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14화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장내에 귀가 얼얼할 정도로 크게 울려 퍼졌다. 어디선가 이런 목소리가 시작되었다.
“조지 왕! 조지 왕! 조지 왕!”
엘리자베스는 그 말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눈으로 찾았다. 자본가들이 모여 있는 4층일까? 귀족들이 모여 있는 1층일까? 노동자일까?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소리의 진원지를 찾기 전에 이미 그 목소리는 여기저기로 퍼져나가 1층, 4층 할 것 없이 각 층에서 조지 왕자를 국왕이라고 부르며 환호했다.
저들의 환호에는 어느 정도의 진심이 담겨 있을까?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돌아보았다. 케이는 말없이 무대 위에 올라서서 사람들에게 손을 뻗고 있는 조지 왕자를 내려다보았다. 엘리자베스가 물었다.
“이용가치 때문이라고 해도 조지 왕자가 평민들의 편이라는 건 좋은 거 아니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의 눈썹이 꿈틀했다.
“글쎄. 그 편이라는 게, 조지 왕자가 조지 국왕이 되고 나서도 유지가 될지를 봐야겠지. 조지 왕자가 권력을 가지고 나서도 그걸 평민들과 나누고 싶어 할지 말이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들으며 막 확성기 앞에 선 조지 왕자를 보았다. 조지 왕자가 탄소 마이크로폰을 잡아당기자 아까 축음기에서 들렸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잡음이 사람들의 귀를 강타했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귀를 막을 뻔했지만 케이가 저지했다.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주위를 살펴보았다. 엘리자베스를 주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없었지만 행동을 조심해서 나쁠 일은 없었다.
“이쪽으로 와.”
케이는 엘리자베스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엘리자베스는 일어나서 박수를 치는 외교관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는 붉은 머리카락의 앰버를 바라보며 말했다.
“넌 앰버랑 같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엘리자베스의 말에 케이가 피식 웃었다.
“우리가 재결합한 것처럼 보이길 원한다고 했잖아. 조지 왕자가.”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 조지 왕자의 축사가 시작되었다.
“친애하는 나의 국민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조지 왕자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지자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서서히 멎어갔다. 조지 왕자는 참을성 있게 그들의 박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엘리자베스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1층 저 아래 쪽에서 한 사람이 엘리자베스가 있는 2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착각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계속 보고 있으니 커다란 화분에 담긴 나무 옆에 서 있는 그 남자는 엘리자베스를 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남자를 보았다. 남자의 얼굴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로열 박람회에 오신 여러분들을 모두 환영합니다!”
조지 왕자가 양팔을 넓게 벌리며 외쳤다. 그 말에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다시 한 번 퍼져나갔다. 이번에는 짧은 박수소리였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옮기지 못했다. 저 남자……
그때 남자가 손을 들었다. 남자가 손가락을 쫙 펴보였다. 손가락이 4개.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손가락 개수를 세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
“4층으로 먼저 가 있어. 내가 금방 따라갈게!”
엘리자베스가 외쳤다. 케이가 뭔가를 얘기하려는 것 같았지만 엘리자베스는 이미 인파를 헤치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가 다시 1층을 보았을 땐 조가 어느새 구석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서둘러 달렸다.
치료제는 조에게 있었다.
“오늘로 그레이트 레본에 진정한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우리는 모두 20일 전의 엄청난 사고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렸고 또 누군가는 레본의 분열을 목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엘리자베스가 달리는 동안 조지 왕자의 축사는 계속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향수 냄새가 진한 선더렌의 귀부인들 틈을 파고들었다. 그들은 엘리자베스가 그들의 어깨를 치고 지나가자 엘리자베스로서는 알아들을 도리가 없는 선더렌 언어로 호통을 쳤다. 엘리자베스는 사과 한 마디 하지 못하고 그들을 지나쳤다.
갈색 재킷을 입은 조가 조지 왕자가 서 있는 무대 쪽으로 걸어갔다. 엘리자베스는 갈색 재킷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저에게는 제 아버지를 잃어버린 곳이기도 합니다.”
조지 왕자의 말끝에 긴 잡음이 들려왔다. 엘리자베스는 코를 파고드는 사람들의 진한 체향 속에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엘리자베스가 달려가는 쪽의 유리 천장 너머에는 파란 하늘 위에 무지개 빛깔의 열기구가 떠 있었다. 사람들은 손수건을 흔들며 외쳤다.
“선왕 폐하, 편안하소서!”
엘리자베스는 귀족들이 눈물을 닦는 모습을 보았다. 그 귀족들 너머로 갈색 재킷의 조가 잠시 뒤를 돌았다. 엘리자베스는 조와 눈이 마주쳤다. 엘리자베스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조가 입을 달싹거렸다.
‘뭐라고?’
엘리자베스는 조의 입모양을 읽으려고 했다. 어떻게든. 하지만 조는 어느새 다시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가 건너편에 있는 조를 따라잡기 위해 귀족들이 앉은 자리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보비 하나가 엘리자베스의 앞을 막아섰다.
“귀족들만 앉을 수 있는 자리다! 돌아가!”
보비의 목소리에 엘리자베스는 보비를 올려다보았다. 보비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넌…….”
“난 엘리자베스 클레몬트다. 날 들여보내.”
엘리자베스의 말에 주변 사람들이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주변에서 그녀를 보고 웅성거리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에 머리를 풀어헤치고 보비를 노려보았다. 엘리자베스의 말에 보비가 흠칫 뒤로 물러났다.
“고, 공녀님…… 죄송하지만…….”
“경사. 경사는 이름이 뭐지?”
엘리자베스는 제 아버지가 했을 법한 짓을 했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권력을 이용해 상대의 공포심을 자극하고 그걸 통해 실질적인 이득을 얻어내는 것. 그게 클레몬트 공작이 엘리자베스를 조종하는 방법이었다.
공작은 그 방법이 로버트 하커에게도 통할 거라 믿었을 테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아버지…….’
엘리자베스는 죽은 엄마의 환영을 본다던 프란시스가 그러하듯 하늘을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은 티 없이 맑기만 했다.
‘당신을 저주해. 당신이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길 바라.’
엘리자베스는 처음으로 죽은 부모를 저주했다. 그들이 엘리자베스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엘리자베스를 협박하고 굴복시키고 종래에는 그들의 방식을 엘리자베스의 몸 깊숙이 새겨놓았으므로.
엘리자베스는 그들에게 배운 방법 그대로 케이를 사랑했다. 케이를 협박하고 굴복시켰다. 눈에 굴종이 없는 자에게 굴종을 강요했다. 그게 엘리자베스가 배운 유일한 사랑이었다.
케이도 그랬을 것이다. 케이가 배운 사랑은 오로지 서로를 피투성이로 만드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프란시스가 그랬고 켄드릭이 그랬으며 로버트가 케이에게 그랬으니까.
경사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다른 보비가 와서 보비의 어깨를 주무르며 귀에 뭐라고 속삭였다. 그 말을 들은 경사가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옆으로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엘리자베스는 경사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그들을 지나 귀족들이 앉은 의자를 헤치며 지나갔다. 그들은 엘리자베스가 우악스럽게 그들의 무릎을 치며 지나가자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그저 저 건너편에 있는 조의 갈색 재킷만을 눈으로 쫓았다.
“……우리 모두가 그 슬픔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국민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민들.
엘리자베스는 조지 왕자의 단어 선택에 불편을 느끼는 귀족들의 헛기침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조를 쫓다가 힐끔 무대 위에 올라 있는 조지 왕자를 일별했다. 그는 진심으로 북받친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의 진심은 모두에게 전해지는 듯했다. 그게 귀족들에게는 불쾌함으로 와서 닿을 뿐이었다.
조지 왕자는 레트니와는 다르다. 엘리자베스는 귀족들의 구역을 가로질러 벗어나며 생각했다.
레트니는 자신을 레본 그 자체라고 여겼지만 조지 왕자는 자신을 레본의 정치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레트니는 도무지 표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레본을 이끌어갔지만 조지 왕자는 그 반대였다. 자신의 표정을 드러내고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 왕자의 투명함이 엘리자베스에게는 진심으로 와닿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레트니는 그것이 나쁜 의지라고 하더라도 그의 의지에 늘 진심을 담았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을 레본의 중심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조지 왕자는 그게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이였다.
조지 왕자는 레트니와 그냥 다른 정도가 아니다. 그 둘은 거울처럼 완벽하게 반대였다. 그러니까 귀족을, 자본가를, 노동자를, 전부 묶어 ‘국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숨차게 달려 보비들의 경호라인을 넘어 조가 있을 법한 장소에 도착했을 때 엘리자베스는 갈색 재킷을 입은 한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
“당신……!”
엘리자베스가 소리쳤을 때였다. 남자는 놀란 눈으로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그는 조가 아니었다.
“뭐, 뭡니까?”
엘리자베스는 남자의 어깨를 쥔 손에서 힘을 뺐다. 그러자 남자는 어깨가 아프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며 그녀를 스쳐지나갔다. 엘리자베스는 주변을 보았다.
조. 조는 어딨지? 엘리자베스는 갈색 재킷을 입은 남자를 눈으로 계속 찾아 헤맸다. 하지만 조가 없었다. 심지어 너무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어 엘리자베스는 중심을 잡고 서 있기도 힘들었다. 누군가가 엘리자베스의 등 뒤에 와서 섰다. 엘리자베스는 뒤를 돌았다.
“엘 선생님!”
엘리자베스가 외쳤다. 그 말에 엘우드 밀이 피곤해 보이는 초록 눈동자로 엘리자베스를 빤히 보았다. 엘리자베스는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제가 사람을 찾고 있거든요. 그 사람이 누구냐면…… 그 사람이……. 그게…… 선생님도 아시는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선생님 때문에 저도 알게 된 사람이니까요. 제가 꿈을…… 제가 혹시 꿈에 대해 이야기했었나요? 꿈을…… 아니, 그니까, 제 말은 치료제를……. 그 사람이 치료제를 가지고 있을 거거든요…….”
치료제라는 말에 엘우드 밀의 눈썹이 꿈틀했다. 엘우드 밀은 횡설수설하는 엘리자베스를 슬픈 눈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치료제를 찾냐?”
“당연하죠.”
엘리자베스는 엘우드 밀을 올려다보았다. 엘우드 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치료제는 조한테 없다.”
“선생님? 조의 이름을 어떻게…….”
것보다 제가 조를 찾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엘리자베스가 그렇게 물으려고 할 때였다.
“나한테 있으니까.”
엘우드 밀이 말했다.
“지금 내가 치료제를 가지고 있다, 엘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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