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16화
케이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손수건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E라는 글자를 손가락으로 계속 매만졌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의 뺨에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박람회 끝나고 얘기해. 알겠지?”
케이는 대답이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의 등 뒤로 사람들에게 튀김을 파는 행상을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지나쳐 그 쪽으로 걸어갔다.
1층에 있는 평민들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들은 조지 왕자를 조지 국왕이라고 부르며 환호했고 그들 사이에 둘러싸인 귀족들은 외딴 섬처럼 모여 앉아 불쾌한 얼굴로 저마다 짐을 챙겼다. 귀족들 중 몇몇은 이렇게 수군거렸다.
“조지 왕자가 멜니아의 돈을 먹었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그래서 민주주의니 뭐니 나쁜 물이 든 거예요.”
“레트니 국왕 폐하가 있었어봐! 이런 일은 꿈도 못 꾸지!”
“조지 왕자가 사실 레트니 국왕 폐하를 가둬놓고 있다는 소문 들었어요?”
“쉿……! 조용히 해! 요새 얼마나 흉흉한데……. 조지 왕자에 대한 말을 잘못 했다가는 모가지가 날아갈 수 있어!”
엘리자베스는 귀족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입구 쪽을 향해 걸어갔다. 무지갯빛 열기구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고 축제의 분위기 속에 평민들은 휘파람을 불어댔다. 어디선가 플래시가 터졌다. 기자였다. 레본의 이 역사적인 순간을 기록하려는 시도였다.
평민들은 알고 있었다. 오늘이 역사를 장식할 하루가 되리라는 것을.
엘리자베스는 그들 속으로 스며들었다. 튀김 행상을 향해 걷는 것이었다. 그때 엘리자베스의 시선 속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갈색 재킷을 입은 남자. 엘리자베스는 걸음을 멈췄다.
‘조.’
엘리자베스는 열기구를 보며 얼을 빼놓고 있는 조를 보는 순간 그에게로 걸어갔다. 충동적인 걸음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조의 어깨를 쥐었다. 조가 뒤를 돌았다. 그는 엘리자베스를 보더니 놀란 듯 뒷걸음질을 쳤다.
“……당신.”
“내 얼굴을 기억하는군요?”
엘리자베스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조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축제 한 가운데에서 조만이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는 까칠해진 손으로 제 뒷목을 긁적거렸다. 그의 손은 붕대에 감겨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를 보는 순간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조는 치료제가 없어도 정말 괜찮은 걸까?
“그땐…… 그…….”
“아, 당신이군요. 그, 그, 그날은 깜짝 놀랐어요.”
“손…… 손가락이요…….”
엘리자베스가 걱정스럽게 조의 손을 보았다. 그러자 조가 제 손가락을 가리며 말했다.
“아, 이거…… 마차 바퀴에 깔렸어요. 손가락을 잘라야 한다더라구요.”
마차 바퀴라고?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조의 손가락을 물어뜯어 없앴다고 생각했는데……!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 아니에요?”
“네? 당신 때문에요? 아, 아뇨. 아, 그날요. 그 정도는 봉합할 수 있었을 텐데 그날 선생님을 구하려고 마차에 뛰어들었다가 잘린 거예요. 당신 때문은 아니니까 그건 걱정하지 마요.”
엘리자베스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조는 자신이 몰록에 감염되었다는 건 모르고 있다는 건가? 엘리자베스는 조의 손에 감긴 붕대를 뜯어냈다. 엘리자베스가 제 손을 낚아채자 조의 눈이 커졌다.
“이, 이봐요! 지금 뭐 하는 짓이야!”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멈추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조를 압도하는 힘으로 조를 제압하고 그의 붕대를 찢어내다시피 했다. 조의 손이 드러났다. 아직도 제대로 아물지 않아서 퉁퉁 부은 손가락이 거기에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그걸 보며 이상하게도 케이 하커의 손을 떠올렸다. 기이할 정도로 빨리 아문 케이 하커의 손 말이다.
조가 몰록에 감염되었다면 이 상처는 이미 없어졌어야 했다. 엘리자베스는 조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신체능력이 비정상적으로 증대되었다거나 환시, 환청을 듣는다거나 이상한 꿈을 꾸는 일 없었어요? 다른 사람이 되는 꿈이요.”
“꿈이요?”
조는 엘리자베스에게 짓눌리다시피 한 채로 바들바들 떨었다. 조는 엘리자베스의 힘이 무서운 듯한 표정이었다. 아니면 또다시 엘리자베스에게 손가락을 물릴까 봐 걱정인 것인지도 몰랐다.
“다, 다, 다른 사람이 되는 꿈은 모르겠고 악몽은 꾸죠. 요새도 매일 몰록이 날 찾아오는 꿈을 꿔요. 그래서 그 재수 없는 치료제를 계속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혹시라도 물릴까봐. 그런데 결국 케이 하커한테 팔아넘기긴 했지만.”
엘리자베스는 조의 말에 그대로 굳어졌다.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이상하게 서늘한 기운이 드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조가 치료제를 팔았다는 건 무슨 소리지? 엘 선생님은 분명히 조가 선생님이 걱정돼서 직접 치료제를 갖다 줬다고 했었다.
“케이 하커라뇨……? 무슨 말이에요? 케이한테 치료제를 팔았다고? 엘 선생한테 준 게 아니라?”
“두, 둘이 약혼자 아니에요? 몰랐어요? 케이 하커가 나한테 치료제를 사갔어요. 처음에는 엘 선생님 얼굴이나 보려고 나오라고 불렀는데, 약속 장소에 케이 하커가 왔어요.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몰아치던지. 결국 치료제가 있다고 실토하고 말았다니까요. 그리고 케이가 치료제를 달라고 하길래 비싼 값을 불렀죠.”
그렇게 말하며 조는 선량하게 웃었다. 주머니가 두둑해져 신이 난다는 듯,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말이다. 그러나 곧 조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근데 그 값을 치르고도 두 배는 더 쳐서 주면서 나한테 다른 누구한테도 치료제 얘기를 하지 말라더군요. 뭐, 당신은 케이랑 다시 약혼한다고 하니까 괜찮겠죠……? 그,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케이한테 이야기하지 말아요. 그날 그 사람, 진짜 무서웠다구요. 내가 치료제를 속여 팔았다면 나를 이오페아 대륙 끝까지 찾아내서 몸통을 조각내겠다고 했어요.”
조는 눈앞에 케이 하커가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벌벌 떨었다. 엘리자베스는 손발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엘리자베스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손에 쥐고 있던 조의 손을 놓았다. 그러자 조가 튕겨나듯 털썩 주저앉았다. 조의 몸에서 금화가 떨어졌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소리쳤다.
“돈이다! 돈이야!”
“내, 내 거야! 줍지 마요! 줍지 말라구요!”
엘리자베스는 찰랑거리며 바닥을 굴러다니는 금화를 본 조가 소리를 지르는 것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과 케이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사람이 함께 조에게 치료제를 샀고, 그걸 엘리자베스에게 속인 것이다.
‘좋은 일이야. 내가 바라던 대로 일이 다 잘 됐어.’
‘그런데 표정은 별로 안 좋아, 왜?’
‘너무 좋은 일이 생기면 원래 불안한 법이야. 행복을 손에 넣었는데 잃어버릴까 봐. 사실 그 행복이 허상 같은 것일까 봐.’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조급한 표정으로 와서 엘리자베스를 껴안았던 것을 떠올렸다.
사소한…… 정말 사소한 거짓말일지도 몰라.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불안은 들불처럼 엘리자베스의 내면을 태웠다. 엘리자베스는 까맣게 타들어가는 속내를 감추고 자신의 발밑을 기어다니는 조를 바라보았다. 조는 엘리자베스가 살짝 밟고 있는 제 금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 발 좀 들어봐요. 발 좀…….”
엘리자베스는 그 금화를 차갑게 내려다보다가 조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만약에 케이가 나오지 않았고 케이가 돈을 치르지 않았으면 그 치료제, 엘 선생님한테 드리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엘 선생님이 감염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엘리자베스의 싸늘한 목소리에 조가 고개를 들었다. 조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 왜 줘요? 돈도 안 받고? 난 선생님 밑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이렇게 된 거예요. 이건 노동의 대가라구요. 모르겠어요?”
엘리자베스는 그런 조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선생님이 몰록에 물리셨다면 그건 안타까웠겠지만…… 돈은 치러야죠. 나는 손가락도 잃었는데요!”
엘리자베스는 조를 비난할 수 없었다.
그래. 조는 손가락을 잃었다. 몰록을 쫓기 위해 애쓰다가, 엘 선생을 구하려다가 손가락을 잃은 것이다. 그건 위대한 일이다. 하지만—
위대한 사람이 추락하는 건 왜 한순간일까?
위대함의 값어치와 추락의 값어치를 계산하면 이 사람의 값어치가 나오는 것일까?
아마 그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엘리자베스는 조에게 추락의 값은 치르게 하기로 했다. 엘리자베스는 구둣발로 조의 몸 아래에 깔린 금화들을 찼다. 그리고 아까 속주머니에 넣었던 동전을 뿌리며 말했다.
“다들 주워가요!”
쨍그랑!
금화와 동전이 뒤엉켜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엘리자베스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더 모여들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죄다 조와 엘리자베스 쪽을 돌아보았다. 조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 안 돼! 이거 내 거야! 내 거라고! 저 미친년! 저 또라이!”
엘리자베스는 절규하는 조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지금 조에게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왔던 길을 되짚어 갔다.
케이 하커. 이 개 같은 자식. 감히 나를 속이다니…… 감히…….
엘리자베스는 불안감이 심장을 옥죄는 것을 느끼며 사람들의 냄새를 맡았다.
사람들은 열광에 빠져 있었다.
‘그레이트 레본. 빛이 어둠을 이겼다……!’
엘리자베스는 그 거대한 외침이 저 머나먼 곳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등 뒤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저게 뭐야? 열기구에서 누가 전단지를 뿌리고 있잖아?”
엘리자베스는 그 목소리와 동시에 조지 왕자 근처를 지키고 있던 보비들이 엘리자베스의 뒤쪽으로 뛰기 시작한 것을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들에게조차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한 사람, 케이 하커를 찾아야 했다. 그 개자식을. 그 개 같은 자식을…….
왜 나를 속였는지.
왜 내가 괴물이라는 걸 알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왜 날 사랑한다면서 엘우드 밀과 도망치라고 했는지.
그 모든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엘리자베스는 그 자식의 목을 비틀어서라도 사실을 알아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달리는 엘리자베스의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펑!
뭔가가 터지는 소리였다. 멈춰선 엘리자베스가 뒤로 돌았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무지갯빛 열기구가 힘없는 천이 되어 추락하는 모습이 엘리자베스의 눈에 비쳤다. 아까까지 아름답게 떠올라 있던 그것은 추락하고 있었다.
탕!
그 추락을 보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기억 속 총소리를 기억해냈다. 자신의 입안 가득 퍼지던 케이의 피 맛과 자신의 품 안에서 쓰러져 내리던 케이 하커의 몸.
엘리자베스는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케이가 거짓말한 이유를.
의회 청사 더미 앞에서 케이가 괴물에게 물렸다는 사실을.
그 괴물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젠장할…… 젠장할!”
엘리자베스가 소리를 지르며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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