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혼하러 돌아왔다 224화 (224/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24화

다니엘 빌리스가 별궁 입구로 들어왔을 땐 엘우드가 엘리자베스의 손 치료를 마친 다음이었다. 다니엘은 계단 층계에 주저앉아 있는 케이를 보며 입모양으로 이렇게 지껄였다. 품위 없는 개새끼. 케이는 분명 그 입모양을 읽은 것 같았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케이를 지나쳐 계단을 올라갔고 1층과 2층 사이 계단이 꺾이는 곳 의자에 앉아 있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세상에. 깨진 병에 찔리거나 하신 겁니까? 별궁 하녀들을 전부 교체하겠습니다. 오웬! 이쪽으로…….”

“아니요. 제가 페이퍼 나이프를 쓰는 데에 부주의해서 벌어진 일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지친 눈으로 다니엘을 보았다. 다니엘은 지친 얼굴의 엘리자베스를 미심쩍게 바라보다가 입맛을 다셨다.

“그러시다면……. 괜찮으십니까?’

다니엘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은 계단 아래에 뚝 떨어져 있는 케이 하커와 엘리자베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무척이나 궁금한 눈치였지만 조지 국왕의 충실한 심복답게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고 다정하게 웃으며 엘리자베스에게 조지 국왕의 저녁 초대 얘기만을 전달했다.

“저녁…… 이요?”

하지만 엘우드 밀은 오늘 밤, 레트니와 조지와의 전쟁이 시작될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엘리자베스는 조지가 자신과 저녁 식사를 할 여유가 있다는 것이 다소 놀라웠다.

“네. 폐하께서 엘리자베스 양이 일어나셨다는 얘기를 듣고 무척이나 기뻐하시며 식사를 함께 하자고 하셨답니다.”

그 말에 케이가 다니엘의 등 뒤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도 같이 가면 되겠군.”

다니엘은 케이를 내려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거기 계셨군요. 저는 인사도 없이 감히 별궁 계단에 앉아 계신 분이 케이 하커 씨일 줄은 상상도 못했지 않습니까.”

다니엘의 말에 케이는 대꾸하지 않고 다니엘이 있는 층계까지 올라가 다니엘을 내려다보았다. 다니엘은 케이의 눈자위가 빨갛고 부어 있는 것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묻지 않고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초대는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에게만 해당됩니다. 아시다시피 상황이 상황인지라 폐하께서 무척이나 예민하신 상태라 오랜만에 친척 동생과 회포를 풀고 싶으시다는 군요.”

“……다니엘 빌리스…….”

케이는 다니엘의 꿍꿍이를 알 수 없다는 생각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다니엘은 케이를 노려보며 말했다.

“경입니다. 경칭을 조심하셔야지요. 이곳은 자유로운 홀이나 클럽이 아니라 궁입니다. 케이 하커 씨.”

다니엘 빌리스와 케이가 서로를 노려보는 것을 위태롭게 바라보던 엘리자베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이는 왜 저렇게 예민하게 구는 걸까? 다니엘은 다정한 표정을 흉내 내던 것은 또 어디에 가져다버린 것이고.

엘리자베스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알겠어요. 그런데 변변한 드레스가 없어요. 어떡하죠?”

“엘리자베스.”

케이는 나지막이 엘리자베스를 불렀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손바닥을 내보이는 것으로 그를 진정시키며 다니엘에게 물었다.

“그냥 셔츠에 바지 차림도 괜찮은가요? 전처럼? 하지만 전에는 그저 점심 즈음의 알현이었고 이번에는 정찬 초대인데…….”

다니엘은 저 거구의 남자를 간단한 손짓 하나로 쉽게 부리는 엘리자베스를 흥미롭다는 듯이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겁니다. 폐하께서는 격식을 따지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원하신다면 왕비 전하께 말씀드려 볼 순 있습니다. 드레스를 선호하시나요?”

엘리자베스는 제 차림새를 내려다보았다. 박람회에서 입은 셔츠와 바지 차림 그대로였다. 제대로 빨지 못해 냄새가 날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대답했다.

“……셔츠와 바지를 빌릴 수도 있나요? 다니엘 경 정도면…… 저한테 빌려주시기에 알맞을 것 같은데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이를 바드득 가는 소리가 다니엘의 귀에 들려왔다. 다니엘은 가느다란 제 몸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예, 뭐. 가능합니다만 키가 제가 더 커서 아마 조금 접어 입으셔야 할 것 같으니 체격이 작은 궁궐지기의 옷으로 조용히 알아보겠습니다.”

다니엘은 그렇게 말하며 한쪽 무릎을 굽히고 손을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니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니엘은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는 일부러 케이에게 힐끔 시선을 던지곤 엘리자베스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 * *

“이렇게 너를 만나 옛날 얘기를 하니 전쟁통이라는 걸 잊을 만큼 좋구나!”

조지는 정찬의 시작부터 옛날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그가 말하는 옛날이야기라는 것들은 엘리자베스로서는 그저 지우고 싶은 기억에 불과한 궁궐에서 두 사람이 마주쳤을 때의 이야기, 엘리자베스가 사교계에서 첫 춤을 누구와 췄는지에 대한 이야기 따위였다. 엘리자베스는 더듬거리며 조지의 말을 받다가 ‘전쟁통’이라는 말에 어깨를 움츠렸다. 콩을 집으려고 하던 포크가 헛돌아 접시 바닥을 쳤다.

쨍그랑. 은 접시가 식탁 위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조지는 그것을 보더니 큭큭거리며 웃었다. 조지는 푸른 눈동자로 엘리자베스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네가 좋다.”

“예? 아니…… 예?”

엘리자베스가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더듬자 조지는 더 크게 웃었다. 웃다가 사레가 걸려 냅킨으로 입을 막고 웃기까지 했다. 조지는 한참을 웃다가 얼굴이 새빨개진 엘리자베스에게 미안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설마 너에게 연심을 고백하는 것 같으냐?”

“아, 아뇨. 그런 게……. 그런 의미로…… 그런 생각을 한 것이……. 그게 전혀 아닙니다. 전하.”

전하.

엘리자베스는 조지를 국왕이 아니라 왕자로 여겨 경칭을 붙인 것을 바로 깨달았다. 엘리자베스는 겁먹은 눈으로 조지를 보았다. 엘리자베스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으려고 하자 조지가 손사래를 쳐 엘리자베스를 막았다. 그는 가만히 엘리자베스를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나는 이런 네 모습이 좋다.”

조지 왕자는 포도주 잔을 휘휘 돌리고 포도주 향기를 맡더니 곁에 있던 시종을 불렀다. 조지는 포도주를 시종에게 내밀었다. 시종이 포도주를 한 입 먹는 것을 가만히 보던 조지가 고개를 끄덕이곤 시종이 가보도록 했다. 조지는 시종이 먹은 포도주 잔을 집어들고 마셨다.

“국왕의 주변에선 너 같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너처럼 올곧고 정직하며…… 성실한 사람 말이다.”

엘리자베스는 조지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긴장한 얼굴로 얼른 말을 받았다.

“가, 감사드립니다, 폐하. 실수를 너그러이 용서해주신 것도 감사드려요.”

“하지만 너를 지켜보는 것은 즐거워도 너를 갖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다. 너는 내 충신으로든 국왕의 여자로든 적합한 사람이 아니야. 국왕의 주변에 너처럼 올곧은 이는 독이 될 수밖에 없다.”

국왕의 여자.

엘리자베스는 그 말에 또 잠시 어깨를 움츠렸다. 조지는 그것을 보곤 또 웃었다.

“봐라. 넌 참으로 성실하지 않느냐.”

조지는 포도주를 홀짝거리며 말했다.

“……케이 하커라는 남자에게 말이야. 둘은 전혀 닮지 않았지만 이런 점에선 결국 닮았구나…….”

엘리자베스는 조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몰라 헤맸다. 조지는 구운 새끼 돼지가 식탁 위에 올라올 때까지 계속해서 엘리자베스를 이런 식으로 놀려댔고 엘리자베스는 어쩔 줄을 몰라 허둥댔다.

마침내 구운 새끼 돼지가 통으로 식탁에 올라왔을 때 조지는 칼과 꼬챙이를 들고 돼지의 살을 손쉽게 잘라내어 엘리자베스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껍질과 귀, 그리고 살코기를 골고루 올렸다. 전부 맛보아라.”

조지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감사를 표했다. 조지는 제 접시에는 퍽퍽한 살 부분만 올리며 말했다.

“나는 퍽퍽한 부위가 좋다. 돼지기름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사냥터에선 라드와 빵 외에 다른 것을 먹을 수가 없지 않느냐. 아버지를 따라 사냥터를 전전하면서 어릴 적에 돼지기름을 굳힌 라드를 매일 먹다시피 했더니 돼지기름 자체가 지겨워졌다.”

조지는 자리에 돌아가 앉아 퍽퍽한 살을 입안에 넣고 음미했다. 그러고는 와인을 교체하라고 시종에게 손짓했다.

아버지라는 말에 엘리자베스는 고기를 집은 포크를 내려놓았다. 조지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시종이 와인을 두고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사냥을 나가 본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사냥이라니. 어릴 적부터 사냥을 즐기는 귀족 영애들도 있다고는 들었지만 엘리자베스에게는 먼 이야기였다. 클레몬트 공작부부는 엘리자베스가 말을 타는 것을 두려워하다시피 했다. 그들은 백 년 전의 사람처럼 여자가 말을 타면 말의 머리를 가진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고 말하곤 했다.

“그래. 없겠지. 내가 너를 사냥터에서 봤을 때 너는 승마도 활쏘기도 즐기지 않았으니 하물며 살아 있는 것을 죽이는 일이야…….”

조지는 그렇게 말하며 와인을 엘리자베스의 잔에 따르고 자신의 잔에도 따랐다. 조지는 시종이 맛보지 않은 제 잔을 바라보다가 싱긋 웃었다.

“두려우냐? 전쟁이라는 것이.”

“두렵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식사 동안 처음으로 진심을 이야기했다. 전쟁은 엘리자베스가 이전 생에서는 조금도 보지 못했던 미래였다. 엘리자베스는 조지 왕자의 뒤편으로 해가 다 저물어 어둠이 깔린 리오든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밤이 오고 있다.

레트니가 오고 있다.

“정말 오늘 밤 전쟁이 벌어집니까?”

엘리자베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조지가 눈을 내리깔았다. 조지는 딴청이라도 피우듯 계속 다른 곳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니. 전쟁은 벌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수성만 할 것이다.”

“하지만 갸흐통 군대가 남부를 점령하면…….”

“나는 아버지의 군대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을 2주 정도로 보고 있다.”

조지는 시종이 맛보지 않은 와인잔에 담긴 와인을 한꺼번에 털어 넣었다. 엘리자베스는 다소 놀란 눈으로 조지를 보았다. 뒤에 있던 시종도 움찔했다. 조지가 말을 이었다.

“왜? 내가 자만하고 있다고 여기느냐?”

“아닙니다. 리오든의 군대를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리오든은 도시고 레본 남부는 항구만 해도 이십여 곳이 있는 곳입니다. 전쟁을 해서 굴복시키시는 편이…….”

“너도 내 아버지처럼 내가 고립될 거라 여기는 게구나?”

조지는 부드럽게 웃으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엘리자베스는 그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실 지금 리오든은 고립된 것이 맞지 않은가……?

“아니. 고립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가 될 것이다. 남부에 수많은 항구가 있다고 해도 거기로 배가 오지 않으면 그곳은 죽은 바다나 마찬가지다. 지금은 한여름이야. 수확 철까지 두 달은 남았지. 외국 군대와 협잡꾼이나 다름없는 남부 귀족들의 기사들이 산딸기와 들짐승을 잡아먹고 버틴다? 아니. 그건 불가능하다.”

엘리자베스는 조지의 얼굴에서 냉정함을 읽었다. 조지는 지금 손을 쓰지 않고 전쟁을 이길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군대를 굶기고 분열시키는 것.

*****************************************************

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웹에서 실시간으로 편리하게 감상하세요

http://novelagit.xyz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