타닥타닥 불꽃이 튀는 아궁이 옆에 놓인 가죽 신발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타버리면 어떡해!”
“다니엘 놈 거 아니야? 그냥 타버리라고 해.”
케이는 당장 신발을 불 속에 집어넣고 싶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까도 말했잖아. 할 수 없으면 그냥 튀자고. 그러니까 일단 해봐. 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어. 그리고 넌…….”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턱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넌 엘리자베스 클레몬트야. 넌 뭐든지 할 수 있어. 퀴닌을 발명하고, 국회의원 추천인이 되고, 결국은 여기까지. 넌 뭐든지 네가 하고 싶은 걸 다 했잖아. 내 말은 한 귀로 들어 한 귀로 흘리면서.”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살짝 웃었다.
그녀는 스타킹을 벗어서 옆에 가지런히 놓고 발을 약재가 담긴 물에 담갔다.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몸이 바르르 떨렸다. 만족스러운 따스함에 엘리자베스가 대야 안에서 발을 꼼지락거렸다.
케이가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옆에 있는 스타킹을 집었다. 엘리자베스가 그걸 보곤 얼른 스타킹을 빼앗아 들었다.
“이건 안 돼! 냄새가 날 거야.”
“말똥 냄새보단 낫겠지.”
케이는 피식 웃으며 스타킹도 아궁이 옆에 두었다. 그러곤 엘리자베스가 항의하려고 하기도 전에 대야에 담긴 엘리자베스의 발을 손으로 만졌다. 엘리자베스가 하얗게 질려서 버둥거리려고 했다. 하지만 케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자베스의 발을 손으로 주물렀다.
“더러워……!”
“…….”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하얀 발을 바라보며 대답 없이 발을 주무르기만 했다. 조그마하고 하얀 발은 발 끄트머리는 분홍색이었고 발톱은 케이의 엄지손톱만 했다. 케이는 구두닦이 소년들이 하는 것처럼 엘리자베스의 발의 피로를 풀어줄 수 있는 곳을 꾹꾹 눌러댔다.
엘리자베스는 저항을 멈췄다. 케이의 손길은 저항할 수 없이 부드럽고 적당히 시원했다. 몸의 피로가 전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하이힐을 신었을 때보단 발이 훨씬 편해 보이네.”
“하이힐을 신었을 때?”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리다가 케이가 언제 자신의 맨발을 본 적이 있었는지를 생각해봤다. 칼몽 여관에서일까? 아니면…….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발 한쪽을 물속에서 꺼냈다. 물기가 있는 발이 밖으로 나오니 한기가 들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엘리자베스가 몸을 떨었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발등에 입을 맞췄다.
마치 국왕에게 신하가 충성을 맹세하듯이.
마치…….
우리의 첫날밤에 네가 나한테 했듯이.
엘리자베스와 케이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엘리자베스는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 케이가 그날의 기억을 전부 가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날의 기억 때문에 몸을 떨었다. 케이가 입술을 열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첫날밤처럼 이렇게 이야기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긴장된 눈으로 케이를 보았다.
‘너는 날 사랑하지 않아. 너는 나를 그저 이용하고 쓰다버리고 싶을 뿐이야.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마치 네 아버지가 노동자인 내 아버지에게 너를 빌려주는 척하면서 공장을 빼앗아오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러니 나도 널 사랑하지 않겠어.’
“나를 이용해. 나를 쓰다 버려. 대신에…… 나를 사랑해. 나를 보고 싶어 하고 또 나를…… 좋아해줘. 내가 널 사랑하니까. 사랑은 보답 받고 싶은 거니까. 내가 너한테 매달릴 거니까. 그렇게 해.”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제 쪽으로 끌어 당겼다.
엘리자베스는 그때와 비슷하지만 다른 케이의 말을 곱씹었다. 너를 이용하라고. 너를 쓰다 버리라고. 사랑은 보답 받고 싶은 거라고.
엘리자베스는 케이 역시 그 말을 기억하고 있음을 알았다.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얻었던 그날 밤. 저 건방진 자식을 제게 달라 조르고 졸라 케이를 소유했던 그날 밤. 그렇게 가졌던 케이가 제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나갔던 그날 밤.
그 밤을 케이 역시 엘리자베스처럼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비슷하지만 다른 저 말은 이런 뜻이었다.
“이번에는, 나를 가져.”
엘리자베스는 제 사랑이 보답 받고 있다는 것을 인생 처음으로 느꼈다. 엘리자베스의 내면에는 욕망이 가득 찼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해도 된다고 허락받은 순간, 좋아하는 마음을 보답 받은 순간.
너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인지 너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인지 여전히 알 수는 없는 이 뜨거운 욕망.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그의 목에 손을 둘렀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끌어왔다. 엘리자베스는 순순히 케이의 다리 위에 앉아서 케이의 허리에 발을 둘렀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올려다보며 헝클어진 얼굴로 말했다.
“……너랑 이렇게 있으면 아직도 열아홉일 때나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느껴져. 그때로부터 조금이라도 도망치길 원했는데, 그랬는데……. 조금도 크지 못했어. 나는 엉망이야.”
하지만 조금 더 엉망이어도 되겠지. 네 말에 속는 척해도 되겠지.
케이는 생각했다.
5개월 동안만.
그냥 지금처럼 나는 너를 갖고, 너는 나를 갖는 척해도 되겠지.
인생의 마지막이니까.
어차피 이 뒤는 절벽이니까.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부드러운 종아리를 매만지다가 엘리자베스의 허벅지 아래를 단단하게 받치고 엘리자베스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엘리자베스의 몸이 뒤로 넘어가려고 하면 케이의 손이 엘리자베스를 일으켜 세웠다. 숨도 새어나갈 수 없을 만큼 케이는 엘리자베스와 제 입술 사이에 공간을 남기지 않았다.
두 사람의 그림자 위로 떨어지는 빗물의 그림자가 쉴 새 없이 내리쳤다. 마치 두 사람이 빗속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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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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