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19화
엘우드 밀이 케이의 대답에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할. 진짜…….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여서…….”
엘우드 밀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케이와 케빈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이 치료제. 구조상으로 봤을 때, 주사하는 게 아니라 조사하는 거야.”
“조사가 뭐예요……?”
케빈이 물었다. 하지만 케빈의 질문은 바닥에 쓰러진 엘리자베스를 업은 케이의 말에 막혔다.
“닥치고, 지금 제일 안전한 곳으로 가. 거기서 치료를 하라고.”
“안전한 곳?”
엘우드 밀이 미간을 찌푸렸다. 케이가 크리스털 궁전 동쪽을 가리켰다. 숲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곳은 컬로든이 있는 곳이었다.
“나랑 엘우드 밀은 앰버랑 합류해서 컬로든으로 간다. 넌 레트니 애비뉴로 가서 프란시스를 챙겨. 상황을 알리고 괜히 엄한 사람한테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해. 당분간 남부에서 전쟁이 일어날 거고, 이 소식이 알려지면 헛짓거리를 하려는 귀족들이 있을 거야.”
“전쟁이요……?”
케빈은 케이의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전쟁이라니. 케빈이 중얼거렸다.
“……나, 남부에 우리 가족들이 있는데…….”
“케빈! 케빈 퍼킨!”
케이는 얼이 빠진 케빈을 보다가 케빈에게 소리쳤다.
“정신 차려! 네 가족들이 어디에 있지? 이름이랑 가까운 통신국 이름을 대. 컬로든으로 가면 바로 연락할 수 있으니까. 네가 통신국으로 뛰어가 줄을 서 기다렸다가 연락하는 것 보다 빨라.”
케이의 말에 케빈이 허둥지둥 제 아버지의 이름과 고향 마을의 이름을 댔다. 케이는 케빈의 어깨를 툭툭 치고 케빈에게 말했다.
“알겠다. 걱정하지 말고 짐마차를 끌고 레트니 애비뉴로 가. 연락은 컬로든으로 하면 돼. 알겠냐?”
“아, 알겠어요…….”
케빈이 바들바들 떨면서 대답했다. 그러곤 케이에게 업혀 축 늘어진 엘리자베스를 보며 말했다.
“엘리즈를…… 엘리즈를 잘 부탁해요.”
케이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엘우드 밀과 함께 왔던 길을 되짚어 갔다. 크리스털 궁전 안으로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이는 앰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앰버는 분노한 얼굴로 케이의 뺨을 때렸다. 그러곤 씩씩거리며 케이에게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왜 이래?”
“너무 놀라서 기절했대. 여기 엘리자베스의 의사가 되어줄 사람이 있으니 같이 가. 마차에 자리가 있겠지?”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엘우드 밀을 가리켰다. 앰버는 엘우드 밀과 케이를 번갈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의 마차는 이미 출발했을 거야. 모건이 다른 마차를 하나 준비해주겠다고 했으니까 우린 그걸 타고 가면 돼. 당장 컬로든으로 가야 한다고, 이 멍청아. 너한테는 조지 왕자가 필요해. 당장 조지 왕자한테 충성심을 보여야 돼.”
케이는 앰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주변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저마다 두려움이 떠올라 있었다. 군대가 리오든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말에 리오든에 사는 이들은 제 집이 전쟁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벌벌 떨었다. 케이는 그 두려움에 떠는 이들을 바라보며 이곳만큼이나 난장판이었던 의회청사를 떠올렸다.
자본가와 귀족들. 그들 앞에서 음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솔튼 빌리스.
솔튼 빌리스가 그런 일을 벌인 것은 국왕과 귀족들이 실패한 증기기관 사업에서 남은 폭탄을 어떻게든 군수물자로 사용하려던 계획이 중단되었기 때문이었다. 국왕과 귀족들은 폭탄을 여기저기로 빼돌렸지만 그마저도 신시무역회사의 무역업이 활성화되면서는 하나둘 중단되었다. 그 탓에 솔튼 빌리스는 공범들이 다 발을 뺀 암흑의 사업을 혼자 떠안는 꼴이 되었다.
어쨌든, 그렇게 폭탄과 함께 증기기관에 들어간 철을 녹여 무기를 만들던 공장이 리오든과 리오든 근교 곳곳에 있었다. 조지 왕자는 이제 그 대부분의 공장에 연락을 취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레트니의 편이니 쉽게 거래에 응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조지 왕자한테는 내가 필요해.”
케이는 앰버를 내려다보았다. 앰버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클레몬트 공작 부부의 제철공장.”
공작 부부의 공장 역시 군수품을 제조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트니에게 밉보인 공작 부부 소유의 제철공장에서 무기까지 흘러나오면 공작가는 돌이킬 수 없는 멸문의 길로 들어서고 엘리자베스 클레몬트 역시 참수에 처해질 것이었다. 케이는 그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사들였던 공장의 위치를 떠올리며 말했다.
“모건에게 내가 제철공장을 가지고 있다고 왕자에게 전하라고 해. 왕자는 나를 필요로 할 거야. 반드시.”
앰버는 케이의 말을 듣고 눈을 빛냈다. 앰버와 케이, 그리고 엘우드 밀은 무대 뒤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크리스털 궁전을 감싸고 있는 유리 너머로 따스한 여름 햇살이 들이 비치고 있었다. 세 사람이 뛰는 대리석으로 된 바닥이 반짝거렸다.
케이는 자신의 목덜미에 대고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케이…… 케이 하커…… 이…… 이 개자식.”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숨소리를 들으며 엘우드 밀에게 물었다.
“엘리자베스가 알았나 보지? 전부. 내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까지.”
엘우드 밀이 어깨를 움츠렸다. 엘우드 밀이 한숨짓는 것을 보며 케이가 말했다.
“케빈의 표정을 보고 알았어.”
“그래. 전부 알았어. 내가 볼 때 엘리즈는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희생이니 뭐니 그 따위로 말해봤자 이런 식으로 속여 넘긴 걸 엘리즈가 용서할 리가 없어. 어떻게 생각해?”
케이는 엘우드 밀의 목소리에 피식 웃었다.
“어떻게 생각하냐고?”
“……이봐.”
“잘 되었다고 생각해. 이보다 더 잘 될 순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모두, 모두 너무 잘 되지 않았나.
나는 너를 또 속여 넘겼고, 너는 나를 미워하겠지. 나를 용서하지 않겠지.
그 예쁜 입으로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다시는 지껄이지 못하겠지. 나는 외롭게 죽겠지.
나에게 딱 어울리는 방식으로 외롭게.
케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비릿하게 웃었다.
엘우드 밀은 그런 케이의 얼굴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당신 말이야. 알고 있겠지?”
“뭘?”
“엘리즈가 사랑하는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라는 거.”
케이는 엘우드 밀의 말에 멈춰 섰다.
세 사람은 어느새 무대 뒤로 와 있었다. 그곳엔 보비와 군인들이 모여 있었다. 앰버는 그들 중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케이는 엘우드 밀을 노려보며 말했다.
“몰라. 모르고 있어. 엘리자베스에겐 내가 모른다고 말해. 내가 당신과 행복하길 바란다고. 그게 죽어가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라고.”
엘우드 밀은 케이의 말에 혀를 찼다.
“당신은 또라이야. 당신한테 이제 시간이 5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어?”
“알고 있어.”
“그 시간이 생각보다 길지도 않고 생각보다 짧지도 않을 거라는 것도?”
앰버가 케이에게 손짓했다. 케이는 엘우드 밀을 노려보다가 아까 주머니 속에 넣어둔 손수건을 한참이나 만지작거린 후에야 엘우드 밀에게 대답했다.
“엘리자베스가 허튼짓을 못하게 감시나 잘 해.”
“여차하면 또 이렇게 기절시켜서 말이지?”
엘우드 밀이 비꼬며 대답했다. 케이는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엘리자베스를 업고 마차로 걸어가 그녀를 먼저 태우고 함께 탔다.
그는 기절한 엘리자베스의 새하얀 얼굴을 손등으로 쓸었다. 그리고 코 밑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숨이 붙어 있는지 확인했다. 그걸 본 엘우드 밀은 가방에 넣어가지고 온 치료제를 꺼냈다. 초록색 빛이 주사기처럼 생긴 기계 안에서 찰랑거렸다.
“마지막 남은 치료제야.”
엘우드 밀은 케이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보듯 말했다. 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고 있어. 가지.”
케이의 말과 함께 앰버가 마차 문을 열었다. 앰버가 들어오자 엘우드 밀이 치료제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앰버가 다급하게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괜찮나요?”
엘우드 밀이 대답했다.
“그냥 기절한 것뿐이오. 따뜻하게 해주면 돼요.”
케이는 엘우드 밀의 대답을 들으며 엘리자베스를 제 품으로 강하게 끌어당겨 안았다. 그러고는 잠시 엘리자베스의 조그마한 입술을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더러운 손수건에 선명하게 박혀 있는 E라는 글자를 바라보았다.
덜컹거리며 마차가 출발했다.
케이는 이 글자를 수를 놓았던 밤을 떠올렸다. 그는 수틀에 손수건을 끼워놓고 한참을 노려보아야 했다. 그건 손수건에 수를 놓는 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방문을 열고 들어올까 봐 걱정이 되어서였다. 수를 놓다가도 바깥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면 수틀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그러다가 바늘에 손가락을 찔리기도 하고 수틀이 망가지기도 했다. 종래에 완성된 E라는 글자는 삐뚤빼뚤하고 모나기 그지없었다.
케이의 마음은 늘 그런 식이었다. 이 마음은 어디에 내놓기에 늘 부족하고 엉성하고 수치스러웠다.
감히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어디에다 말할 수 있을까. 그게 네 귀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너는 나를 비웃진 않겠지만 나를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 아름답고 신비로운 푸른 눈으로 이렇게 묻겠지.
‘뭐라고? 알아듣지 못했어. 다시 말해줄래?’
엘리자베스를 만난 후 열아홉의 케이는 매일 같이 그런 꿈을 꿨다. 그가 뭔가를 말하면 엘리자베스가 이렇게 되묻는 꿈. 케이의 촌스러운 말투, 천박한 목소리 때문에 도무지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듯, 그러나 케이의 말투와 목소리를 지적하기에는 자신의 품격이 아깝다는 듯, 엘리자베스는 다정하게 되물었다.
케이는 그러면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은 저 뒤로 숨기고 그저 입을 다물었다. 열아홉의 케이는 꿈에서 깨어나면 늘 그 꿈을 모욕으로, 수치로 기억했다. 아마도 저 여자가 자신을 창피하게 만든 기억이 너무 괴로워서 꿈에서 계속 떠오르는 모양이라고, 그리 여겼다.
하지만 스물셋의 케이는 알고 있었다. 그 수많은 밤, 열아홉의 케이가 뜨거운 열기 속에 잠에서 깨어나게 만든 그 꿈은 지난날 엘리자베스가 준 수치와 모욕을 곱씹기 위해 꾼 것이 아니었다. 케이에게 모욕과 수치를 준 것은 엘리자베스가 아니었으니까.
그것은 케이 자신이었다.
케이를 수치스럽게 만든 것은 케이의 마음이었다. 푸른 눈의 인형 같은 귀족 여자애한테 한눈에 반해버린 어리고 철없는 노동자 소년의 마음. 감히 가질 수도 없는 것을 탐낸 도둑놈의 마음. 케이는 기껏 훔쳐온 인형을 땅바닥에 버리고 갔던 어린 날을 떠올리며 엘리자베스를 제 쪽으로 끌어안았다.
케이는 처절하게 깨달았다.
죽는다는 것은 너를 잃는다는 것이다.
너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입을 맞출 수 없고 너의 푸른 눈동자를 보며 몸이 달아올라 어쩔 줄 몰라 할 일도 없으며 이 부끄러운 마음이나마 너에게 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케이는 마차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크리스털 궁전 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귀족들의 주머니를 털어 달아나는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의 마차 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칼을 뽑아들고 서 있는 귀족들.
레본은 분열하고 있었고,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잃어가고 있었다.
뜨거운 대낮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