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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23화 (223/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23화

케이를 밀쳐낸 엘리자베스는 허리춤에 꽂아두었던 총을 쥐고 케이에게 겨눴다. 벌벌 떨리는 총구를 본 케이가 비릿하게 웃었다.

“쏴보게? 쏴 봐.”

“넌 내가 우습지? 그러니까 이렇게 멋대로 구는 거지? 내가 우스워서…….”

엘리자베스의 바들거리는 손에서 총이 떨어졌다. 케이는 바닥에 떨어진 총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총을 자신에게 겨누며 말했다.

“너는 방아쇠를 당길 필요도 없어. 그냥 나한테 그러라고 말만 하면 돼.”

“……대체 왜 그랬어……? 왜 말하지 않았어?”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힘없이 주저앉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녀의 앞에 함께 주저앉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푸른 눈이 허공을 헤매는 것을 보며 말했다.

“네가 이럴까 봐. 네가 쓸데없이 또 나를 구한다는 헛소리나 할까 봐. 죄책감 때문에 나한테 붙잡혀 있을까 봐.”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죄책감……?”

“그래, 죄책감. 네가 나를 감염시켰다는 죄책감. 그런 것 때문에 네 이성이 마비돼서 나한테 치료제를 양보하겠네, 그런 헛소리 하는 거. 난 들어주고 있을 여유가 없었거든.”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엘리자베스는 뿌연 시야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맑게 만들었다.

“그게 왜 죄책감이야?”

“아니면 뭐야?”

케이는 오만하게 웃으며 리볼버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약실을 열어서 그 안에 총알이 들어 있는지 확인했다. 총알은 없었다. 케이는 총알이 없는 총을 내던지고 엘리자베스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가 제 입술을 물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앞니가 그녀의 입술을 파고드는 것을 보다가 손을 뻗었다.

“차라리 나를 물어. 너를 물지 말고.”

“죄책감 아니야. 너도 알고 있잖아.”

“뭘? 뭘 알아?”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모르는 척하며 그녀에게서 손을 떼었다. 그러고는 총과 칼을 둘 다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끔찍하게 달달한 혈향을 뿜어내는 칼은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내던지고 총은 챙겨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후 주저앉아 있는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뭐? 내가 뭘 알아야 하는데? 설마 네가 날 사랑한다는 그런 헛소리? 내가 그런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줘야 하나? 넌 며칠 전까지도 엘우드 밀과 같이 있었어. 엘우드 밀에게 심장이 두근거리고 엘우드 밀의 손을 잡았어. 두 사람이 수도원을 전전하는 동안 너는 수없이 그 남자에게 심장이 뛰었어. 그러니까…….”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듣다가 당장이라도 케이의 뺨을 때리고 싶은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수도원’ 얘기가 나오는 순간 일어난 채로 굳어졌다.

“방금 뭐랬어?”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노려보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뭐가.”

“수도원 얘기했잖아.”

“그래.”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몰록은 피를 통해 기억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한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너…… 너 꿈을 꿨어?”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케이의 얼굴에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케이의 몸은 마치 단단한 벽과 같았다. 힘이 사라졌음을 엘리자베스는 온몸으로 인식했다. 엘리자베스는 한참은 위로 올려다보아야 하는 거구의 케이를 노려보며 외쳤다.

“너 꿈을 꿨냐고!”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래. 꿈을 꿨어.”

엘리자베스가 멱살을 잡은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 순간,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낚아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제 손 안에 가두고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꿈속에서 우리는……. 우리는 부부였어. 너는 무척이나 불행해 보였어. 나와 결혼해서, 나와 함께여서. 너는 지옥에 있는 것 같았어. 내가 너의 지옥인 것 같았어, 엘리자베스.”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거친 숨을 토해냈다.

엘리자베스가 허둥지둥 말했다.

“그거…… 너 그거……. 그 꿈 말이야…… 그거 진짜 아니야……. 그거…….”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오만한 미소를 띤 얼굴로, 삐뚜름한 자세로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렇겠지. 진짜가 아니겠지. 다시는 오지 않을 미래는 진짜가 아니니까. 그건 그냥 허상에 불과하니까. 나는 절대로 다시는 너의 지옥이 되지 않을 거야, 엘리자베스.”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침대에 주저앉았다.

케이가 전부 알고 있었다.

자신의 기억을 케이가 전부……. 전부 가져가버렸다.

엘리자베스는 허탈한 얼굴로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 * *

엘리자베스와 케이가 함께 방에서 나왔을 때는 엘우드 밀이 굳은 얼굴로 두 사람을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엘우드 밀은 두 사람이 방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테이블 위에 놓인 총을 챙기곤 엘리자베스의 눈앞에서 흔들어보였다.

“너! 이거! 다시는 손에 쥘 생각 하지 마라! 너도 마찬가지야! 케이 하커!”

엘우드 밀이 두 사람에게 윽박을 질러댔다. 케이는 순순히 엘우드 밀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지만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을 스쳐지나가 혼자 복도를 뛰듯이 걸어서 1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엘우드 밀은 그런 엘리자베스를 보고 벙쪄서 케이를 노려보았다.

“너! 너 무슨 짓 했어?”

케이는 그런 엘우드 밀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엘리자베스를 쫓아 뛰었다. 별궁 입구에 다다른 엘리자베스에게 군인들이 막 말을 걸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시면 안 됩니다.”

군인들의 저지에 엘리자베스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냥 정원에 바람을 쐬러…….”

“안 됩니다. 폐하의 허가가…….”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허둥지둥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아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서 손을 빼서 뒤로 숨겼다.

“뭐야!”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달아오른 걸 보며 케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함부로 궁 안을 돌아다닐 생각 하지 마. 위험해. 궁에 폐하를 알현하러 온 귀족들이 많고 그 귀족들은 널 좋게 보지 않을 수 있어.”

케이의 말에도 엘리자베스는 뒤로 움찔움찔 물러났다. 그 바람에 엘리자베스의 등에 군인의 차가운 총검이 와서 닿았다. 엘리자베스가 우악스럽게 뒤로 자빠질 뻔한 것을 케이가 자신에게로 당겨왔다.

“내 말 못 알아들어?”

케이가 분노한 얼굴로 엘리자베스에게 소리를 지르자 엘리자베스가 눈물이 고인 눈으로 소리쳤다.

“나한테…… 나한테 소리 지르지 마! 감히……. 감히 나한테 소리 지르지 말라고! 네가 날 멋대로 살렸다고 해서, 나한테 소리 질러도 되는 건 아니야. 넌 여전히 똑같은 개자식이란 말이야. 넌…….”

엘리자베스는 이마를 짚고 뒤로 물러나 계단 난간에 기대었다. 케이가 군인들을 노려보자 그들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다가 입구 바깥으로 가서 입구 문을 닫았다. 두 사람만 남은 커다란 복도에서 엘리자베스는 계단 난간에 기대어 씩씩거렸다.

“나랑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 이제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다 알겠지? 너는 앰버가 앰버 모건이 아니라 앰버 플래스이던 시절부터 그 여자와 단둘이 멜니아로 갈 계획을 꾸몄고 나와 클레몬트 공작가를 버렸고 그리고 날 불행하게 만들었고 내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어. 네 말이 맞아. 너는 내 지옥이었어. 그 때나 지금이나 너는 내 지옥이란 말이야…… 그런 주제에……. 그런 주제에…….”

엘리자베스는 계단 난간에 기대어 케이를 노려보았다.

“그런 주제에 이제 와서 나를 한 번 구했다고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소리 지르지 마.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잖아…… 이 엿 같은 세상에서 나 혼자 살아갈 용의가 있는지, 정말 그러고 싶은지…….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았잖아.”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는 얼굴을 구겼다.

“그럴 용의가 없어도 살아야지, 너는. 내가 말했잖아. 너는 감히 맘대로 죽으면 안 된다고.”

“그럼 너는……?”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나는?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이 여자한테 내가 내 인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두 이해시켜야 한단 말인가? 케이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제 머리카락 사이를 손가락으로 헤집었다.

“나……?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엘리자베스. 너와 난…….”

“너와 난 같지 않다는 소리. 그런 소리가 바로 개소리야. 넌 어떻게 몰라……?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내 기억을 몽땅 훔쳐가 놓고도, 우리가 저번 생에서 어떻게 헤어졌는지 전부 봐놓고도……!”

“우리가 헤어진 건 전부 내가 개자식이었기 때문이야.”

“맞아. 그리고 넌 지금도 개자식이야.”

엘리자베스는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마구 비벼 닦았다. 엘리자베스의 뺨이 빨개졌다. 케이는 그것을 보더니 윽박을 질렀다.

“널 좀 그냥 가만히 내버려둬!”

“당장 죽을 자식이 내 피부가 걱정이 돼? 내가 뺨에 상처 조금 날까 봐 전전긍긍하게 돼? 넌 그래서 안 되는 거야. 혁명가라는 자식이 생명에 경중을 두고 너는 나를 살려도 나는 너를 살리면 안 된다고 말하고…….”

엘리자베스는 어느새 거칠어지는 숨으로 헐떡거리며 난간을 쥐었다. 어제까지도 이렇게 난간을 쥐면 난간이 부서질 터였는데, 이제는 손가락만 아팠다.

“……내가 널 사랑하는 건 그건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그만 하라고.”

“……너야말로 계급의식에 쩌들어 있는 퇴보적인 인간인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엘리자베스는 손등에 난 상처를 마구 쥐어짰다. 고통이 밀려왔다. 케이가 욕지거리를 하며 다가왔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눈동자가 떨리는 걸 보며 뒤로 물러났다.

“나한테 방법이 없잖아. 나는 나를 데리고 협박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잖아.”

“엘리자베스.”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제 손등에 난 상처를 손가락으로 긁는 것을 보며 이를 아드득 갈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성난 짐승처럼 구는 것을 보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케이가 분노한 얼굴로 나지막이 말했다.

“어차피 이제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어. 이제 치료제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고…….”

“살고 싶다고 말해.”

엘리자베스의 손등 위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케이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케이는 허기보다 더한 고통을 느꼈다. 갈증보다 더한 절망을 느꼈다.

“……너무…… 너무 살고 싶다고 말해.”

“너…….”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살고 싶다고. 그렇게 말해…….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이대로 내 몸에 있는 피를 다 짜내서 이 바닥에 흘려보낼 거야. 말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숨이 거칠어졌다. 엘리자베스의 신음 소리를 들으며 케이의 눈이 점점 빨개지고 촉촉해졌다. 케이는 입술을 열었다.

“살고 싶어.”

“말하라고!”

“너를…….”

케이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고 그가 몸을 반쯤 숙였다. 케이가 무너지는 것을 본 엘리자베스 역시 울음을 터트렸다. 케이가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를……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살고 싶어.

그 말은 울음소리 때문에 허공으로 자꾸만 흩어졌지만 엘리자베스는 상관없다는 듯 케이의 몸을 껴안았다. 케이가 엘리자베스를 안았다. 그녀의 금발에 코를 박고 그녀의 온기를 전달받았다.

“젠장할…… 너무…….”

너무 달콤한 향기야.

죽기엔 너무나 달콤한 순간이야.

케이는 그 말도 제대로 뱉어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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