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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21화 (221/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21화

* * *

꿈을 꾸지 않았다.

오랜만의 단잠이었다. 몸은 개운하고 정신은 맑았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침울한 기분으로 캐노피가 달린 침대의 밖으로 다리를 내렸다. 익숙하지 않은 침실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지만 그녀는 금박을 입힌 가구나 은촛대 따위에 관심을 가지는 대신에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내려온 그녀는 촛대 아래에 있는 종이들, 소파 위에 놓인 가운을 미친 사람처럼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 어디…… 여기 어디에 그런 게 있을 텐데.

찰랑. 금속성의 소리가 들리고 엘리자베스가 찾던 것이 바닥에 떨어졌다. 엘리자베스는 그것을 주워 창문께로 걸어갔다.

커튼을 열고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깜빡거렸다. 창문 밖으로는 컬로든 궁의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그때 등 뒤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어떻게 남자 혼자서 처녀의 방에…….”

“처녀, 처녀! 진짜 그 처녀 소리 좀 안 할 수 없나?!”

두 남녀의 싸우는 소리와 함께 은쟁반 위에서 식기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자베스는 뒤를 돌지 않았다.

“……어머, 아가씨! 아가씨가 깨어나셨어요!”

궁에서 일하는 하녀로 추정되는 여자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엘우드 밀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일어났네……?”

엘리자베스는 뒤로 돌지 않았다. 창 너머의 광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맑고 푸른 하늘.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햇살. 잘 가꿔진 아름다운 초록빛 정원.

이제…… 이제부터 내가 너 없이 살아야 하는 나의 세상.

엘리자베스는 떨리는 손으로 창틀을 짚었다. 엘우드 밀이 하녀에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문을 닫았다. 둘만 남은 방 안에서 엘우드 밀이 쭈뼛거리며 엘리자베스에게 다가갔다.

“이, 이봐…… 무, 무슨 말이라도 해봐. 괜찮아? 너 20시간이나 잠들었었어. 치료를 마치고 네가 잘못되는 줄 알고 나는 정말이지…….”

엘우드 밀이 한참을 중얼거리는 동안 엘리자베스는 침묵을 지켰다.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의 말없는 등을 바라보며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침묵이 길어지자 엘우드 밀의 감정은 걱정을 지나 어느새 분노로 이어졌다.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가 서 있는 창가로 걸어가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쥐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이 자식아! 살아서 좋다든지! 날 속이다니 가만 두지 않겠다든지! 아니면…….”

엘우드 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돌아선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본 엘우드는 스르르 손을 내렸다.

엘리자베스는 울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엘우드 밀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영혼을 강탈당한 사람처럼 넋을 빼놓은 채, 손에는 페이퍼 나이프를 들고.

“너…… 너!”

놀란 엘우드가 다시 손을 뻗으려 했으나 엘리자베스가 제 목에 나이프를 가져다댔다. 그 순간 엘리자베스의 눈동자에 생기가 살아났다. 그녀의 목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경동맥을 끊으면 한순간이에요. 이제 나는 상처가 쉬이 낫지도 않는 몸이에요.”

“미쳤냐, 너?”

“아마도요.”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고 엘우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케이 하커는…… 그 새끼는 어디에 있어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엘우드 밀이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사우스리오든에 갔을 거다. 조지 왕자와 알현해야 하니까. 아직 거래를 끝마치지 못했어.”

“무슨 거래요?”

엘우드 밀이 다시 엘리자베스의 어깨에 손을 얹어보려고 했지만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목을 겨눈 칼을 조금도 치우지 않았다.

엘우드 밀은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나 소파에 앉아 제 머리를 헝클이며 말했다.

“무슨 거래긴! 귀족들이 분열됐어! 절반은 남부로 튀어서 레트니 편을 들기로 했고 절반은 수도에 남아서 조지 왕자 편에 붙었어. 하지만 조지 왕자 편인 놈들도 케이 하커를 당장 처형시키고 레트니와 화친을 하고 평화롭게 왕위를 이양 받아야 한다는 헛소리를 하고 있다고. 개놈들. 조지 왕자 편인 척하면서 뒤로는 남부랑 내통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는 놈들이야. 아, 이제 조지 왕자가 아니라 조지 국왕이군. 조지 왕자가 어제 교회에서 국왕 칭호를 긴급 승인받았다. 조지를 왕자라고 부르면 너도 이단으로 몰릴 수 있으니 조심해라.”

엘우드 밀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의 동요를 눈치챈 듯이 손을 내밀었다.

“네 목숨을 두고 협박하는 건 이 모든 일이 해결되고 나서도 늦지 않아. 그러니까 줘라. 그 칼. 엉?”

엘우드 밀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엘리자베스가 입을 열었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말씀이세요……?”

엘리자베스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일부러 전쟁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전쟁이라니.

그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미래였다.

엘우드 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투는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어. 지금은 레트니가 그냥 남부를 훑고 올라오면서 귀족들의 병사들을 규합하는 중이야. 조지 왕자는 사우스리오든에서 1시간쯤 떨어진 엘린크 성을 기점으로 남북을 나눴어. 그 위쪽으로 리오든에 합류할 귀족들을 모으고 있고. 아마 전투가 벌어진다면 그건 남 엘린크까지 레트니가 올라왔을 때가 아닐까 싶다.”

“그게 대충 언제쯤인데요……?”

“오늘 밤? 아니면 내일 새벽. 그 정도겠지?”

엘리자베스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나이프가 요동치다가 목의 상처를 벌렸다. 엘리자베스는 나이프에서 제 손가락을 향해 흐르는 뜨끈한 피를 느꼈다.

이 피는 이제 엘리자베스가 괴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피 냄새를 맡아도, 조금도 허기가 동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주는 해방감과 함께 엘리자베스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마지막 남은 치료제를 내가 썼어.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뜨거운 입술이 제 입술을 삼키던 순간을 떠올렸다. 엄청난 허기에 시달리던 순간.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살과 뼈를 씹고 케이의 피를 먹고 싶었다. 엘리자베스가 욕망에 시달리던 그날, 케이 역시 같은 욕망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외에도 복선은 이곳저곳에 널려 있었다. 케이의 상처가 갑자기 나았던 것.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 갑자기 사랑을 고백한 것. 그러면서도 엘우드 밀의 핑계를 댔던 것.

이 수많은 복선들을 피하고 또 피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엘리자베스는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은 진실에 눈을 감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사실은 너 말고 내가 살고 싶어서.

그랬던 걸까?

엘리자베스는 고통스러운 추측을 이어가며 눈물을 터트렸다.

케이 하커.

이 개자식.

이 개 같은 자식…….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에게 칼을 겨누며 말했다.

“알현이 끝나면 케이에게 이리로 오라고 해요. 당장.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독기가 오른 눈으로 엘우드 밀의 허리춤을 가리켰다.

“총 내놔요. 몰록을 죽일 수 있는 그 총.”

엘리자베스의 말에 엘우드 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봐. 너 말이야……. 좀 진정을…….”

“당장 내놔!”

엘리자베스가 칼로 제 손등을 그었다. 찐득한 피가 카펫 위로 투두둑 쏟아졌다. 엘우드 밀이 입술을 물었다. 엘우드 밀은 떨리는 손으로 허리띠에서 총을 꺼냈다. 엘리자베스가 차갑게 말했다.

“유독물질을 바른 탄환도 내려놔요.”

엘우드 밀은 붉은 피가 흐르는 엘리자베스의 손을 보며 탄환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엘우드 밀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엘리즈…….”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표정을 보며 가증스러움을 느꼈다. 이를 악문 엘리자베스가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가요. 당장.”

엘우드 밀은 한참을 망설였으나 엘리자베스의 재촉에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는 문을 나가자마자 쟁반을 들고 있는 하녀의 손에서 쟁반을 빼앗아들고 말했다.

“아무도, 아무도 엘리자베스의 방에 들어갈 수 없어. 절대 안정을 취해야 되니까! 그리고 하커 가문으로 쪽지를 보내야 하니까 급사 노릇을 할 만한 녀석을 불러와! 급하다고! 급해!”

엘우드 밀은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엘우드 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케이 하커가 별궁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2시간 후의 일이었다.

* * *

케이는 조지 왕자와의 악수를 마치고 알현실을 나왔다. 다니엘 빌리스가 케이를 따라 나왔다. 다니엘은 케이를 따라 회랑을 걸으며 말했다.

“솔직히 의외입니다.”

다니엘의 말에 케이는 잰 걸음으로 별궁으로 향하다가 말고 멈춰섰다. 케이는 다니엘을 노려보았다.

“뭐가 말이지?”

“저는 당신이 당장 레본을 떠나 멜니아로 갈 줄 알았습니다. 로버트 하커 경이 죽기 전부터 내내 멜니아 서부 공장과 거래해서 꽤나 많은 돈을 벌어들였던데요. 사업가에게 조국이란 돈을 많이 벌게 해주는 곳이 아닙니까?”

다니엘의 말에 케이가 이를 아드득 갈았다. 케이는 지금 무척이나 초조했고 별궁으로 가는 걸음을 방해하는 다니엘이 맘에 들지 않았다. 케이는 지금 눈앞에서 능글맞게 웃는 저 하얀 피부의 사내를 벽으로 몰아치고 주먹을 먹이고 싶은 지경이었지만 꾹 참고 말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그리고 돈의 문제가 아니야. 레본은 내 고향이고…….”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이 유일하게 안전할 수 있는 곳이지요? 안 그래요?”

다니엘이 빙그레 웃었다. 케이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케이는 가까스로 유지하던 평정심이 깨지는 것을 느끼며 다니엘에게로 걸어갔다. 케이는 다니엘을 위에서 아래로 짓누르듯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이름. 감히 입에 올리지 말게. 그것도 나를 협박하기 위한 수단으로는 말이야.”

“이 엄청난 크기의 국가가 두 쪽으로 분열되었을 때 외국으로 나간 왕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거의 없다고 봐야죠. 포로가 되지 않는 한. 그래서 레본을 선택한 거야, 당신은. 그리고 우리 폐하를 선택한 것도 충성심 따위가 아니라 이 전쟁에서 승리할 쪽일 것 같아서, 엘리자베스 양을 지킬 수 있는 쪽일 것 같아서 선택한 거지. 그래놓고도 뻔뻔스럽게 고향? 충성? 굴종을 입에 담아?”

다니엘 빌리스의 초록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다니엘은 케이를 올려다보며 위험하게 웃었다.

“그래. 네 충성심은 내가 알아봤지. 네가 레트니를 찌른 순간부터 시작해, 나와의 조사에 임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알아봤어. 원래 개새끼는 개새끼를 알아보는 법이니까. 너는 개새끼야, 케이 하커. 한 사람한테만 충성하는 개새끼. 그리고 네 충성의 대상은 폐하가 아니라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양이지. 그녀가 이곳에서 더 이상 안전할 수 없다면? 너는 100만의 노동자들도 다 버리고 이 리오든을 가차 없이 떠날 거야. 안 그런가?”

다니엘 빌리스의 입술이 뒤틀렸다. 케이는 다니엘을 보며 삐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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