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20화
4장
[엘리자베스에게.]
케이는 그렇게 시작되는 긴 편지를 가슴 안에 품고 로킨트의 하커 저택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다니엘 빌리스는 크리스털 궁전에서의 난리가 있은 지 꼬박 20시간 만에 케이를 찾았다.
[엘리자베스가 깨어났다. 답은 안 해도 돼. 그래도 가능한 빨리 돌아와라.
-엘우드 밀]
엘우드 밀의 연통이 도착한 것도 비슷한 때였다. 케이는 엘우드 밀의 쪽지를 보자마자 서류 정리를 마치고 하커 저택에서 나와 도개교를 건넜다.
수도는 고요했다.
이 고요는 결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크리스털 궁전의 사건이 벌어진 직후 리오든의 모든 거리에 보비와 군인들이 십여 미터 간격으로 깔렸다.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행인은 누구나 검문검색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보비와 군인은 같은 수준의 무기를 소지했다. 그들은 민간인 중 무기를 소지한 이에게는 3번의 경고조치 후 발포할 수 있었다.
케이는 마차를 모는 토비에게 군인과 보비의 명에 순순히 따라주라고 분명하게 얘기했다.
“절대 경거망동하지 마라.”
토비와 케이만을 태운 마차는 도개교를 건너는 동안 열 번도 넘게 멈춰섰다. 마차 좌석 안까지 뒤집어엎는 검문은 다섯 번쯤 당했다. 토비는 불만에 가득 찬 얼굴을 했지만 케이의 말대로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그러나 다섯 번째 검문 때는 약간의 위기가 있었다. 경사 한 놈이 좌석 아래 짐칸을 다 뒤지다 못해 케이에게 몽둥이를 들이밀며 몸수색을 강행한 것이다.
토비가 당장이라도 달려들려는 것을 막은 케이는 순순히 마차에 손을 대고 섰다. 경사는 케이의 몸을 뒤지다가 너덜너덜한 편지 한 통과 서류 봉투 두 개를 발견했다. 편지를 열어본 경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케이에게 그것을 내던지며 말했다.
“이거 뭔가 남부 귀족 놈들이랑 내통하는 편지 아니야? 읽어봐.”
케이는 땅에 떨어진 편지를 집어들었다.
[엘리자베스에게.
네가 쓴 편지, 읽었어. 네가 왜 그런 편지를 보냈는지 모르지만 내가 널 보지 않는다는 말은…….]
“……변호사…… 사무실…….”
자신이 쓴 편지를 눈으로 읽던 케이는 이젠 서류 봉투를 들고 거기에 쓰인 글씨를 떠듬떠듬 읽는 보비를 노려보았다.
“그걸 뜯어보면 국가기밀을 열어보았다는 이유로 즉결 처분을 각오해야 할 거요.”
케이가 경사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그 말에 경사는 케이를 보며 피식 웃었다.
“국가 기밀? 네놈의 집문서가 무슨 국가 기밀…….”
“그럼 열어보든지.”
케이는 경사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때 옆에 있던 보비가 경사의 어깨를 툭 치며 조용히 속삭였다.
“이 마차. 하커 가문의 인장이야. 케이 하커라고. 괜찮겠어?”
케이는 망설이는 표정이 된 경사를 바라보며 편지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그러고는 편지를 품 안에 집어넣고 마차에 기대어 오만하게 웃었다.
“……난 지금 컬로든 궁으로 가는 중이다. 내 귀환이 늦어지면 당신들 이름을 대도록 하지. 알랭가를 지키는 보비들이라고 하면 모르시지 않을 것 같은데.”
케이의 말에 보비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경사는 케이의 말에 얼른 들고 있던 문서를 내밀고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커, 컬로든 궁으로 가, 가십니까? 케이 하커 씨?”
뒤에서 헛웃음을 짓는 소리가 들렸다. 케이의 뒤에서 마차를 세운 채 검문을 기다리던 귀족 남자가 보비의 비굴한 자세를 보며 중얼거렸다.
“더러운 평민 새끼.”
케이는 그쪽을 힐끔 바라본 후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래. 컬로든 궁으로 간다.”
보비들은 순순히 길을 터주었다. 마부석에 오른 토비는 마차를 출발시켜 보비가 멀어지자 차창 문을 열고 말했다.
“그 서류가 뭐예요, 도련님?”
케이는 토비의 질문에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대답했다.
“우리 목숨줄.”
케이는 몸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편지를 매만졌다.
그건 스물한 살의 케이 하커가 쓴 편지였다.
케이는 조금 전 하커 저택에서 변호사와 함께 제철공장 서류를 정리한 후 방에 올라가 이것을 들고 왔다. 유언장을 챙기는 기분으로.
앞으로 4개월.
케이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생각보다 길고, 또 생각보다 짧은 시간일 거라던 엘우드 밀의 말을 떠올렸다.
맞는 말이었다. 4개월은 이 지난한 일상을 버텨가기엔 길고, 엘리자베스에 대한 마음을 털어내기엔 지독히도 짧은 시간이었다. 그 마음을 털어낼 생각도 케이에겐 없었지만.
컬로든 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케이의 마음은 초조해졌다. 조지 왕자와의 거래 때문이 아니었다. 다시 만나면 케이에게 욕설을 퍼붓고 뺨을 때리고 정강이를 걷어찰 엘리자베스의 분노에 찬 얼굴에 대한 불안감 때문도 아니었다.
‘보고 싶어.’
수면제를 먹고 기절한 엘리자베스를 20시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다. 케이의 마음에는 오롯이 엘리자베스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겨우 4개월이 남은 삶. 엘리자베스를 만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하루하루였다.
케이는 알현실에 앉아 초조하게 조지 왕자를 기다리면서도 자꾸만 별궁 쪽을 바라보았다.
“조지 왕자님 드십니다.”
궁전지기의 목소리와 함께 알현실 입구 문을 박차고 조지 왕자와 다니엘 빌리스가 나타났다. 다니엘은 차가운 눈으로 케이를 내려다보았다. 조지 왕자는 가식적인 미소는 가져다버리고 케이의 앞에 앉았다. 그는 앉자마자 말했다.
“본론만 말하지. 제철공장을 가지고 있다고?”
케이는 조지 왕자가 참모진과 함께 밤새 레트니와의 전투에 대한 계산을 했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마음이 급해진 조지 왕자가 케이와의 거래 테이블에 재빨리 앉을 거라는 생각도 했었는데 그것은 오판이었던 것이다. 조지 왕자는 믿을 만한 충신들과의 논의가 끝나기 전에는 그 누구와도 거래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케이는 조지 왕자가 철저한 사업가이자 정치인이라는 것이 나름대로 믿을 만하게 느껴졌다. 지금 케이는 조지 왕자에게 제 목숨은 물론이요, 리오든의 도시 노동자 대부분의 목숨이 걸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레트니는 리오든을 수복하기가 무섭게 리오든을 왕정이 강력하던 100년 전쯤으로 돌려놓으려고 들 것이다. 이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최악으로 치달을 테다.
‘너 때문에 내 세상은 매일매일 더 나아져.’
케이는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예. 전하. 이게 소유권 문서입니다.”
조지 왕자는 케이가 내미는 서류 봉투를 받아들고는 면밀히 살폈다. 그리곤 곧 그것을 다니엘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철은?”
“제가 알기로 그 제철공장은 4개월 전까지만 해도 막대한 양의 무기를 생산해내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니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4개월 동안 공장이 돌아가지 않았는데도? 그럼 노동자들은 어디에서 오나?”
조지 왕자의 말에는 막힘이 없었다. 그는 조금도 돌려 말하지 않았다. 케이는 차라리 그것이 편하게 느껴졌다.
“철을 제련하는 시설은 몇 개월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재가동에 큰 무리가 있지 않습니다. 노동자들은 로킨트 공장에서 퀴닌을 생산하던 자들을 불러오고 사우스리오든에서……..”
케이는 메마른 입안을 느끼며 이를 아드득 갈았다. 조지 왕자는 그런 케이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옆에 서 있던 다니엘이 말했다.
“국왕 폐하의 앞입니다. 케이 하커 씨. 예의를 갖추세요.”
국왕 폐하.
지금으로부터 16시간 전, 조지 왕자는 계엄령의 선포를 위해 교회를 협박해 재빨리 자신의 왕위 계승 작업을 서둘렀다. 교회는 조지 왕자의 편을 들었다. 그 배경에는 단순히 조지 왕자의 군대만이 있지 않았다. 리오든의 부는 레본 전체의 부를 압도했다. 리오든의 부를 쥐고 있는 것은 리오든의 평민 자본가들이었다. 교회는 이미 평민 자본가들의 사업에 깊숙이 발을 담그고 있었고 자본가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니엘의 말에 조지가 손을 들어 다니엘을 저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괜찮다.”
조지는 초조하게 제 턱을 문지르며 케이를 보았다.
“우리 사이에 비밀이 없어야 한다. 아니, 우리 사이에 비밀은 없어. 정확히 말하면. 나는 내 아버지와는 다르다. 나는 얄팍한 욕심에 눈이 멀어 진실을 보지 못하는 자가 아니야. 케이 하커, 내가 너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해주랴? 아니면 미리 말을 하겠느냐?”
조지의 말에 케이는 망설이는 척을 했다. 조지가 참정권 운동가들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을 케이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이런 연기가 없이 모든 것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조금 위험했다. 케이는 오래 입을 다물고 있다가 조지가 한 번 더 닦달을 하자 입을 열었다.
“사우스리오든의 노동자 협회가 있습니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
‘그래, 알고 있었겠지. 하지만—’
케이는 조지 왕자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협회에 가입을 신청한 자가 100만입니다.”
케이의 말에 조지 왕자의 눈이 커졌다. 다니엘 빌리스도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100만?”
조지 왕자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리오든의 인구가 400만이었다. 왕실을 포함한 귀족들의 인구는 그 1퍼센트 정도였다. 갓난아기, 노인들, 부랑자들, 변변한 직업이 없거나 중산층, 자본가들, 그 인구를 제외한다 하면 노동자 인구를 200만 정도로 잡는 것이 기본이었다.
100만이라면 그 중 절반.
앰버와 에드워드, 윌슨이 속한 노동자 협회의 가입자가 리오든 인구의 4분의 1인 것이다. 조지 왕자는 비릿하게 웃었다.
“……내가 옳은 길을 선택했군. 안 그런가?”
케이는 헛웃음을 짓는 조지 왕자를 뚜렷하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레트니 선왕이 잘못된 길을 선택한 것이지요. 폐하. 민주주의는 거스를 수 없는 역사입니다.”
케이의 말에 조지 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지 왕자가 중얼거렸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케이 하커. 네 말이 맞아…….”
케이는 의자에서 내려왔다. 케이는 조지 왕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각 제철공장을 열고 거기에 노동자 협회원들을 불러들이십시오. 제가 그것을 돕겠습니다. 내부에서는 군수 물자를 생산하고 외부로는 남부로 가는 모든 기차를 끊어버리시면 어차피 싸움은 할 필요도 없이 레트니는 고립될 겁니다. 바닷길이 열려 있어도 고립되는 겁니다. 대신 협회원들에게 의회주의를 되살릴 것과 폐하 소유의 제철공장들의 주식을 줄 것을 약속하시면 됩니다.”
“주식……?”
조지는 제 앞에 무릎 꿇은 케이의 손에 들린 서류 봉투를 탐나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방금 케이가 ‘폐하 소유의 제철공장’이라고 말한 것에 흔들리는 눈빛이었다.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신시무역주식회사처럼 노동자들이 제철공장의 소유권을 나눠 갖는 겁니다. 자신들이 일하는 공장의 소유권을요. 그만큼 민주주의적인 생각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은 폐하의 앞에 복종하고 엎드릴 것입니다.”
그대가 그들이 원하는 지도자인 한은.
케이는 뒷말을 삼켰다.
조지 왕자가 흐뭇하게 웃으며 발을 내밀었다. 케이는 발등에 입을 맞춰야 하는 줄 알고 얼굴을 숙였다. 하지만 조지 왕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케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지 왕자가 말했다.
“악수. 멜니아에서는 거래가 끝나면 이렇게 손을 흔든다지. 서로에게 무기가 없다는 것을 보인다는 의미로.”
조지 왕자의 말에 케이는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을 잡았다.
케이는 이 남자가 정말로 레본의 미래가 될 것인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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