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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혼하러 돌아왔다 215화 (215/297)

파혼하러 돌아왔다 215화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말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방금……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치료제를 내가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치료제는 선생님의 조수 조가 가지고 있었어요.”

엘리자베스는 꿈속에서 보았던 조의 가방 속 치료제를 떠올렸다. 엘우드 밀은 엘리자베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가 가지고 있었어. 그런데 이제 나한테 있지.”

엘우드 밀은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우유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유리로 된 큰 통이 있었는데 그 통 안에 초록색 빛깔을 뿜어내는 주사기가 들어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었다. 온몸의 혈관이 수축하고 근육이 수축되었다. 초록색 빛깔을 뿜어내는 주사기를 보는 순간, 엘리자베스의 몸 안에 들어 있는 괴물은 마찬가지로 초록색 빛을 발광하던 탄환을 떠올렸다.

엘리자베스의 몸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하지만 그건 나를 죽일 총알이었고 이건 나를 고칠 치료제였다.

그 둘 다 엘리자베스 안의 괴물을 죽일 거라는 건 다를 바가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입을 틀어막았다. 신음소리나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엘리자베스의 입술 사이로 작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엘리자베스는 손을 뻗었다. 엘리자베스의 손끝에 초록빛을 뿜어내는 치료제가 닿으려고 했다. 그때 엘우드 밀이 상자를 닫았다. 아까까지 그의 눈에 감돌던 슬픔 같은 것은 갑자기 사라진 후였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미소에 묘하게 어색한 데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엘리자베스가 놓친 게 있는 걸까? 놓친 게 있다면 대체 뭘까?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생각이 이어지기 전에 엘우드 밀이 말했다.

“어젯밤 조가 연락을 취해왔더구나. 빈민구제원에 내가 다녀갔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했어. 내 이름은 몰라도 그 녀석은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내가 학술원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나를 찾아왔어. 본인한테 치료제가 하나 남았다고 말이야. 혹시 내가 몰록의 공격을 받아 몰록에게 물렸을까 봐…… 걱정이 돼서 왔다고…… 치료제를 줬어. 마지막 남은…… 하나의 치료제를…….”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손이 떨려오는 것을 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까 엘우드가 보여줬던 슬픈 눈빛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때 엘우드 밀이 상자를 들지 않은 손으로 엘리자베스의 어깨를 쥐었다. 엘우드 밀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치료가 끝나면 갸흐통으로 가라. 학술원에서 네 얘기 들었다. 홀램브로 학술지에 이름을 실을 수도 있다지? 갸흐통에서는 뛰어난 여자 과학자도 많다고 들었다. 갸흐통에 가면 적어도 과학계에서는 레본에서처럼 여자라고 차별받는 일은 없을 거다. 게다가 거기에 가면 넌 더 이상 공녀도 아니고 케이 하커의 파혼자도 아니야.”

“갸흐통이요……? 하지만…….”

“왜, 레본이 네 조국이라서? 조국? 조국이 다 무슨 소용이냐. 조국은 아무것도 아니야. 조국은 널 지켜줄 생각이 없어!”

엘우드 밀의 외침과 동시에 조지 왕자의 축사에 환호가 터져 나왔다. 엘리자베스는 앞의 말을 듣진 못했지만 조지 왕자가 뭔가 독려하는 말을 한 듯 사람들이 이렇게 외치며 박수를 쳤다.

“그레이트 레본!”

“그레이트 레본!”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제 어깨에 얹어진 엘우드 밀의 손을 잡았다.

“전…….”

“게다가 레본에는 몰록이 있어.”

엘우드 밀의 눈동자가 엘리자베스의 푸른 눈 속 두려움을 꿰뚫어보듯 말했다.

“레본에는 몰록의 먹잇감이 천지에 널렸지. 이름조차 없는 부랑자들. 죽어도 악어 밥이 되거나 노지에 묻어지는 가난한 이들. 레본의 이 엄청난 과학 기술이 자본가들을 배불리는 동안 그들은 이름도 없는 무덤이 되어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지 못하게 된다. 이 얼마나 몰록이 활동하기 좋은 무대란 말이냐.”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말이 다 맞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레본은 위대하고 강력하면서 동시에 잔인한 나라였다. 엘리자베스에게 한평생 집착과 소유만을 사랑이라고 가르쳐온 클레몬트 공작 부부를 낳은 것도 앗아간 것도 이 나라였다. 엘리자베스에게 맘대로 공녀라는 이름을 주었다가 빼앗아간 것도, 그리고 다시 공녀라는 이름으로 엘리자베스를 가두려고 하는 것도 이 나라였다.

하지만.

케이 하커가 있는 곳도 이 나라였다.

엘리자베스는 2층을 보았다. 케이 하커가 있었던 곳을. 하지만 거기엔 케이가 없었다.

보고 싶다. 당장 너를 안고 말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말이 있다.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레본에는 ‘우리’가 있잖아요. 선생님.”

“엘리즈…….”

“선생님. 제가 이제 선생님의 조수가 되어드릴게요. 몰록을 없애는 것도 기억을 찾는 것도 같이 해요. 계속 같이 해요. 그러면 돼요. 치료는 박람회가 끝나면 해요. 오늘은…….”

엘리자베스는 계속 눈으로 케이를 찾았다. 하지만 축사의 열기가 고조되어 감에 따라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므로 엘리자베스의 시선에는 2층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오늘은 할 일이 있으니까.”

토닉워터를 팔아먹어야 하니까.

프란시스를 구해야 하니까.

케이의 사람들을 살리고 또 나의 사람들을 살리고 레본의 국민들을 살려야 하니까.

그 모든 것에 앞서 케이에게 해야 할 말이 있으니까.

달리는 마차가 앞 마차의 궤적을 이탈하는 순간.

엘리자베스는 그 순간을 목도하고 있었다. 그녀는 엘우드 밀을 보며 웃었다.

“고마워요. 정말. 정말이요.”

“고마울 것 없다. 이건 전부 내가 한 짓을 되돌리는 것에 불과해.”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씁쓸한 표정을 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엘우드 밀의 뺨을 그러쥔 엘리자베스가 엘우드 밀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두 잘 될 거예요. 모두…….”

“엘리즈…….”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의 목을 끌어안았다. 감격스러운 눈으로 유리 천장에서 스며 들어오는 햇빛을 맞이했다. 그녀는 한참을 그 햇살의 따뜻함을 느끼고 있다가 엘우드 밀을 놔주었다.

엘우드 밀은 복잡한 얼굴로 엘리자베스에게 박람회가 끝나면 입구 쪽에서 만나자고 단단히 일렀다. 마치 엘리자베스가 어디론가 도망이라도 갈 것처럼.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우드는 다시 한번 약속을 상기시키고 상자를 든 채 엘리자베스에게서 멀어져갔다. 엘우드 밀이 인파 속으로 사라져가는 그때 조지 왕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본은 이제 다시 평화를 되찾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 상원과 하원으로 개편되는 의회에 저의 권한 대부분을 넘기겠습니다. 기존의 선거권을 확대하고 보통선거를 실시할 것입니다. 여성 참정권 역시 논의될 것입니다. 이제 레본은 과학 기술 뿐 아니라 정치로도 이오페아의 다른 모든 나라를 앞질러갈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보통 선거? 눈을 동그랗게 뜬 엘리자베스가 조지 왕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지 왕자의 말은 이 나라에 의회주의를 다시 도입시키겠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민주주의와 함께.

갑자기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그레이트 레본!”

“그레이트 레본!”

“나라가 전복된다!”

“그레이트 레본!”

엘리자베스는 조지 왕자의 선언과 함께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의 환호성이, 그리고 귀족들의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들었다. 1열에 앉은 앰버 모건은 미소를 지으며 왕자를 향해 박수를 치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모두, 모두 잘 될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조지 왕자를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손을 들었다. 다른 노동자들이 그러듯이 손을 높이 들어 박수를 쳤다.

뜨거운 심장이 마구 박동했다. 정말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었다. 엘리자베스의 마차는 궤적에서 벗어나 알 수 없는 길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맞는 길을 고를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엘리자베스의 손을 낚아챘다. 그녀는 흐려진 시야로 그 상대방을 올려다보았다. 흐린 시야 속에서도 엘리자베스는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케이.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꽉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몸이 굳어졌다. 케이는 잠시 그대로 굳어져 있다가 엘리자베스의 몸을 제 몸에서 떼어내며 말했다.

“엘우드 밀이랑 무슨 얘기 했어?”

케이는 조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엘리자베스는 눈물을 닦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냥. 새로운 시대가 열릴 거라는 얘기를 했지. 새로운 시대잖아. 들었어? 조지 왕자가 방금…….”

“……들었어.”

케이는 한숨을 내쉬더니 엘리자베스의 눈에서 계속 흐르는 눈물을 제 손으로 닦아냈다.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눈물을 닦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에 말을 이었다.

“나…… 나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정말 많아.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꼭 말해주고 싶어. 정말로. 오늘은, 오늘은 말고. 내일, 내일 얘기해줄게. 그 전에…… 그 전에 너한테 꼭 보여줄 게 있거든.”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눈썹이 꿈틀했다.

“뭔데?”

엘리자베스는 집시에게 털릴까 봐 깊숙한 속 안 주머니에 넣어둔 동전을 꺼냈다. 그러자 케이가 피식 웃었다.

“동전? 나한테 주려고?”

“아니…… 아니, 이거 아니고…….”

엘리자베스는 동전을 다 털어내고 나서 주머니 안에서 다른 것을 꺼냈다. 그걸 보는 순간 케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엘리자베스는 너덜너덜해진 손수건을 꺼냈다.

E라는 글자가 수놓아진 손수건.

엘리자베스가 그걸 꺼내는 순간 케이가 이를 아드득 소리가 나게 갈았다. 엘리자베스는 붉은 눈으로 케이를 올려다보았다.

“할 말이 있어.”

“엘리자베스.”

“아까 한 말. 나 그거 취소할래. 날 사랑하지 말라는 말 말이야.”

“……엘리자베스!”

케이는 다급하게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당장이라도 엘리자베스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것처럼. 하지만 케이는 엘리자베스가 들고 있는 손수건을 받아들고 그 손수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케이를 올려다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 사랑해줘. 케이 하커. 날 사랑해줘. 날 보고 싶어해줘. 사랑이 뭔지 모른다면 내가 가르쳐줄게. 나한테도 가르쳐줘.”

엘리자베스가 눈물이 고인 눈으로 햇살처럼 웃었다. 자신의 흐린 시야 속에서 케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엘리자베스는 말을 이어갔다.

“나도 널 사랑할 테니까.”

“……젠장…….”

케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욕을 뱉었다.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사랑해. 케이 하커. 너 때문에 내 세상은 매일매일 더 나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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