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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22화 (222/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22화

케이는 이 미친 조지의 충신 놈이 머리가 텅 빈 놈은 아닌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다니엘 빌리스의 말이 맞았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와 함께 멜니아로 도망가지 않은 것은 레본에 대한 충심, 조국에 대한 애착 그딴 것 때문이 아니었다. 모건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모건은 간악한 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음 보는 이에게 호의를 베풀 정도로 순수한 남자도 아니었다. 모건에게 케이가 엘리자베스와 자신의 망명을 부탁했다면 모건은 순순히 허락했겠지만 뒤로는 두 사람을 이용할 방법을 강구했을 것이다. 레본에 갑작스레 나타난 두 국왕이 둘 다 전쟁터에 나서게 된 이 상황에서 복권이 논의되었던, 승계 서열까지 가지고 있는 왕족의 핏줄이라니. 어디에 팔아먹기에도 참 탐나는 제물이 아닌가.

직접적으로 이 전쟁에 참여한 갸흐통에 팔아먹기에도 좋을 것이고 직접 데리고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승계 서열이 조지와도 비할 바가 못 되는 니콜슨 공작까지 참전한 마당에, 엘리자베스가 아이라도 낳는다면. 그 아이는 태어나기만 한다면 니콜슨 공작보다 승계 서열이 높았다.

레본이나 갸흐통, 멜니아가 다른 나라라도 선택지가 될 수 없었다. 레본의 왕족인 엘리자베스는 어디에서든 탐나는 인질 정도로 여겨질 게 분명했다.

그래서 케이는 레본을 선택했다. 레본이 케이의 조국이라서가 아니라 엘리자베스의 조국이라서.

100만의 노동자도 버릴 개새끼.

케이는 다니엘이 자신의 본질을 꿰뚫었음이 조금도 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도가 되었다.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니엘이 보여주는 것 같아서. 적어도 이런 개새끼를 거느린 조지라면 왕위를 가지고도 어쩌지 못해 외국 군대를 자국에 끌어들인 레트니보다는 안전한 선택이 아니겠는가. 갸흐통의 군대를 끌어들인 이상 레트니의 권력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결코 오래갈 수 없었다.

케이가 비릿하게 웃자 다니엘은 조금 징그럽다는 듯이 몸을 뒤로 뺐다.

“왜 웃지?”

“네놈이 이런 충신이라 매우 기꺼워서 웃는다, 다니엘 빌리스.”

“……경. 경이다, 케이 하커. 네놈은 아직 아무것도 얻지 못했어. 넌 로버트가 죽어서 얻었던 경 칭호도, 엘리자베스의 복권도 아직 제대로 얻은 게 없어.”

다니엘 빌리스는 차가운 얼굴로 비꼬았다. 이제까지 보았던 다니엘 빌리스의 다정하고 부드러운 미소는 전부 가면이었고 이쪽이 진짜인 것 같았다. 케이는 이 얼굴이 더 맘에 들었다. 다니엘이 적군이든 아군이든.

케이가 말했다.

“……그래서?”

“그러니 감히 엘리자베스 양을 인질로 험한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케이 하커. 네놈은 아직 그 어떤 것도 보장받지 못했고 나는 폐하께 그 어떤 것도 확신하지 마시라 직언할 것이다. 민주주의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은 나도 폐하도 알고 있어. 하지만 네놈 같은 간사한 사업가들의 손에 이 나라가 놀아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 폐하는 겨우 100만의 힘이 아까워 그걸 좌시하실 분이 아니다. 그럴 분이셨다면—”

“네놈이 개처럼 기지도 않았겠지, 다니엘 빌리스…… 경.”

케이의 말에 다니엘이 헛웃음을 지었다. 케이는 다니엘을 노려보며 말했다.

“하지만 겨우 100만이라니. 개가 주인 행세를 하다간 목이 날아가는 법이야, 경. 그 100만은 그저 노동자가 아니고 그저 힘없는 개들도 아니며…….”

케이는 다니엘의 크라바트를 손에 쥐었다. 케이는 손 안에서 부들부들하게 느껴지는 크라바트의 감촉에 익숙한 환멸이 이는 것을 느꼈다.

고귀하고 부드러운 것, 아름다운 것. 로버트는 겨우 크라바트를 하는 것, 경 칭호를 받는 것, 그런 것들이 제 인생을 고귀하고 부드럽고 아름답게 만들어준다고 여겼다.

하지만 열아홉 살의 케이는 고귀하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것을 단 두 단어로 표현할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이 두 단어의 연결이 케이에겐 그런 뜻이었다. 고귀하고 아름답고 부드럽다. 케이는 그것이 탐나면 탐날수록 두려움을 느꼈고 외로워졌다.

그녀를 갖는 것은 부당한 욕심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갖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그녀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녀를 이 부드러운 크라바트처럼 손에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녀를 가짐으로써 그녀처럼 고귀해질 수도 없다. 그러나—

이젠 굳이 고귀해질 생각 같은 건 없어졌다.

그녀를 가질 수 없기에 가지고 싶은 욕심에 몸부림칠 이유도 없었고 그녀를 얻을 수 없기에 결핍에 고통스러워 할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고귀함이나 아름다움, 부드러움 따위는 남에게서 빼앗아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그저……. 때로 엘리자베스가 곁을 내어주면 남은 4개월 동안만 곁에서 그녀의 발밑을 기고 손길을 즐기고 새하얀 햇볕 아래에서……. 새하얗게 빛나는 너를 보다가 죽어가면 그만이다.

“……그들이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을 말이야. 100만. 그게 그저 숫자로 보인다면 네놈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 경. 그건 숫자가 아니야. 그건 상징 같은 것이다. 레본의 노동자들이 규합하고 있다는 상징. 100만은 금방 200만이 되고, 200만은 금방 1000만이 되어 네놈의 턱 끝까지 몰아칠 것이다. 네 말이 맞아. 나에겐 충성심이란 개뿔도 없지. 하지만 100만의 국민에게 충성심이 있겠나? 그들에게도 없어. 있는 척해온 것뿐이야. 이 좁아터진 궁 안에서 레본 전체를 손바닥에 쥐고 있다고 믿으며 힘으로 백성들을 짓눌러온 네놈들이 총과 칼로 그들을 협박했기에 연기를 해온 것뿐이야. 기백 년 동안 그들은 전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네놈들이 얼마나 별 것이 아닌지. 그러니 네가 정말로 충신이고 개새끼라면 조지 국왕 폐하에게 이렇게 아뢰라. 이 나라의 주인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그저 가만히 계시라고. 그들의 힘을 빌려 나라를 통합시키고 종래에는 이 나라를 그들에게 돌려주시라고. 그게 당신이…… 당신이 이름뿐이나마 왕으로 남는 법이시라고.”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다니엘 빌리스의 크라바트를 손에서 놓았다. 다니엘이 비틀거리며 제 목덜미를 긁었다. 다니엘의 목덜미는 새빨개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얼굴에 조금의 비굴함도 갖추지 않았다.

케이는 다니엘을 보며 그가 정말이지 자신과 똑같은 개새끼라는 것을 알았다. 다니엘은 조지 국왕이 아닌 그 누구의 앞에서도 굴종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케이 하커가 엘리자베스가 아닌 누구의 앞에서도 그러지 않는 것처럼.

케이는 크라바트를 정리하는 다니엘에게서 등을 돌리고 회랑을 마저 걸어갔다. 다니엘이 그의 등 뒤에서 말했다.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는 게 좋을 것이다! 케이 하커. 네 이빨을 내가 아닌 폐하의 앞에서 드러내는 날, 네가 제철공장도, 100만의 노동자도 아닌 이 나라 전체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네놈의 목을 내가 벨 테니까. 네가 레트니에게 그랬듯이 내가 네 심장에 칼을 박아 넣을 테니까!”

다니엘의 협박을 케이는 비웃었다. 비실비실 웃음이 튀어나왔다. 목숨을 소중하게 여겨? 케이에게 그럴 이유가 더 이상 무엇이 있단 말인가. 여차하면 이 컬로든 궁을, 아니 이 나라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도망칠 힘이 지금의 케이에게는 있었다.

케이는 괴물이었으니까.

케이는 햇볕 아래에서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는 제 손을 꽉 쥐었다가 폈다. 제 몸 가득 뛰고 있는 피를 느꼈다. 활기 있게 돌아다니는 피를.

케이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으로 별궁의 조경을 바라보았다. 100만의 노동자를 버리고, 조국을 버리고 괴물이 된 자신과 함께 도망가자고 하면 엘리자베스는 또 얼마나 경멸이 어린 눈으로 그를 볼까.

케이는 이제 기대가 되었다.

* * *

별궁에 도착한 케이가 하녀들이 안절부절못하며 지키고 선 방문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엘우드 밀이 케이에게로 걸어오더니 하녀들에게 당장 꺼지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케이는 엘우드 밀에게 미간을 찌푸리며 경고했다.

“컬로든 궁에서는 성질 머리를 죽여. 나는 네놈 목숨까지 챙겨줄 생각이 없다, 엘 선생.”

“내 목숨을 너한테 책임지라고……? 흥. 나도 그럴 생각이 없어, 이 미친 새끼야.”

엘우드 밀이 이를 아드득 갈았다. 엘우드 밀은 문고리를 잡은 케이의 손을 쳐내며 케이를 노려보았다.

“난 네 말을 들은 걸 후회한다. 후회해. 네 미친 소리에 설득당하는 게 아니었어. 엘리자베스를 잠재워서 치료하다니.”

“치료에 성공했는지나 말해.”

“성공했냐고……? 보면 알게 될 거야.”

“뭘 보면…….”

엘우드 밀이 직접 문고리를 돌렸다. 문이 열리는 순간 달큰한 향이 케이의 코를 괴롭혀왔다. 케이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케이는 그 지독한 향의 중앙에 서서 케이를 노려보며 칼을 들고 있는 엘리자베스와 눈이 마주쳤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피를 보며 제 손등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케이가 엘우드 밀을 노려보았다. 엘우드 밀이 말했다.

“엘리즈는 이제 전과 같은 상처 재생이 안 돼. 네놈 새끼가 저지른 짓이니까 네놈이 책임져라, 이 미친놈아.”

엘우드 밀은 그렇게 말하곤 이를 악물고 별궁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그제야 엘우드 밀의 말을 알아들었다.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웃었다. 그러니까 저게 치료의 증거라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케이가 성큼성큼 엘리자베스에게로 걸어갔다. 엘리자베스가 소리쳤다.

“가까이 오지 마!”

엘리자베스는 제 목에 가져다댄 칼에 힘을 주었다. 피가 더 흘러내렸다. 하지만 케이는 걸음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이 미친 새끼야. 너 내가 가까이 오지 말라고…….”

엘리자베스는 칼을 쥔 손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한 순간이었다.

케이가 엘리자베스의 손에 쥔 칼날을 그대로 제 손에 쥐어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칼을 카펫 위에 버린 것은.

그는 다른 손으로 엘리자베스의 허리를 휘감아 그녀의 몸을 제 가슴 안으로 들이고 종래에는 두 팔로 꽉 안아 제 품 안에 가뒀다.

케이는 진하게 느껴지는 허기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케이에게는 이제 엘리자베스를 안는 것만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녀의 금발에 코를 묻고 따뜻한 포옹에서 전해져오는 온기에 몸을 맡기는 것.

그래.

어린 날 그 인형을 가져다버린 건 잘한 짓이야.

그 인형을 갖겠다고 저택으로 가져가 켄드릭에게 들켜서 인형이 갈가리 찢기거나 불태워지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그 인형을 한 번 꼭 안았던 게.

그렇게라도 한 번 안아볼 수 있었던 게.

그게 잘한 일이야.

케이는 흐느끼는 엘리자베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를 더 꽉 안았다.

“같이 살자고 했잖아. 같이…… 같이라고 했잖아…….”

케이는 그녀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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