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26화
“영지가 아니라 사유지로 했다. 너에게 영지를 준다고 한들 네가 영주 노릇을 할 것 같지 않았을 뿐더러 쉐필드가 네 것이 된다면 네가 거기에 농노들을 부리겠느냐. 노동자들의 일터를 만들겠지.”
조지의 말을 들으며 엘리자베스는 다니엘이 가져다주는 칙서를 받아들었다. 다니엘은 떨떠름한 얼굴로 칙서를 내밀었다. 그것이 엘리자베스가 아니라 케이를 믿지 못해서임을, 엘리자베스는 알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칙서의 아래쪽에 적힌 국왕의 서명과 교회의 날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위에 조지 왕자가 채 읽지 않은 부분을 읽어 내렸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에게 ‘경’ 칭호를 내리는 바이다……]
“너는 이제부터 엘리자베스 클레몬트다. 너는 왕가의 성을 가지고 있는 여인인 동시에 경 칭호를 가진 과학자이기도 하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 너는 레본의 새로운 역사야. 최초의 왕실 여성 과학자. 최초의 경 칭호를 획득한 여인.”
새로운 역사.
엘리자베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조지와 칙서를 번갈아보았다. 역사는 여자의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 엘리자베스가 불과 지금으로부터 4개월 전에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엘리자베스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레본이 멸망한다고 해도, 레트니가 리오든을 수복해 조지와 함께 케이, 엘리자베스, 노동자들이 전부 리오든에서 죽는다고 해도—
이제 레본의 역사는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싣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조지가 엘리자베스의 눈동자가 떨리는 것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퀴닌을 사겠다는 이오페아의 나라가 줄을 섰다. 해상 무역에 본격적으로 도전하고 싶은 게지. 나는 너에게 퀴닌을 사고, 너에게 왕실의 이름과 쉐필드를 주었다. 너는 무엇을 줄 것이냐? 말해보아라. 엘리자베스.”
조지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힘겹게 입을 떼었다. 그 순간 밖에서 번개가 쳤다. 엘리자베스가 놀라서 창문을 바라보았다. 천둥이 뒤따라왔다. 쿠구구궁! 그 다음은 비였다. 빗소리가 귀를 때리기 시작하자 조지가 만족스레 웃었다.
“철옹성을 앞에 둔 군대에게 천둥 번개라니.”
* * *
식사가 거의 마무리 되어 갈 즈음에 식사실로 군인 하나가 들어왔다. 그는 다급해 보이는 얼굴로 다니엘에게 뭔가를 속닥거렸다. 다니엘은 조지에게 그것을 전했다. 조지는 그 말을 듣더니 묘한 표정을 지으며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조지가 말했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너를 붙잡고 너무 오래 이야기를 했구나.”
조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자베스는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전쟁이 일어난 건가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조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전쟁은 없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엘린크 성에서 전쟁이 일어날 일은 없다. 저들이 의미 없이 총알을 낭비하는 것을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조지의 말을 들으며 레트니가 엘린크 성까지 진격해왔음을 알았다.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조지는 그것이 아무 의미 없이 총알을 낭비하는 짓이라고 말했지만 엘린크 성에서는 분명 피바람이 불고 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쭈뼛거리고 서 있는 사이 조지가 엘리자베스의 인사조차 듣지 않고 군인과 대화를 나누며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다니엘은 그런 조지를 보고 있다가 엘리자베스에게 다시 별궁으로 모시겠다며 다정하게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다니엘을 따라 문을 나섰다.
궁의 식사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 회랑으로 둘러 있는 바깥문에 이르기가 무섭게 엘리자베스는 보초들의 총칼 앞에 우뚝 서 있는 케이를 만났다. 케이는 비에 흠뻑 젖은 채로 엘리자베스를 에스코트하는 다니엘을 보며 살기등등한 눈빛을 쏘았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엘리자베스는 2시간 넘는 식사 자리 동안 케이가 꼼짝도 않고 여기에 있었을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대답 없는 케이의 음울한 눈을 보고 있자니 제 추측이 맞은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다니엘에게 인사를 했다. 다니엘은 싱긋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엘리자베스는 총칼을 치우는 보초들을 지나쳐 케이의 팔을 잡았다. 소매가 축축하다 못해 물이 뚝뚝 흘러나왔다.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조지가 뭐라고 하던가? 개 같은 요구를 해온 건 아니겠지.”
엘리자베스는 제 뒤에 서 있는 보초들의 눈치를 보며 케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은 비가 들이치는 회랑을 걸었다. 엘리자베스의 바지자락도 조금씩 젖어 들어왔다. 그녀는 보초들이 들을 수 없는 곳까지 걸어가서 말했다.
“입 조심해. 여긴 컬로든 궁이야.”
“궁이 아니라 그 어디라도 상관없어.”
쿠구구궁!
천둥이 쳤다.
비가 몰아치고 케이와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번쩍거렸다. 케이의 굳은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어차피 나는 괴물이니까.”
케이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이 궁쯤. 쑥대밭으로 만들고 너랑 같이 도망가면 그뿐이야.”
“나는 도망 안 가.”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절대 도망 같은 건 안 가. 이번엔 2만 명도 아니고 400만 명이야. 리오든에 있는 사람이 400만 명이라고.”
“그들 중 절반쯤은 네가 여자라고, 여자 과학자라고 욕하겠지. 또 나머지 절반의 절반쯤은 너를 마음대로 자신들의 구원자라고 여기고 있을 거야. 언제든 너를 자신들 대신에 사지에 몰아넣을 준비를 하며.”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비틀린 얼굴을 보며 대답했다.
“나는 도망 안 가. 그 누구도 버리지 않을 거야. 리오든도, 레본도, 그리고…… 너도. 아까 분명히 얘기했잖아. 같이 살 거라고. 그 ‘같이’에 너도, 나도, 리오든도, 레본도 들어가는 거야. 그 누구도 빠지지 않는 거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가만히 서서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았다.
“왜…… 왜 그래야 되는데? 살고 싶다며. 살아야겠다며. 의회 청사에서 분명히 그렇게 얘기했잖아. 살고 싶다고 했잖아. 분명히…….”
케이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제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바싹 다가갔다. 김이 피어오르는 케이의 가슴께에 손을 가져다대고 한쪽 손은 케이의 뺨에 대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엉망이 된 얼굴을 보았다.
널 이렇게 엉망으로 만드는 사람이 나일까? 언제부터 그럴 수가 있게 된 걸까? 내가 몰랐던 그 어느 때부터?
“네가 죽으면…… 나는 견딜 수가 없어…….”
케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엘리자베스는 그의 고통이 전해오는 것 같아서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나도 알아…….”
“너는 몰라. 내가 어떤 기분인지……. 내가 어떤 기분으로 지난 시간을 보냈는지…… 너는 몰라. 너는 죽을 때까지 몰라…….”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내가 지금 그런 마음인데.
널 잃을지도 모르는 지금, 내가 바로 그런 마음인데.
엘리자베스는 그런 말들은 속으로 삼켰다. 그녀는 그저 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케이를 올려다보며 거친 숨만 쌕쌕 뱉어냈다.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래도. 아무리 같이 살자고 해도…… 정말 죽을 것 같으면 도망치겠다고 약속해……. 반드시 살겠다고 약속해……. 네가 죽으면 나는 죽어서도 고통에 몸부림칠 거야. 나는 지옥에 떨어질 거야. 나는…….”
엘리자베스는 더는 케이의 말을 듣지 못하고 케이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작은 얼굴을 가만히 매만지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엘리자베스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대었다.
케이는 제 몸이 주인을 잃어버린 강아지처럼 벌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가져서는 안 될 것을 가진 두려움. 태양을 향해 날다가 날개가 녹아 추락할지 몰라 오는 공포.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을 거라는 강력한 예감.
너는 언제나 나에게 내가 불행해질 거라고 쓰여 있는 예언서 같았다.
케이는 부드러운 엘리자베스의 입술이 제 입술 위에서 오물거리는 것을 느꼈다. 거센 풍랑처럼 제 마음에 이는 욕망을 느꼈다. 그 욕망은 케이의 몸을 덮쳐 케이가 도무지 헤엄쳐 나올 수 없을 급류로 그를 끌고 갔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제 배 쪽으로 잡아당겼다. 두 사람의 몸이 남김없이 닿았는데도 케이는 갈증이 났다.
그는 엘리자베스의 입술이 떨어졌을 때 중얼거렸다.
“너를…… 너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말은…… 전부…… 전부 취소야…….”
그 말에 엘리자베스가 뭔가를 대답하기도 전에 케이의 입술이 엘리자베스의 입술을 막았다.
* * *
케이와 엘리자베스는 깜깜한 별궁에 도착했다. 엘리자베스는 듬성듬성 초만 놓여 있는 복도를 걸어가며 케이에게 중얼거렸다.
“춥다…….”
“이쪽으로 와.”
케이는 재킷을 벗어서 난간에 아무렇게나 얹고 그나마 젖지 않은 셔츠 차림으로 엘리자베스를 품 안에 안았다. 그러더니 계단 아래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따뜻한 물에 발 담글 거야?”
케이의 질문에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하녀들을 깨우지 않고 멋대로 물을 데울 것임을 알고 조금 망설이다가 따뜻한 물에 발을 넣는 순간을, 그 순간의 따스함을 떠올리며 살짝 웃었다.
“그래. 그러고 싶어.”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별궁 지하로 향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익숙하게 은촛대를 하나 들어 올리는 것도, 품위 따윈 개나 줘버린 듯 셔츠 단추를 끄르는 것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지하에 있는 부엌에서 하녀들이 쓸 것 같은 담요를 꺼내 엘리자베스에게 덮어주고 커다란 통에 물과 약초를 담아 끓이는 것을 보며 물었다.
“별궁 지하는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아는 게 아니고, 원래 귀족 놈들 지하는 다 이렇게 생겼어. 그런데 귀족 놈들이 집을 어떻게 지었겠어? 컬로든 궁을 따라 지었겠지. 귀족 놈들은 왕실을 따라하는 걸 좋아하니까.”
부엌 안은 금방 향기로운 수증기로 가득 찼다. 엘리자베스는 타닥타닥 튀는 불빛을 가만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 부모도 그런 걸 좋아했어. 왕실을 따라하는 것.”
엘리자베스의 말에 아궁이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케이가 고개를 돌려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왕자와 결혼하지 않았지?”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왕자와 결혼?”
“그래. 조지 왕자가 널 좋아했다잖아.”
“하. 그건 그냥…… 왕자님이 식사 자리에서 농담을 하신 거야. 이젠 왕자님도 아니지만…….”
엘리자베스는 헛웃음을 지으며 불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나는 왕비 같은 건 못 되는 사람이야.”
케이는 쪼그려 앉은 그대로 다시 불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말했다.
“너는 뭐든지 될 수 있는 사람이야.”
불쪽을 바라보며 말하느라 웅얼거리는 그 말이, 갑자기 엘리자베스의 마음속에 콕 박혀 들어왔다.
아까 조지 왕자가 엘리자베스를 레본의 역사이자 미래라고 불렀을 때와는 결이 다른 이상한 슬픔과 억울함이 엘리자베스를 덮쳐왔다.
나는 뭐든지 될 수 있다니.
엘리자베스는 제 얼굴을 두 손바닥으로 감싸 쥐었다.
“……나는…… 나는 언제나 내가 될 수 없는 것들만 들어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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