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18화
“가짜 왕이 레본을 삼키려고 한다! 조지 왕자는 가짜 왕이다! 반역자다!”
앰버는 니콜슨 공작의 외침을 들으며 아수라장이 된 장내를 바라보았다. 앰버의 곁에 선 모건이 얼굴을 찌푸렸다.
“가짜 왕……? 조지 왕자는 분명 레트니가 요양을 갔다고 하지 않았나?”
앰버는 모건의 물음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앰버 역시 조지 왕자의 말을 믿고 있었다. 레트니는 요양 차 남부에 내려갔다고 조지 왕자는 분명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나. 그리고 레트니 국왕을 케이 하커가 찌른 일에 대해서도 모두 해결이 된 것처럼…….
“보비들이여! 케이 하커를 잡아들여라! 이 나라의 국왕은 누구인가!”
니콜슨 공작과 그를 위시한 귀족들이 보비들을 향해 명백한 정치적 발언을 내뱉고 있었다. 조지 왕자는 눈에 핏발을 세운 채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저들을 잡아들여라! 반역자야! 반역자! 저들이 바로 반역자다!”
조지 왕자의 목소리에 귀족들이 우르르 앞쪽으로 모여들었다. 저 귀족들 중에는 수도법상 금지된 사병을 암암리에 가지고 있는 자들도 있을 것이었다. 앰버는 모건에게 속삭였다.
“뒤쪽에 마차를 준비해놓으셨죠? 일단 조지 왕자와 함께 그쪽으로 가요. 몸 좀 쓰는 놈들도 데리고 왔겠죠? 그들을 나에게 붙여줘요. 내가 케이랑 같이…….”
앰버의 말에 모건이 미간을 찌푸렸다. 모건은 앰버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눈썹을 꿈틀했다.
앰버는 모건이 지금 상황을 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과연 조지 왕자의 편을 드는 것이 맞는 일인가. 어느 쪽이 제 대통령 선출에 도움이 될 것인가를 말이다.
이름뿐인 양아버지라곤 해도 약간의 인정, 내지는 의리 같은 것은 있는 자라고 여겼는데.
앰버는 이를 악물었다. 앰버의 붉은 입술이 비틀렸다. 앰버는 모건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착한 수양 딸 흉내는 가져다버렸다.
“어차피 당신은 레트니가 아니라 조지 왕자의 편을 들었어. 레트니가 리오든을 수복한다고 해도 당신이 레트니와 화해하는 건 쉽지 않아. 레트니는 조지 왕자처럼 유연한 사업가가 아니야. 레트니는 뻣뻣한 왕정주의자라고.”
앰버의 말에 모건은 혀를 찼다.
“조지 왕자가 군수권을 가지고 있다고 했나?”
“그래요. 그뿐 아니라 오늘 참정권 얘기를 했으니 수많은 평민 자본가들과 그들의 공장이 조지 왕자의 것이나 다름없죠. 리오든엔 공장이 있어요. 남부엔 뭐가 있죠? 드넓은 평야? 아직도 지들이 농노를 부리는 영주인 줄 아는 귀족들? 그들에게 충성하는 척 하며 영지민들 등이나 쳐먹는 변변한 총 하나 없이 창과 칼을 들고 다니는 기사들? 갸흐통 군대가 얼마나 들어왔는진 몰라도 레본 땅에서 레본의 군대와? 말도 안 돼요.”
앰버가 모건을 다그치듯 소리쳤다. 그러자 모건은 주변을 둘러보곤 휘파람을 불었다. 모건의 휘파람 소리에 경비선 바깥에서 구경꾼인 척하고 있던 커다란 덩치의 남자 다섯이 앰버 앞으로 모여들었다. 모건은 그들에게 앰버와 함께 가라고 말하곤 앰버에게 씨익 웃어보였다.
“좋아. 네 말을 믿지. 네 말이 거짓말이더라도 앰버 모건, 너는 내 딸이 아니냐.”
개소리.
앰버는 힘을 가진 남자들이 하는 허울 좋은 말에 휘둘리지 않았다. 하지만 휘둘리는 척은 해주는 게 늘 편한 쪽이라는 것을 알았다. 앰버는 싱긋 웃으며 모건의 뺨에 입을 맞췄다.
“감사해요, 아버지.”
앰버의 말에 모건은 고개를 끄덕이곤 분노한 조지 왕자에게로 걸어갔다. 모건의 설득에도 조지 왕자는 쉽사리 진정이 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앰버는 그쪽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앰버는 남자들과 함께 난폭해져가는 귀족들 사이를 뚫고 나갔다.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앰버는 남자들을 쪼갰다. 셋은 각각 2, 3, 4층을 찾도록 만들었다. 앰버는 나머지 둘과 함께 1층을 샅샅이 뒤졌다. 그 와중에 앰버의 손에도 전단지가 들어왔다.
[레본의 국민들이여 일어나라! 국왕 폐하가 돌아온다!]
국왕 폐하?
앰버는 전단지를 손 안에서 구겼다. 아주 오래된 분노가 앰버의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국왕 폐하라니. 한낱 인간에 불과한 국왕이 신처럼 추앙받는 세계라니. 이 기괴한 세계를 진심으로 믿지도 않으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해보겠다고 발악하는 귀족들이라니.
나에게도 폭탄이 있었다면 윌리엄 조쉬처럼 이 귀족들을 가루로 만들었을 것이다.
앰버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 그녀는 이 아수라장 속에서 석상처럼 고요하게 서 있는 케이 하커를 발견했다. 손 안에 쥔 손수건을 바라보면서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은 남자.
앰버는 케이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저 미친놈. 이 장내에 케이를 죽여버리겠다고 하는 귀족들이 수없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저기서 저렇게…….
앰버가 케이를 발견하고 바쁘게 가는 와중에 누군가가 외쳤다.
“케이 하커다! 여기 케이 하커야!”
앰버는 칼을 뽑고 달려드는 어린 귀족을 보았다. 케이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녀는 주변에 있는 남자들을 닦달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앰버가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케이가 고개를 들었다. 케이는 손수건을 쥐지 않은 손으로 품 안에서 리볼버를 꺼내더니 칼을 들고 달려드는 상대방을 조준했다. 케이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탕!
“으아아악!”
어린 귀족 놈의 손에서 칼이 날아갔다. 피투성이가 된 손가락을 바라보며 귀족이 소리를 질렀다. 주변 사람들이 전부 케이를 보았다. 1층에 있는 귀족들은 저마다 칼을 뽑았다. 케이는 핏발이 선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앰버는 그런 케이를 보며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케이는 지금 날뛰고 있었다. 조금도 두려울 게 없다는 듯, 덤비는 자가 있으면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자신도 죽겠다는 듯.
앰버는 수세에 몰린 산짐승을 만난 사냥꾼이 된 기분이었다. 케이의 눈에는 광기와 분노 외에 그 어떤 공포도 없었다. 공포는 케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케이의 눈에 서린 광기와 분노를 알아본 듯 칼을 뽑은 귀족들도 성급하게 달려들지 못했다. 앰버는 잠시 그 광경을 넋을 빼고 바라보고 있다가 남자들에게 말했다.
“케이를 보호해요! 당장!”
남자들이 당장 경호의 대형을 취했다. 앰버 역시 케이에게 달려갔다. 앰버는 총을 들고 사방을 경계하며 서 있는 케이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케이는 더 미친놈 같았다. 케이는 웬 더러운 손수건을 자신의 심장께에다 붙이고 그게 제 심장이라도 되는 양 주변에 총구를 겨눴다.
“이봐……! 케이……! 나야. 나라고.”
앰버는 그 총구에서 당장이라도 총알이 튀어나올까 봐 더 가까이 가지 못하고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소리쳤다. 앰버의 목소리에 케이의 총부리가 앰버에게 겨눠졌다. 앰버는 흠칫했지만 물러나진 않았다. 저 미친놈을 여기에 두고 갈 순 없었다. 어떤 이유로든 저 녀석을 살려야 했다. 그건 친구로서의 의리나 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망할 조국이 변하는 걸 내 눈으로 봐야겠어.’
오래 전 했던 맹세 때문이었다.
앰버는 날뛰는 산짐승을 대할 때처럼 조심스럽게 케이에게 걸어갔다. 앰버를 알아본 듯 케이는 천천히 총부리를 땅으로 내렸다. 앰버는 케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총을 빼앗아 들었다. 케이는 제 가슴에 댄 손수건을 더 꽉 쥐었다. 앰버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저게 뭐길래?
앰버가 말했다.
“당장 여길 떠나야 돼. 귀족들 사병이 움직일 거야. 일단 조지 왕자를 컬로든 궁 안에 데려다놔야 한다고.”
앰버의 말에 케이가 여전히 핏발이 선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
“넌? 너도 가야지.”
“엘리자베스를 찾아야지.”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총을 자신의 허리춤에 집어넣었다. 앰버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여기 이 남자들한테 맡겨. 그리고 엘리자베스보다 위험한 건 너야!”
“아니……. 지금 위험한 건 엘리자베스야. 엘리자베스를 반드시…… 반드시 찾아야 돼.”
케이는 이를 악물고 주변을 보았다. 케이의 손끝에 풀을 먹여 바스락거리는 손수건이 감겨왔다.
엘리자베스.
‘널 좋아하니까. 내 마음을 담아서 주는 거야.’
전 생에서나—
‘나 사랑해줘. 케이 하커. 날 사랑해줘. 날 보고 싶어해줘. 사랑이 뭔지 모른다면 내가 가르쳐줄게. 나한테도 가르쳐줘.’
‘나도 널 사랑할 테니까.’
‘사랑해. 케이 하커. 너 때문에 내 세상은 매일매일 더 나아져.’
이번 생에서나—
언제나 네가 말하는 네 마음은 나를 이렇게 두려움에 떨게 해. 나를 사랑한다는 그 말이 거짓말이더라도 너무나 믿고 싶게 해.
케이는 아수라장이 된 주변을 눈으로 살피며 생각했다.
이제는…… 이제는 내 생의 시간이 겨우 5개월 밖에 남지 않았는데. 생의 끝에서 또 결국 나는 너한테 속고 말겠지.
“안 돼. 같이 컬로든으로 가. 우선 조지 왕자와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케이! 어디 가! 가지 마! 이 미친놈아! 케이를 붙잡아요! 당장!”
케이는 달라붙는 남자들에게 총을 겨눴다. 남자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케이에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을 지키려는 겁니다.”
“닥쳐…… 닥치라고…….”
케이는 그렇게 말하며 총부리를 하늘로 겨눴다.
탕!
고막을 찢는 소리와 함께 주변 사람들이 뒤로 물러났다. 총소리에 남자들은 큰 반응은 하지 않았다. 대신 한숨을 내쉬며 길을 터줬다. 케이는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엘우드 밀과 케빈에게 조에게서 치료제를 받으면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가 기절시켜서라도 당장 치료제를 사용하라고 말해둔 터였다. 그러니 그들은 입구에 있어야 마땅했다.
케이가 엘우드 밀과 케빈에게 그렇게 말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 여자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또 누굴 살리겠다는 이유로 자신의 삶 같은 건 감히 내팽개칠지 모르니까.
입구 근처에 도착한 케이는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보비들을 힘으로 뿌리쳤다. 그는 제 몸이 흥분하기 시작한 것을 느꼈다. 근육은 커지고 감각은 고통스러우리만큼 예민해졌다. 출입구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보이기 시작한 순간부터는 냄새를 쫓았다. 엘리자베스의 냄새. 그 달콤하고 향기로우며…….
위험한 냄새.
그 냄새를 쫓아 바깥으로 나오자 곧 케이는 나무 아래에서 엘우드 밀과 케빈, 그리고 쓰러진 엘리자베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엘우드 밀이 케이를 발견하자마자 소리쳤다.
“케이!”
케이는 쓰러진 엘리자베스를 보며 말했다.
“치료제는?”
케빈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이 짓을 해야 되는 거예요? 엘리즈가 날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다구요! 그냥 깨어났을 때 잘 얘기해서…….”
“가만히 있어, 케빈…… 가만히…….”
케빈을 말린 엘우드 밀은 엉망이 된 얼굴의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분명하게 얘기하지만 치료제는 하나뿐이야. 후회는 없나?”
엘우드 밀의 질문에 케이는 실소를 터트렸다.
후회가 없냐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 여자를 보내고 나면 남은 생은 지옥일 텐데. 후회라니.
“개소리 지껄이지 마, 엘 선생.”
케이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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