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혼하러 돌아왔다 213화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품에 안겨서 떨어지는 모자를 바라보았다. 아까의 지지직거리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보고 싶어…….’
그 목소리에 담겨 있던 간절함, 다급함. 엘리자베스는 그것들이 갑자기 제게 다가와 현실이 되 것을 느꼈다. 다시는 대화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대와의 마지막 만남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은 마음.
엘리자베스는 케이에게 왜 갑자기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지 물어보는 대신 케이의 어깨를 꽉 쥐었다. 으스러지도록.
하지만 케이의 몸은 으스러지지 않았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등에 손을 얹고 케이의 갈비뼈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느꼈다.
이건 환각이 아니었다. 케이의 몸은 진짜다. 케이의 목소리도, 케이의 감정도.
우리는 지금 여기에 함께 있다.
엘리자베스는 그게 믿어지지가 않아서 자꾸만 케이의 품안을 파고들었다.
“……안 본 지가 10년은 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
케이는 중얼거렸다. 엘리자베스는 절망했다. 저들이 사람들에게 희망이랍시고 들려준 저 축음기 속 목소리는 얼마나 나쁜가. 저 검은 커튼을 나오면 사람들은 순식간에 또 차가운 현실에 내던져질 텐데. 다시는 사랑하는 이를 만날 수 없는 곳에서 또 끔찍한 지옥을 살아야 할 텐데.
천국의 목소리라니.
“젠장…….”
엘리자베스는 이를 악물고 케이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다정한 케이 하커라니. 이렇게 나를 원하는 너라니.
내 인생에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너의 마음을, 내가 죽어야 하는 날이 2개월밖에 남지 않은 이 순간 얻었다니.
이건 신이 만든 조잡한 지옥이 아닐 수가 없었다.
* * *
“무슨 일이 있어?”
엘리자베스는 케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케이는 자신이 언제 그렇게 고통스러운 목소리를 냈었냐는 듯, 다시 평소와 같은 오만하고 비틀린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겁먹은 얼굴로 나에게 달려와 나를 안고 보고 싶었다고 말했을까. 엘리자베스는 불안한 눈으로 케이를 보았다. 하지만 케이는 아까의 조급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미소까지 띈 채로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좋은 일이야. 내가 바라던 대로 일이 다 잘 됐어.”
“그런데 표정은 별로 안 좋아, 왜?”
“너무 좋은 일이 생기면 원래 불안한 법이야. 행복을 손에 넣었는데 잃어버릴까 봐. 사실 그 행복이 허상 같은 것일까 봐.”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다가 엘리자베스의 허리에 얹었던 손을 풀며 말했다.
“겁먹었나?”
“뭐?”
“내가 널 보고 싶다고 해서. 내가 혹시 너한테 매달릴까 봐. 너한테 집착하고 네가 엘우드 밀에게 가지 못하게 가둬둘까 봐.”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가만히 있자 케이가 비릿하게 웃었다.
“뭘 그래? 사랑한다는 말도 아닌데.”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어깨가 굳었다. 엘리자베스는 바이올렛 꽃다발을 들고 서 있던 피투성이의 케이를 떠올렸다. 케이가 사랑이라는 말을 감히 입에 담았던 그 순간.
케이에게 사랑은 왜 그토록 피투성이인 걸까.
엘리자베스는 주먹을 꽉 쥐고 케이를 노려보았다.
“나 사랑하지 마. 나 보고 싶어 하지도 말고.”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싸늘한 말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엘리자베스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비틀린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노력하지.”
노력이라고?
‘감정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게 아니야.’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을 떠올렸다. 노력을 한다고 해서 감정이 변하는 건 아니잖아. 그런데 지금의 케이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노력을 말했다.
“나 진심이야. 박람회가 끝나면 엘 선생님이랑 잘 해볼 거야. 정말이라고.”
“그래. 그렇게 해.”
엘리자베스는 케이가 자신의 말을 조금도 듣고 있지 않다는 생각 때문에 겁에 질렸다.
이 망할 자식. 이 망할 자식!
엘리자베스는 중얼거렸다.
“이번엔 네가 날 기다린다고 해도 안 가. 네가 바실리에 있는 윌리엄 조쉬의 집 앞에서 날 기다린 것처럼 날 기다린다고 해도……. 그래도 난 절대로 안 가. 밤을 새도, 백 년쯤 지나도…….”
“울지 마.”
“우는 거 아니야. 이 개자식.”
엘리자베스가 부어오른 눈을 꾹꾹 누르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뒤로 돌았다. 그리고 겁에 질려서 부스를 철수하기 시작한 심령과학회 회원들을 보았다. 케이는 사람들의 원성에도 짐을 챙겨 나오다가 엘리자베스를 보고 흠칫하는 그들과 눈이 마주치곤 엘리자베스를 보며 물었다.
“왜들 저러는 거지?”
“……몰라?”
엘리자베스는 딴청을 피웠다. 그러나 케이의 시선이 계속 제게 떨어지지 않자 회원들을 노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여기서 장사하면 저놈들을 죽여버릴 거라고 했어. 정말로. 진짜 죽여버릴 거라고.”
엘리자베스가 자신이 했던 짓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심령과학회 회원들은 항의하며 멱살까지 쥐는 사람들에게 돈을 돌려주기까지 하고 있었다.
“정말이야?”
“당연하지. 그럴 만했어.”
“……잘했어.”
케이는 엘리자베스에게 더 뭔가를 물어보는 대신에 토닉워터 부스를 턱짓했다.
“부스가 텅 비었네. 아무래도 내가 투자한 돈을 찾긴 무리겠어.”
엘리자베스는 얄밉게 말하는 케이를 노려보다가 부스를 보았다. 그러자 케이와 엘리자베스의 포옹을 탐탁지 않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는 케빈과 눈이 마주쳤다. 엘리자베스는 헛기침을 하며 케이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방법을 찾아야지.”
엘리자베스는 토닉워터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일단 입소문을 타기만 하면 충분히 잘 팔릴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전생과 이번 생에서 토닉워터에 대한 반응이 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토닉워터가 너무 빨리 나왔기 때문일까? 아니면 케빈 퍼킨 같은 천재 소년이 퀴닌을 발명한 게 아니라 자신이 발명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불안한 생각에 빠져 있다가 퍼뜩 엘우드 밀의 말을 떠올리며 케이에게 물었다.
“너 아까 입구 쪽에 갔었지?”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케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케이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엘리자베스가 또 물었다.
“거기서 피쉬 앤 칩스 파는 행상 못 봤어?”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 한두 개쯤은 있었겠지. 기억은 정확히 안 나지만 이런 곳엔 그런 행상이 무조건 꼬이기 마련이야.”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우드 밀은 비스킷과 우유를 같이 나눠줘서 저온 살균 부스가 잘 되었다고 했으니 이쪽은 튀김과 토닉워터를 같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토닉워터는 첨가된 퀴닌 때문에 뒤끝에 약간의 쌉쌀한 맛이 남았다. 그것에 중독된 사람들은 토닉워터를 술에 타먹기도 하고 매일 한 잔씩 마시기도 했지만 또 막상 그 맛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싫어하기도 했다. 하지만 튀김과 같이 먹을 때는 튀김의 기름기를 잡아줘 매력 있는 음료였다. 특히 원래 튀김과 잘 어울리는 맥주는 와인과 달리 숙취가 심하고 건강에 나쁜 서민들의 술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토닉워터는 기름기를 잡아주고 속을 편하게 하는 건강에 좋은 음료라는 인식이 박혀, 어느 순간부터는 펍에서 맥주의 판매량을 웃돌았었다.
“케빈! 이쪽으로 와!”
엘리자베스가 케빈을 부르자 케빈은 떨떠름한 얼굴로 엘리자베스에게 대답했다.
“왜요! 귀찮아요!”
“너 삐졌어?”
엘리자베스가 케빈을 부르자 케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오오오?”
케빈은 그렇게 말하며 케이 쪽을 째려보았다. 케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곤 엘리자베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멱살을 잡고 끌고 올까?”
“닥쳐, 케이 하커.”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어깨를 주먹을 때렸다. 그녀는 케빈을 바라보며 허리에 손을 올렸다. 케빈은 얼굴을 잔뜩 구기곤 터덜터덜 엘리자베스 쪽으로 걸어왔다.
“왜요, 왜, 왜!”
“내가 돈 줄 테니까 1층에 있는 행상 가게에서 튀김을 털어와.”
“피쉬 앤 칩스 같은 거요? 왜요? 배고파요? 우리가 지금 우리 점심 값도 못 벌었는데 무슨 튀김을 먹어요…….”
케빈이 텅 빈 부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토닉워터랑 같이 나눠주게! 저온 살균 우유는 비스킷이랑 같이 나눠준 덕에 대박이 났대!”
“루이 교수님네 부스는 대박이 났어요? 아, 진짜 짜증나네……! 우리도 식품 쪽으로 가서…….”
케빈이 씩씩거리는 것을 보던 케이가 케빈의 말을 막으며 말했다.
“튀김을 사오지 말고 토닉워터를 무료로 나눠줘. 한 행상당 두 상자씩. 미리엄! 시음용 토닉워터 들고 이리와!”
엘리자베스가 케이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무료로 나눠준다고? 그럼 행상에서 판매할 텐데? 우리가 무료로 증정한 걸 행상에서 판매하면 좀 그렇잖아. 행상 주인들한테 팔지 말라고 해봤자 말도 안 들을 거고.”
“당연하지. 그리고 팔지 말라고 할 필요도 없어. 사람들이 토닉워터를 행상에서 사느니 이쪽으로 올 테니까. 라벨에 공장 이름도 적혀 있는데.”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런 게 바로 장사꾼의 기술이라는 걸까? 엘리자베스가 벙쪄 있자 케이는 그런 엘리자베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나는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해. 엘리자베스.”
“두 상자씩?”
엘리자베스와 케빈이 멍하니 서 있는 사이 미리엄과 케이는 빠르게 움직였다. 그걸 바라보고 있던 케빈도 빨리 상자를 옮기는 것에 가담했다. 공장 식구 한 명을 더 부른 미리엄과 케빈, 엘리자베스는 토닉워터를 각자 2상자씩 들고 입구와 2, 3, 4층을 돌기로 했다.
행상은 꼭 입구 쪽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박람회장 내부에서 음식을 파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행상들은 배짱 좋게 잠입해 들어와 장사를 했다. 4층을 맡은 엘리자베스가 상자 2개를 집어 들려고 할 때 케이가 엘리자베스에게서 상자를 빼앗아 들었다.
“왜?”
“같이 다녀야지. 우리 친밀해 보여야 하잖아.”
엘리자베스는 케이의 말에 주변을 보았다.
“요새도 보비들이 감시해?”
“글쎄. 그렇겠지.”
엘리자베스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런데 왜 왕자 전하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거지?”
케이는 엘리자베스의 말에 그녀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며 대답했다.
“간단해. 내가 쓸모가 있으니까. 아직도 레트니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못한 귀족들을 선택하느니 차라리 평민들을 끌어안겠다는 계획이겠지.”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1층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왕자 전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왕자 전하의 축사가 있겠습니다! 정숙! 정숙!”
그 목소리에 사람들이 난간 쪽을 일시에 쳐다보았다. 엘리자베스는 사람들이 난간 쪽으로 몰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케이가 말했다.
“이제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면 행상을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행상이 있을 테니까.”
케이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자베스는 계단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막 무대 위로 걸어 올라오는 조지 왕자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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