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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17화 (217/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17화

엘리자베스가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났을 즈음에는 이미 모두가 열기구의 추락을 목격하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전단지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입구 쪽에서 막 도착한 사람들은 그 종이를 주워들고 떠들기 시작했다. 1층에 아직 앉아 있는 귀족 중 몇몇도 그 종이를 들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2열쯤에 앉은 니콜슨 공작에게 종이를 쥔 귀족 한 명이 가까이 다가가 뭔가를 속닥거렸다.

엘리자베스는 기둥에 기댄 채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만약에 정말로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 물렸다면? 그래서 이제 케이 하커에게도 엘리자베스에게 그랬듯 운명의 모래시계에서 모래가 떨어지기 시작한 거라면? 그럼 대체 뭘 어떻게 해야 되나?

언제나 죽음에 가까운 쪽은 자신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니콜슨 공작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왕이 돌아왔다!”

니콜슨 공작의 말에 장내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그녀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전단지 하나가 들어왔다. 엘리자베스는 사람들이 짓밟아 발자국이 여러 개가 난 전단을 주워 올렸다.

[레트니 국왕 폐하는 요양을 간 게 아니다! 레트니 국왕 폐하는 조지 왕자의 위험한 반란으로부터 도망친 것이다! 레본의 국민들이여 일어나라! 국왕 폐하가 돌아온다!]

엘리자베스는 전단의 내용을 몇 번이나 읽고도 이해하지 못했다. 전단에서 눈을 뗀 엘리자베스는 무대 아래로 내려오는 조지 왕자를 보았다. 레트니가 요양을 간 게 아니라고?

니콜슨 공작은 무엄하게도 조지 왕자를 손가락으로 똑바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왕이 돌아왔으니 가짜 왕은 내려오라!”

가짜 왕.

엘리자베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솔름의 왕 몰록을 떠올렸다. 두메로 장벽 너머의 왕은 가짜 왕이 맞았다. 그들은 악마에게 매수당한 자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두메로 장벽 너머의 왕이 정말 조지란 말인가.

엘리자베스는 분연히 일어나는 귀족들을 보았다. 그들은 저마다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반역자! 감히 레트니 폐하를!”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얼굴에 걸려 있는 묘한 미소를 보았다. 저들은 지금 자신들에게로 승기가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국왕이…….

[레트니 국왕 폐하가 갸흐통 군대를 이끌고 돌아온다! 생각이 있는 자들은 남부에서 규합하라!]

국왕이 군대를 몰고 돌아오고 있었으니까.

엘리자베스는 파리한 안색으로 니콜슨 공작을 노려보는 조지 왕자를 바라보았다. 조지 왕자는 자신을 가리키는 니콜슨 공작을 향해 칼을 뽑아들었다. 조지 왕자가 외쳤다.

“내가 왕이다! 내 아버지는 레본을 버렸어! 외국의 군대를 끌고 레본에 들어오다니……. 추접스러운 짓이 아닐 수 없다! 나, 조지 클레몬트는 레본 군대의 군수권자로서 명한다! 지금부터 전단지를 들고 있는 자들은 전부 반역자로 잡아들여! 귀족, 평민 할 것 없이 모두의 몸을 수색한다!”

조지 왕자의 말과 동시에 보비와 군인들이 움직였다. 그 말과 동시에 귀족들이 놀라서 우왕좌왕했다.

“엘리즈!”

엘리자베스는 조지의 핏발 선 눈을 보다가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 엘리자베스는 겁먹은 사람들을 뚫고 자신에게 뛰어오는 케빈을 보았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케빈에게 손을 뻗었다.

사람들은 겁을 먹은 채 입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반역이라는 말만 듣고도 의회 청사에서의 테러를 떠올렸다. 평민, 귀족 할 것 없이. 모두에게 떼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자신과는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온 케빈은 가까스로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았다. 그가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알고 있던 거예요? 레트니가 정말로 요양을 간 게 아니라 도망갔던 거예요? 공녀님이잖아요! 알고 있었냐구요!”

“아니. 몰랐어…… 전혀…….”

케빈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상자가 인파에 치여 바닥에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그 안에 있던 유리병이 깨지고 토닉워터가 바닥에 흩어졌다. 엘리자베스는 케빈이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보았다.

“젠장할. 일단 나가요. 우리도 나가자구요. 레트니의 군대가 벌써 리오든 근처까지 오고 있대요.”

케빈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의 손에 들려 있던 전단을 빼앗아 바닥에 내던졌다.

“이런 거 들고 있지 말아요!”

케빈의 말과 동시에 뒤에서 니콜슨 공작의 목소리가 들렸다.

“반역자다! 반역자! 당장 왕자와 케이 하커를 잡아들여! 케이 하커는 조지 왕자의 사주를 받아 국왕 폐하를 죽이려고 한 자다! 극형에 처해야 한다!”

탕!

그때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비명소리도 들렸다. 엘리자베스는 총소리가 난 곳을 찾았다. 하지만 정확히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총을 쥔 자가 누군지, 총에 맞은 자가 누군지도.

“케이…… 케이를 찾아야 돼…….”

엘리자베스가 우뚝 멈춰 섰다. 케빈은 그런 엘리자베스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일단 나가서 찾아요. 케이 하커 같은 교활한 인간이 이런 상황에서 죽을 리가 없어요. 걱정하지 말고 일단 나가자구요!”

케빈은 그렇게 말하며 엘리자베스를 끌고 입구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케빈과 엘리자베스는 금세 입구 근처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꽉 차 있었지만 두 사람은 어찌어찌 바깥으로 나왔다. 전시장 밖으로 나오자 열기구가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를 빙 둘러 지키고 있는 보비들이 보였다. 그들이 소리쳤다.

“전단지 줍지 마! 쏜다! 줍지 마! 왕명이다!”

엘리자베스는 보비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의 파도에 휩싸여 근처 정원까지 흘러왔다. 엘리자베스는 나오자마자 나무에 기대어 서서 숨을 골랐다. 케빈도 엘리자베스의 옆에 붙어 헐떡거렸다.

“이…… 이…… 미친 국왕……. 이 미친…….”

케빈은 숨을 몰아쉬다가 몇 걸음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짐마차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거기엔 엘우드 밀이 서 있었다. 케빈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걷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케이가…… 몰록에게 감염 됐어.”

엘리자베스가 중얼거렸다. 앞서 걷던 케빈이 뒤를 돌았다.

“뭐라구요? 안 들렸어요.”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들었다. 엘리자베스의 눈에는 새빨갛게 핏발이 서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일그러진 얼굴로 케빈을 노려보았다.

“케이가 몰록에게 감염됐어. 아니, 나에게. 나에게 공격당해서 감염됐어.”

“……엘리즈……?”

케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고 케빈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너 알고 있었지? 너 그 자리에 같이 있었잖아. 네 목소리를 들었어. 분명히 들었어.”

‘엘우드 밀! 엘우드으으으으 미이이이이일!’

엘리자베스는 조금 전 떠올린 기억 속에서 재생되었던 그 목소리를 다시 떠올렸다.

‘이 미친 삼촌아!’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멱살을 쥔 채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다. 케빈은 저항하지 않고 그저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고 애원했다.

“진정…… 진정해요……. 컥……. 네? 엘리자베스. 제발 진정해요.”

그때 어디선가 엘우드 밀이 나타나 달려왔다. 엘우드 밀을 본 엘리자베스는 케빈의 멱살을 놨다. 그리고 헐떡거리며 외쳤다.

“당신이…… 당신이 날 속였어. 감히…… 감히…… 날 고쳐주겠다고……. 마지막 남은 치료제를 나보고 쓰라고……. 당신은…… 어떻게…….”

“케이가 그러자고 했어.”

엘우드 밀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러나 싸늘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네가 같은 입장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겠냐? 나는 누가 나에게 두 번의 기회를 준다고 해도 또 디트리히 폰을 살릴 거다. 사랑이란 그런 거다. 눈을 멀게 하는 것.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 나는 레본의 국민 전체를 놓고도 디트리히 폰을 살렸어. 그런데 하물며 자기 자신만 포기하면 되는 일이라니. 케이가 아니라 나라도, 너라도 그렇게 할 거야.”

엘우드 밀은 품 안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 아직도 헐떡거리는 엘리자베스에게 내밀며 말했다.

“숨을 너무 가쁘게 쉬지 마라. 기절할 수 있어. 케빈! 짐마차 안에서 물을 좀 가져와.”

엘우드 밀과 케빈의 눈이 마주쳤다. 케빈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곤 짐마차로 달려갔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을 노려보며 봉투로 입을 틀어막았다. 숨을 쉬고 들이마시고 마시고…… 쉬고……. 엘리자베스는 어질어질한 중에도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를 썼다.

케이 하커. 이 개 같은 자식의 멱살을 잡고 어떻게든 상황을 해결해야 했다. 치료제는 하나뿐이지만 또 어떤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나. 또 다른 방법이…….

“있을 리가 없어.”

숨이 안정된 엘리자베스는 차가운 이성이 돌아온 것을 느꼈다. 그녀는 봉투에서 입을 떼고 중얼거리다가 주저앉아 엘우드 밀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 선생님 말이 맞아요. 사랑이라는 건 맹목이에요. 나만 포기하면, 내가 포기하면 케이 하커가 살 수 있다는데, 그걸 포기하지 못할 이유가…… 이유가 없어. 심지어 그 자식은 내가 아니었다면…… 나만 아니었다면 이런 일을 겪을 이유가 없던 거잖아.”

엘리자베스의 말에 엘우드 밀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 하지 마라. 넌 지금 이성을 잃었어.”

“아니요. 저 지금 진심이에요. 선생님…… 선생님…….”

엘리자베스가 엘우드 밀의 팔을 잡았다. 엘우드 밀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미쳤냐? 어? 케이가 너를 구하려고…… 케이는…….”

“선생님…….”

엘리자베스가 울먹거렸다. 엘우드 밀은 그런 엘리자베스를 내려다보다가 곧 케빈이 뛰어와 내미는 물병을 받아들어 엘리자베스에게 내밀었다. 엘리자베스는 바싹 마른 입안에 물을 들이부었다. 엘리자베스가 벌컥벌컥 물을 마시는 것을 바라보던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엘리즈. 다신 그런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넌 살 거다. 케이는…… 내 기억만 돌아오면 바로 내가 살릴 거야. 내가 기억이 있을 때 치료제를 만들었으니 그때처럼 하면 돼.”

엘우드 밀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엘리자베스는 갑자기 머리가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럴 수 없어요. 선생님…….”

엘리자베스는 물병을 놓쳤다. 엘우드 밀이 물었다.

“왜?”

“왜냐뇨…… 그야 선생님이 치료제를 만든 건 이곳에서가 아니니까요. 선생님이 치료제를 만드는 방법을 알더라도 지금 레본의 기술력으론 무리예요…… 그런데 왜 이렇게 어지러운…….”

“……그래도 할 거야. 나는 반드시 너도, 케이 하커도 살릴 거다. 반드시 할 거야…….”

“선생님. 저 너무 어지러워요. 머리가 빙글빙글.”

“괜찮아. 모두 잘 될 거야. 잠시 잠들었다가 일어나라, 엘리즈. 잠시만.”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땅에 떨어진 유리병을 바라보았다.

저 안에 뭐가 들었던 거야. 저 안에 뭐가…….

엘리자베스는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몸이 고꾸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물병을 내밀었던 케빈을 보며 중얼거렸다.

“너…… 너 또 날 속였어…… 너…… 이번엔…… 이번엔 정말 용서하지 않을 거야……. 흐흑…… 제발 케빈…… 이러지 마……. 이러지 말라고.”

“미안해요, 엘리즈.”

케빈의 슬픈 목소리가 엘리자베스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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