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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25화 (225/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25화

사냥을 하지 않고도 승리를 얻어내고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잔혹할 수 있는 방법.

엘리자베스는 조지 국왕의 영악함에 몸을 떨었다. 조지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보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2주 동안 수성을 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도 없다. 엘린크 성주에게 많은 병력을 내주었다. 엘린크는 지대가 험하고 성이 험준한 지형의 위쪽에 있지. 수성에는 최고의 입지라고 할 수 있다. 2주면 아버지의 군대는 보급품은 물론이요 탄환 한 알이 남지 않아 내 발밑으로 기어들어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땐 내가 그분을 맞아야겠지.”

조지는 다정한 얼굴로 엘리자베스를 바라보았다.

“예의를 갖추어서.”

조지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숨을 들이마셨다. 조지의 우아한 손짓이 얼마나 냉철한 계산 끝에 나온 것인지 알 것 같아서. 그녀는 차마 조지의 눈을 보지 못하고 와인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조지가 말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이오페아 각국의 외교관들을 만났다. 박람회 때문에 들어온 자들이었지. 나는 그들에게 해상 봉쇄를 부탁했다. 저마다 다른 조건을 제시했지만 리오든에는 그 모든 조건을 받아들이고도 남을 물자가 확보되어 있다. 수많은 공장들. 그 공장을 굴릴 자본과 노동력. 그 어떤 나라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할 리가 없다.

리오든은 이오페아의 산업을 이끌어가는 도시였다. 조지가 그런 리오든의 공장을 놓고 외교관들과 거래를 했다면 이오페아의 그 어떤 나라도 갸흐통과 레트니 군대에게 식량이나 군수물자를 파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갸흐통 본국도 금방 군대를 철수시키고 싶어 할 것이고 갸흐통 군대가 떨어져나가면 레트니와 귀족들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조지 왕자의 계산에는 틀림이 없었다.

단 하나.

“자본가들의 지지는 당연히 얻으실 수 있습니다. 그들은 폐하께서 달리 더 무엇을 보여주지 않아도 레트니가 아니라 폐하를 지지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득이 됨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귀족에 대한 증오가 강력합니다. 하지만—”

리오든의 노동자들은 조금 달랐다. 물론 그들이 박람회에서 있었던 조지 왕자의 의회민주주의 선언을 높이 산 것은 사실이나, 노동자들은 귀족만을 혐오하는 것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자본가들 역시 혐오했다. 평민원에서 자본가들이 제 뱃속이나 불리는 정책에 동의하는 꼴을 보며 환멸을 느꼈던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단호하게 자신의 생각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까까지의 떨리는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조금 다릅니다. 그들은 폐하에 대한 신뢰가 약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힘을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공장을 굴리는 것은 기본적으로 노동자들입니다. 총칼로 수백, 수천은 노예처럼 부리실 수도 있지만 지금 공장을 굴릴 수만,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은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폐하.”

엘리자베스가 쏟아내는 말들을 들으며 조지 국왕의 눈이 흥미롭게 빛났다. 엘리자베스는 조지 국왕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제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이 건방졌음을 깨달은 그녀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저, 저는…….”

“아니. 너의 말이 옳다. 너는 참으로 탐이 나는 자다.”

조지는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보았다. 엘리자베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을 내내 바라만 보던 조지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너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다. 내가 그 사실을 몰랐을 것 같으냐? 너는 여전히 내가 뻔히 보이는 상황에도 눈을 감는 선왕과 같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구나.”

엘리자베스는 조지가 레트니를 ‘아버지’가 아닌 ‘선왕’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으며 침을 삼켰다. 조지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선왕과는 다르다. 노동자들의 손을 잡아야 하는 때라면 나는 주저 없이 잡을 것이야. 물론 그들이 나의 손을 잡아준다면 말이지.”

조지는 아까 케이와 악수를 했던 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조지는 그렇게 말하곤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퀴닌을 사고 싶다. 꽤 많은 분량이 될 것이야. 박람회에서 토닉워터 부스는 처절하게 실패했다지? 단 한 건의 계약도 따내지 못했고.”

엘리자베스는 조지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얼굴을 붉혔다.

처절하게 실패.

엘리자베스는 박람회에서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달랐을 거라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국왕의 앞에서 그런 아이 같은 핑계를 댈 수는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빨개지는 얼굴을 손등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제, 제가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토닉워터는 분명히 대중성이 있는 음료로…….”

“대중성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박람회에서 못 봤느냐? 대중들이 현혹되는 물건들은 따로 있어. 그게 진짜든 아니든 대중들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조지의 말에 박람회에서 보았던 천국의 목소리를 들려준다며 사람들을 현혹했던 축음기를 떠올렸다.

‘보고 싶었어…….’

갑자기 케이 하커의 붉어진 얼굴이 떠올랐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살고 싶어.

엘리자베스는 그 말이 주는 울림을 끔찍하리만큼 잘 알고 있었다. 어제까지도 엘리자베스 역시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케이 하커를 사랑하기에 살고 싶다고.

그녀는 여전히 찡한 아픔이 밀려오는 손등의 상처를 바라보았다. 이 아픔. 이 고통이 엘리자베스가 살아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살아 있음으로 인해, 케이를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몰려왔다.

엘리자베스는 해일처럼 밀려오는 불안감에 잠식되지 않으려, 난파된 배 위에서 줄을 붙잡고 있는 선원처럼 테이블 아래로 냅킨을 꽉 쥐었다.

방법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반드시.

엘리자베스는 5개월이라는 시간 앞에 무릎을 꿇는 대신에 케이와 함께 걸어가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5개월 이후의 삶이 지속될 것처럼 믿고 함께.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눈앞의 이 남자가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해야 했다.

이 남자가 리오든의 미래였으니까.

“대중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물건을 좋아하는 것이다. 사교계에서 입지가 탄탄한 가문의 물건이라면 다 따라 사는 것도 그런 심리지. 하지만 퀴닌은……. 그리고 퀴닌을 집어넣은 토닉워터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거울처럼 비춰주지 못했다. 왜인 것 같으냐? 그건 퀴닌이 아직 평민들에게는 너무 비싼 약으로 비치며 귀족에게는 평민들이 ‘감히’ 제 몸을 챙기자고 만든 약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그러니 퀴닌을 생소히 여기는 이들이 토닉워터를 사먹을 이유는 단 하나.”

조지가 엘리자베스를 가리켰다.

“너다. 네가 리오든의 미래로 비치면 되는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조지의 말에 꽉 쥐고 있던 냅킨을 놓았다. 엘리자베스는 그녀가 리오든의 미래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자신을 리오든의 미래라고 칭하는 것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공손하고 정중한 말을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려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

“리오든의 미래라니……. 저는……. 저는 폐하…….”

“사람들의 비웃음이 두려우냐? 너를 보았던 귀족들의 경멸 어린 시선이 아직도 그리 두려워?”

조지는 손가락으로 식탁을 톡톡 두드리다 엘리자베스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녀는 조지의 얼굴을 보았다. 조지는 엘리자베스를 향했던 손가락을 거둔 후 말했다.

“아니. 너는 두렵지 않다. 너는 사실 조금도 두렵지 않아. 내가 말했지 않느냐. 너는 케이와 닮았다고. 너는 사실 케이만큼이나 건방지고 오만하다. 너는 네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네가 과학을 배운 여자라고 손가락질 받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 내가 너한테 말하지 않았느냐. 너는 올곧고 정직하며 성실하다고. 하지만 거기에 덧붙여 너는 너를…….”

조지는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너는 너를 믿고 있다. 너만을 믿고 있지. 너는 너만을 따르고 케이도 너만을 따르고. 결국은 리오든 전체가 너를 보고 너를 리오든의 미래라고 볼 것이다. 여성 과학자. 평민도 귀족도 아닌 여인. 노동자들은 너를 부러워하고 귀족들은 너를 폄훼해야 한다. 너를 변절자라고 여기고 은밀히 너를 동경해야 한다. 네가 개발했다는 퀴닌이 들어간 토닉워터를 집사를 시켜 몰래 사들이고 몰래 침대 맡에 올려두고 몰래 마셔야 해. 은밀한 욕망만큼 주체할 수 없는 게 어디에 있느냐. 그만큼 진실한 게 어디에 있어. 그러면 나는…… 나는 욕망의 대상이 된 너를, 너를 그 자리까지 올려준 사람이 될 것이다. 국왕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이 되어야 하니까.”

조지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엘리자베스는 언제나 노력해왔다. 이렇게 비천한 스스로를 믿어보려고, 스스로를 아껴보려고, 내가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려고.

그런데 조지는 이미 그걸 엘리자베스가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말일까? 엘리자베스는 엘리자베스를 이미 사랑하고 있을까? 믿고 있을까? 내가 나를 믿고 있다면 그 어떤 보장이 필요할까.

엘리자베스는 조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에게 명하고 싶으신 것이 무엇입니까, 폐하.”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조금도 굽히지 않는 얼굴로.

조지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보며 그 누구의 앞에서도 굴종을 갖추지 않는 한 남자를 떠올렸다.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네가 노동자 협회원들을 만나주었으면 한다. 그들 앞에 내 뜻을 밝히고 그들을 설득해다오.”

“노동자 협회요?”

엘리자베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기본적으로 레본에서는 노동자들이 조합을 만드는 것이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데 협회라니?

“케이 하커가 도와줄 것이다.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너를 국회의원으로 만들고 케이에게는 멜니아와 거래할 길을 터준, 그 사람들. 그 수많은 사람들.”

조지는 엘리자베스의 순진한 눈망울을 보며 퍽퍽한 고기를 잘랐다. 그것을 입안에 넣고 입안 가득 퍼지는 고기 향을 음미했다. 엘리자베스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조지를 보았다.

조지가 앰버와 케이가 하던 일을 알고 있다.

엘리자베스는 모르는 척은 포기하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이라면 케이가 설득하는 편이…….”

“케이는 자본가다. 자본가이기만 한가. 케이는 나에게 목숨이 저당 잡혀 있어. 케이 하커가 그들을 설득하는 것은 큰 소용이 없다. 하지만 너는 공녀다, 엘리자베스. 네 말은 곧 내 말이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말이다.”

조지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뒤에서 시종이 문을 열었다. 문 뒤에 서 있던 다니엘이 칙서 하나를 들고 와 조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조지는 그것을 집어 들고 읽었다.

“짐은 레본 왕의 권한으로 엘리자베스를 엘리자베스 클레몬트로 복권시킨다. 그와 동시에 모든 왕족의 권한이 엘리자베스 클레몬트에게 돌아가고 왕의 사유지로 귀속된 쉐필드 땅 역시 엘리자베스의 사유지로 하사한다.”

엘리자베스의 푸른 눈이 커다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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